誠者,天之道也;誠之者,人之道也。
( Chéng zhě, tiān zhī dào yě; chéngzhī zhě, rén zhī dào yě. )
---- 子思 《禮記·中庸》22:7
_____
Der bestirnte Himmel über mir, und das moralische Gesetz in mir. ---- Immanuel Kant (KpV: AA 05: 161.33–36)
________________________
ἃ γὰρ δεῖ μαθόντας ποιεῖν, ταῦτα ποιοῦντες μανθάνομεν (What we have to learn to do we learn by doing.)
---- Ἀριστοτέλης (Nic. Eth. 1103a33)
Alileo Books Season 6, Episode 19 Park Eun-jung, National Assembly Member (Fatherland Innovation Party) on: 박은정(Park, Eun-Jung, 2025) 징계를 마칩니다(Disciplinary Action Completed) Part 1 Planning: Choi Hyun-bin / Director: Jeong Il-chae / Writer: Seo Ja-young (P) People's World Roh Moo-hyun Foundation
알릴레오 북스 시즌 6 ep.20 박은정 국회의원 (조국혁신당)
on: 박은정 (2025) 징계를 마칩니다(Disciplinary Action Completed) 2부
차기태(2011): 사실 '비판은 하되 배반은 하지 않는 것'은 쉽지 않다. 세이렌의 유혹으로부터 벗어나는 것만큼이나 어려운 일이다. 한쪽으로부터는 박해와 수난의 위협을 받고, 다른 한쪽으로부터는 기회주의자니 회색분자니 하는 낙인이 찍히기 일쑤다. 때문에 중용의 자세를 지키는 사람은 남다른 고뇌와 갈등을 피해 갈 수 없다. 세상에서 잊히거나 수난과 몰락의 운명을 감수해야 한다. 중용의 길을 걸은 인물 가운데 소크라테스와 토마스 모어는 사형당했고, 에라스무스는 가톨릭과 프로테스타트 양쪽으로부터 비판과 의심을 받았다. 소크라테스는 친지들로부터 탈옥하라는 권유를 받았지만 뿌리쳤다. 백범 김구는 암살당했다. 이렇듯 어느 쪽으로든 치우친 노선을 배격하고 중용의 길을 선택하는 것은 가시밭길을 예약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어찌 보면 이것은 생각이 깊은 사람들 모두의 숙명일지도 모른다.
에라스무스가 양쪽으로부터부터 외면당할 위험을 감수하면서 중용의 길을 가기로 한 것은 무엇보다 진실에 입각해 생각하고 살아가려는 자세 때문이었다고 생각된다. [278-279]
말이 아닌 삶에서 중용은 목표가 아닌 유일한 결과들일 뿐이다. 극소수의 눈에만 그렇게 보이는.
그게 남자의 결과일 때에는 소수의 추종자 모임이 생기기 마련이다. 최소한의 사실들은 이후 그들에 의해 전달되고 기억된다. 그게 여자의 결과일 때에는, 거기에 어떤 결과라고 부를 만한 것은 애초에 남아 있지 않고, 대신 모두가 사형 선고에 찬동하기에 그 중 누구나 때때로 손쉬운 입지에 이르기만 하면 득의양양 살해 시도의 대상으로 삼는 한 사람의 악덕과 평화로운 '결말'의 이야기가 만들어진다. 그리고, 통으로 삭제된다. 요즘은 악덕보다 무능이란 죄목을 붙이는 추세다.
우연한 사은품으로 받았다. 만년필이나 딥펜을 조금 자주 쓰게 되니 가끔 필요를 느끼기도 했고. 안 그래도 책상이 복잡해서 괜히 선택했나 했지만, 받아 보니 뜻밖에 무지 맘에 든다. 잠깐은 어설픈 펜레스트 구실도 하고. 밑면에 미끄럼 방지도 된다.
George Orwell (1946): 지난 10년을 통들어 내가 가장 하고 싶었던 것은 정치적인 글쓰기를 예술로 만드는 일이었다. 나의 출발점은 언제나 당파성을, 곧 불의를 감지하는 데서부터다. 나는 앉아서 책을 쓸 때 스스로에게 '예술 작품을 만들어내겠다'고 말하지 않는다. 내가 쓰는 건 폭로하고 싶은 어떤 거짓이나 주목을 끌어내고 싶은 어떤 사실이 있기 때문이며, 따라서 나의 우선적인 관심사는 남들이 들어주는 것이다. 하지만 나는 미학적인 경험과 무관한 글쓰기라면, 책을 쓰는 작업도 잡지에 긴 글을 쓰는 일도 할 수 없을 것이다. 내 작품을 꼼꼼히 읽어보는 사람이라면, 노골적인 선전 글이라 해도 전업 정치인이 보면 엉뚱하다 싶은 부분이 꽤 많다는 걸 알 것이다. 나는 어린 시절에 갖게 된 세계관을 완전히 버릴 수도 없고, 그러고 싶지도 않은 것이다. 계속 살아 있는 한, 그리고 정신이 말짱한 한, 나는 계속해서 산문 형식에 애착을 가질 것이고, 이 지상地上을 사랑할 것이다. 구체적인 대상과 쓸모없는 정보 조각에서 즐거움을 맛볼 것이다. 나 자신의 그러한 면모를 억누르려고 해봤자 소용없다. 내가 할 일은 내 안의 뿌리 깊은 호오好惡와, 이 시대가 우리 모두에게 강요하는 본질적으로 공적이고 비개인적인 활동을 화해시키는 작업이다.
봄은 동틀 무렵. 산 능선이 점점 하얗게 변하면서 조금씩 밝아지고, 그 위로 보랏빛 구름이 가늘게 떠 있는 풍경이 멋있다.
여름은 밤. 달이 뜨면 더할 나위 없이 좋고, 칠흑같이 어두운 밤에도 반딧불이가 반짝반짝 여기저기에서 날아다니는 광경이 근사하다. 반딧불이가 한 마리나 두 마리 희미하게 빛을 내며 지나가는 것도 운치 있다. 비 오는 밤도 좋다.
가을은 해 질 녘. 석양이 비추고 산봉우리가 가깝게 보일 때 까마귀가 둥지를 향해 세 마리나 네 마리, 아니면 두 마리씩 떼 지어 날아가는 모습에 가슴이 뭉클해진다. 기러기가 줄지어 저 멀리로 날아가는 광경은 한층 더 정취 있다. 해가 진 후 바람 소리나 벌레 소리가 들려오는 것도 기분 좋다.
겨울은 새벽녘. 눈이 내리면 더없이 좋고, 서리가 하얗게 내린 것도 멋있다. 아주 추운 날 급하게 피운 숯을 들고 지나가는 모습은 그 나름대로 겨울에 어울리는 풍경이다. 이때 숯을 뜨겁게 피우지 않으면 화로 속이 금방 흰 재로 변해 버려 좋지 않다.
헤어 나올 수 없는 심해와 같은 필감. 십일 년 동안 맺힌 응어리가 풀려 나가고, ef 촉으로 한자의 흘림체(일단 행서 정도)까지 마냥 뜻밖으로 절로 구현되는(마법사 된 줄), 기술이라기에도 문화라기에도 설명이 부족한 인문 세계의 결정체. 손 안에 쥐어져 외국인의 영혼에 담기는 일본이라는 오롯한 이름의 역사와 유산. 50% 모자란 듯 은연한 펄로 침잠하는 내밀한 자태.
헤이안과 21세기. 내궁과 공방. 여방의 문재와 레진의 발색. 붓과 촉. 이것이 미디어. 그저 잇는 것이 아닌 훌쩍 여는. 명작이 낳은 명작. 마감까지 완벽한 제조력이 선사하는 무한히 자유롭게 모험할 시간.
더 느리게 나으면 될 것 같아. 마음이 가라앉음.
그리고 평생 친구 생겼다. 초서를 거쳐 장한가(대륙 현지 구입한 원서가 책장에서 먼지만 쌓고 있었다.) 술술 필사할 날까지 go go.
일본어는 히라가나를 외우는 데 몇 번 실패해서 더 늙은 이젠 자신이 없어졌는데, 필사는 못 해도 모사는 할 수 있겠지? 하나 있는 하이쿠 책의 위치를 알 수 없음.
나한테도 손에 잡을 수 있는 무언가가 하나쯤은 있는 것이 필요한 때라는 생각이 들어서. 무소유가 과도한 삶.
+++
BBC Radio 4 (2008) The Pillow Book by Robert Forrest <-- 내 이랬을 줄 알았어!!! (바라는 식은 아니었다. 로맨스 스릴러라고. 영국은 뭐든 그대로 하는 법이 없다니까. 좀 샬럿 브론테 분위기네. 포레스트 씨 취향이 세이 쇼나곤보다는 무라사키 시키부 쪽인걸. 겐지의 성별과 신분을 바꾼 격. 원본 잘 살리는 건 역시 독일. 아니. 생각해 보니, 황궁 delicate 화술을 독일어로 구현하기는 어려울 듯.)
조정권 (1994): 그의 회화는 ‘그려진’ 것이 아니라 붓질에 의해 ‘생성된’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는 지금까지 화면에 무엇을 그려넣거나 나타내 보이겠다는 전통적인 ‘그리는’ 방식에서 떠나 있다. 이 떠나 있는 지점이 그의 회화가 발생하는 정신의 지점이다. 아무것도 그려져 있지 않은 허적(虛寂)의 캔버스를 자연색으로서의 순백색으로 여러 번 묽게 마음의 감으로 칠해나가는 그의 작업은 결국 애초부터 아무것도 실려 있지 않았던 캔버스의 투명한 존재 영역 속으로 환원하는 과정을 보여주고 있다. 그 결과 아무것도 그려져 있지 않은 그의 회화가 도달하는 곳은 투명성이 아닐까. 그는 그 내용 없는 투명한 본질의 구조를 모세가 지팡이 자국으로 바닷물을 갈라 보이듯 열어 보이려 한다. [135]
그의 백색은 마음의 근원으로의 환원을 의미한다. 그는 평면에 밀착된 백색이 물질로서 남는 것을 거부한다. 그는 정신의 흔적으로서 묽은 백색을 붓질해나가는 것이며 그 흔적을 바탕에 가라앉히기 위해 10번 또는 6번 어떤 때는 수십 번 칠해나간다. 그것은 마치 이끼 낀 바위 위로 오랜 시간 냇물이 흘러내리는 것과 같다. 많은 이 땅의 작가들이 착각하는 게 있다면 ‘현상’은 그려질 수 있다는 믿음이다. 그러나 ‘현상’이란 애초부터 그려질 수 없는 어떤 성질이 아닐까. 서구적 이성에 반하는 반성적 의미에서 동양적 정신으로 수용하는 자연의 현상은 무(無)로의 회귀이다. 생성도 결국 무에 굴복하기 위해 태어난 것이고 소멸도 역시 무로의 회귀이다. 생성도 결국 무에 봉사한다. 그는 무 한가운데 존재하는 거대한 투명성을 훔치고 싶어하는 것이 아닐까. 그 투명성에 도달하기 위한 정신의 여정이 그의 붓질 행위란 점에서 그의 흰 화면을 일단 백색의 현상학이라고 보면 어떨까. 최종 붓질이 끝날 때는 많은 시간적 작용이 지나간 후이지만 그는 처음에 그은 것과 같은 투명한 맛이 감과 맞아떨어졌다고 생각될 때 손을 놓는다. 그는 결코 덧칠을 하거나 지우거나 해서 화면을 죽이거나 살리거나 하지 않는다. 그의 손과 정신은 자연의 간섭을 최대한 끌어들이는 데 주저하지 않는다. 말하자면 붓질 속에서 우연성을 끌어들이고 자연과 의지가 만나 조화를 이루었다고 판단될 때 작업을 끝낸다. [136]
서유럽 이론에 기댈 의도가 전혀 없더라도 '현상학' 피해 가기도 어렵긴 하지. 하지만 존재론적 특성 때문에 와이트헤드와 더 잘 맞긴 하다. 결국 저자 말대로 '선(禪)'으로 잘 통한다는 점에 동의. 하지만 동아시아 사상에만 매여 있으면 작품의 미술사적 의의와 작가의 획기적 의도를 읽을 수 없게 된다.
시인이라서 직업 평론가들의 글과는 확실히 다르다. 시가 참 좋은데, 구도(求道)를 행한다는 고양의 자의식이 아닌 일상의 공간에서 이처럼 무위 해탈을 이루는 습속의 결과였나 보다.
난 논어 좋아 죽는데. 너무 부러워서 괴롭고. 이해가 매번 달리 돼서 자꾸 또 읽게 됨. 재미가 끝이 없음. 구절마다 경중의 차이만 있을 뿐 충격인데, 뻔하다는 건 주해를 통해서라도 원문을 고민하지 않고 번역문만 그대로 읽은 경우라고 밖에는 생각되지 않는다. 그렇더라도 그 '뻔한' 이야기만큼 내 현실들에 위로가 되는 것이 아직까지 없었고. 무엇보다, 살 냄새. 무릎이 스칠 정도의 거리에서 같이 오래 생활한 것 같은, 담담하지만 묵직한 기분. 팔팔한 인물상들.
정진 닦으며 선정 못 넘어가고 있는 나로서는 인욕은 옛 일. 이미 그런 상태에서 인문계로 왔었으니. 대신 비싼 값을 치렀다. 치르고 있고.
맹자. 주자. 그러니 정도전이야말로 대단한 것. 실현시키고 나서 사형당했으니. (살인마 이방원 조상님.) '王道'를 이상이 아닌 '제도'로 만들어 버림. (그 道에서 벗어나면 법적으로 더 이상 王이 아니게 됨. 벗어났는지 여부를 가리는 판단은 공무원 시험에 고득점으로 합격하고 차곡차곡 승진해 온 재상들의 협의로 함. 문과 공무원 시험 교과목은 윤리학, 정치철학, 시문학으로 작문.) 종횡으로 修身이 내습된 정치체제를 구현.
노자는 평생 실천이 힘들어서 늘 부대꼈기 때문에 거꾸로 가깝게 느껴진다. 몰라서 헛손질을 하게 되고 한 걸음도 못 가 자꾸 넘어지니 오히려 눈을 떼지 못하는 것처럼. 이 화백이 하도 좋아라하셔서 그래도 무서워하거나 낯가리진 않게 되었다. 연의나 무협 영화에 기인 광자들이 빠지지 않고 나와서도. 이 분들이 학생 때 공부만 했나 봐. 홍콩 영화도 좀 보고 그러지. 일본 만화를 보거나. 동아시아 영웅상 중에 할리웃 히어로 같이 나이브하거나 상처에 허우적대는 범생은 없음. 제동 씨, 천재네. 하이젠베르크가 겨울 휴가 때 스키장 놀러 갔다가 폭설로 갇히게 되어 날 좋은 날 지붕 위에서 노자 읽다가 낮잠에 들었다 일어나 불확정성의 아이디어가 나왔을 걸. 본인 각색이 있을 수 있지만. 내 십 대의 히어로.
난 묵자가 좀 무서운 냄새가 있다. 투박한(예리하지 못한) 예수 같아.
한비자는 앞에 조금 읽다 말아서 읽었다고 할 수 없지만. 극단적인 정신적 위기에 필사의 동아줄처럼 잡았다가, 아예 등떠밀듯 추락당해 바닥을 치자 모든 '이유'가 산산이 깨지면서 결과적으로 '인욕' 바라밀을 훌쩍 넘어가게 된 극적 경험이었다. 지금도 책장 안쪽에서 고이고이 존재감만 띠고 있다.
그때 반죽음 상태에서 응급실로 찾아갔던 것이 알고 보니 이강수 선생님의 제자이신 이진용 선생님의 문지에서 열린 장자 강의였지. 붕새와 벼룩. 8주 동안 내 모든 질문을 다 풀어 주셨다. 반야가 한 단계 업그레이드.
타르코프스키에게 방법인 것이 베리만에게 소재이다. 배타적이지 않을 뿐. 이래저래 나에게는 마치 갈릴리의 예수와 타르소스의 파울로스 같다. 성공한 예술에서 작가의 의도란 관객에게 전달된다기보다는 관객 안에서 피어난다. 고유하게.
연출에 완전히 자유롭지 못했음을 알 수 있었는데 책에 그 형편이 나와 있다. 속 뻔한 작태들과 입장 없음이라는 강력한 입장을 무력증의 핑계로 대고 있는 내가 한심하다. 철학 고전과 미학 페이퍼는 예술-공학자들과 읽게 되겠지. 변명 없이.
Андрей Арсеньевич Тарковский (Andrey Arsenyevich Tarkovsky, 1986): (네 번의) 모든 꿈은 상당히 구체적인 연상을 근거로 하고 있다. 예를 들면, 첫 번째 꿈은 처음부터 끝까지, 바로 "엄마, 저기 뻐꾸기가 있어!"라고 외치는 대목까지, 나의 어린 시절의 첫 추억 가운데 하나다. 이것은 세계와 처음 만나는 시간이었다. 그때 나는 네 살이었다.
인간에게 회상은 소중하다. 따라서 회상이 항상 시적인 색채로 장식되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가장 아름다운 회상은 어린 시절의 회상이다. 사실, 기억은 과거의 예술적 재구성에서 토대가 되기 전에 일정한 손질이 필요하다. 여기서는 특별한 감정적 분위기를 잃지 않도록 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러한 분위기가 없다면, 자연주의식으로 자세하게 재구성되는 회상은 모두 쓰라린 환멸감만 불러일으킬 것이다. 당신이 태어난 집이지만, 이미 오랫동안 보지 못한 집을 상상하는 것과 시간의 거대한 간극을 통해 이 집을 직접적으로 관조하는 것 사이에서 나오는 차이가 매우 크기 때문이다. 보통 회상의 시적 특성은 회상의 구체적인 원천과 충돌하게 되면 깨지기 마련이다. 나는 바로 이런 기억의 특성으로부터 발전해 나오는 어떤 독특한 원리 위에서 최고로 흥미로운 영화가 탄생할 수 있다고 확신한다. 행위와 사건의 논리, 주인공의 행동 논리는 외적으로 깨지게 된다. 이것은 그의 회상과 몽상에 관한 이야기가 된다. 그렇게 되면, 심지어 주인공 자신을 보여주지 않고도, 더 확실하게 말하자면, 전통적인 연출로 만들어진 영화에서 흔히 그런 것처럼 주인공을 보여주지 않고도 커다란 의미를 표현할 수 있고 독특한 성격을 묘사할 수 있으며 주인공의 내면세계를 드러내 보일 수 있다. 이러한 방법은 문학과 시에서 주인공의 서정적 이미지를 구현하는 것과 일치한다. 주인공 자신은 부재하지만, 그가 무엇을 어떻게 생각하는지가 그에 관한 분명하고 확실한 관념을 만들어낸다.
Андрей Арсеньевич Тарковский (Andrey Arsenyevich Tarkovsky, 1986): 영화에서 나를 굉장히 매료시키는 것은 바로 시적 연결, 시의 논리이다. 내가 볼 때 시의 논리는 예술 중에서 가장 진실하고 시적인 예술인 영화의 가능성에 더 잘 부합한다.
직선적이고 논리적으로 연속적인 플롯 전개로 이미지를 연결하는 전통적인 드라마보다는 시의 논리가 어떤 경우에도 내게 더 가깝다. 사건들 사이에서 이처럼 지독히도 '올바른' 관계는 대개 독단적인 계산과 사변적이고 사색적인 판단의 강한 영향 아래 탄생한다. 그러나 심지어 이런 것이 없을 때조차도, 인물들이 플롯을 지배할 때조차도 연결의 논리는 삶의 복잡성을 단순화하는 데서 나오는 것으로 드러난다.
하지만 영화 재료를 통합해주는 또 다른 방법이 존재한다. 이 방법에서 중요한 것은 인간 사유의 논리를 밝히는 것이다. 사건들의 시퀀스와 사건들을 하나의 전체로 만들어주는 편집은 바로 이 사유의 논리에 따라 좌우된다.
사유의 탄생과 발전은 특별한 법칙을 따른다. 사유의 표현은 논리적 · 사변적 구성과 다른 형식을 요구한다. 내가 볼 때 시적 논리는 전통적 드라마의 논리보다 사유의 발전 법칙에 더 가깝다. 다시 말해 삶 자체에 더 가깝다. 한편, 고전 드라마의 기법들은 오랫동안 극적 갈등의 표현 형식을 규정해온 유일한 모법으로 간주된다.
시적 연결 형식이 감정을 크게 고양시키면 관객이 적극적으로 반응하게 된다. 관객은 플롯에서 미리 도출된 결론이나 작가의 경직된 지시에 의존하지 않은 채 삶을 발견하는 과정에 참여하게 된다. 관객에게 자유롭게 허락되는 것은 오직 묘사되는 현상들의 심층적 의미를 파고들게 도와주는 것뿐이다. 복잡한 생각과 세계의 시적 비전은 지나치게 명명백백한 것의 틀 안에 끼워져서는 안 된다. 직접적으로 평범한 시퀀스들의 논리는 미심쩍게도 기하학적 원리의 증명을 연상시킨다. 예술에서 이런 방법은 감정적이고 이상적인 평가를 결합해주는 연상적 연결이 열어주는 기회보다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빈약하다. 그래서 영화가 그런 기회를 극히 드물게 사용한다는 것은 매우 유감이다. 하지만 그런 길을 택하는 것이 더 낫다. 이미지가 창조돼 나오는 재료를 '폭발하게' 해주는 내적인 힘이 그 안에 있기 때문이다.
어떤 대상에 관해 모든 것이 말해지지 않는다면, 여전히 더 생각해볼 가능성이 남아 있다. 그렇지 않다면 결론은 관객이 어떤 생각도 하지 못하는 사이에 만들어져 나온다. 이때 결론은 관객에게 아무런 수고도 없이 제공되기 때문에 관객에게는 그런 결론이 필요하지 않다. 관객이 이미지의 탄생 과정에서 겪는 고뇌와 기쁨을 작가 자신과 함께 나눠 갖지 못한다면, 작가는 관객에게 과연 무엇을 말할 수 있을까?
이런 창작 방식에는 또 다른 장점이 있다. 예술가가 관객에게 부분들을 하나의 전체로 다시 쌓아 올려서 글자 그대로 말해진 것보다 더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하는 길이 영화를 인식하는 과정에서 관객과 예술가를 같은 선상에 올려놓는 유일한 길이다. 게다가 상호 존중의 관점에서 볼 때 이런 관계는 예술적으로 실현할 가치가 있다.
여기서 내가 말하는 시는 문학 장르의 하나가 아니다. 시는 세계에 대한 인식이자 현실을 보는 특별한 성격의 태도이다.
국립영화학교(VGIK) 학생 시절 두 번째 습작, 예비 졸업작품. 1959년 5월 9일 승전 기념일에 텔레비전으로 방영되었다. 원본은 유실되고 영상은 그 녹화본인 듯.
2021-09-11 흙의 밤 @내 방
강박적이지 않다고 할 수 없는 선택이었는데, 명백한 프로파간다이지만 깊은 위로를 받았다. 내 책임이 아닌 것들에 책임을 지기 위해 애쓰거나 떠맡곤 했던 일들, 본래적으로 그리고 결과적으로 내 책임인 나의 일에 관한 권한이 실제로는 나에게 있지 않아 책임을 지고 싶어도 그러지 못하는 상황들로 점철된 인생이 과거 완료 현재 진행 중. instruction 자체의 문제와 파생되는 문제들. 그저 와이트헤드의 신이 나에게도 있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살 뿐. 조건적 무비판의 조건이 성립하는 가능 조건들에 대한 질문. 그래서 나는 19세기의 사람.
+
실화를 바탕으로 의뢰에 의해 지원금으로 제작된 선전물이었지만, 병원 장면과 전직 기관총사 민간인 인물을 타르코프스키가 굳이 넣었다고 한다. 이 얼마나 결정적인가. 이래서 모르고 보았더니만. 그리고 묘사의 디테일들. 화면상에서는 디테일에 불과하지만 던지는 질문들을 또렷이 들을 수 있다. (그것들은 '자유 시대'의 네덜란드인 Paul Verhoeven에게서는 대놓고 주요하게 다루어진다. 질문을 미리 만들어서 던지지 않고 관객 스스로 문장으로 만들도록 하니 감상만 하려고 영화를 보면 안 보이지만. 나에게는 가장 좋은 철학 선생님.)
Андрей Арсеньевич Тарковский (Andrey Arsenyevich Tarkovsky, 1986): 우리 시대가 저물어가고 있다. 더 '정의롭고' 합리적인 사회 조직을 목표로 사회 개조 사상을 추진한 지도자들과 '탁월한 인물들', '대심문관들'이 정점에 섰던 역사 단계 전체도 막을 내리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들은 대중에게 새로운 이념적 · 사회적 사상을 강제하고, 국민 다수의 행복을 위해 생활 조직 형식을 개조하라고 촉구하면서 대중의 의식을 지배하려고 했다. 도스토옙스키는 다른 사람들의 행복을 위해 자신들이 책임을 지겠다고 나서는 '대심문관들'에 대해 이미 경고한 바 있다. 우리는 특정 계급이나 특정 집단의 이익을 소리 높여 주장하고 더 나아가 인류의 이익과 '보편적 선'에 대한 주문을 읊조리듯 기원했던 사람들이 어떻게 사회에서 치명적으로 소외된 개인의 권리를 파렴치하게 짓밟았는지 보았다. 어떻게 '역사적 필연성'에서 '객관적', '과학적' 근거를 찾으면서, 존재론적 차원에서는 주관적으로 의식하는 오류를 범하기 시작했는지 보았다.
사실 문명사 전체에 걸쳐, 역사 과정이란 세계 구원과 인간 조건의 개선을 위해 공상가와 정치인들의 머릿속에서 무르익은 더 '확실하고' '올바른' 길을 사람들에게 매번 제시하면서 형성됐다. 이런 재건 과정에 참여하려면 '소수자들'은 매번 자신만의 사고방식을 포기하고 자신의 노력을 외부로 돌려 제안된 행동 계획에 맞춰야만 했다. '진보'를 위한 역동적인 대외 행동의 조건 속에서 인간은 미래와 인류를 구원하면서 자신에게 고유한 것과 개인적인 것, 현재적인 것을 망각했고 공동의 노력에 사로잡힌 채 자신의 고유한 정신적 특성의 의미를 저버렸다. 이런 과정을 거친 결과 개인과 사회에 더욱더 절망적인 갈등 상황이 형성됐다. 예수 그리스도가 "너 자신처럼 네 이웃을 사랑하라"고 말한 의미대로, 자기 자신의 이익을 생각하지 않고 다른 모든 사람의 이익을 걱정해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사실 예수의 말은 당신 안에서 초개인적인 것을 존중할 수 있을 만큼, 다시 말해 당신이 개인적이고 탐욕스럽고 이기적인 관심사에 빠지지 않게 해주고, 당신 자신을 타인에게 내주고, 의심도 판단도 없이 타인을 사랑하게 하는 신적인 원리를 존중할 수 있을 만큼 당신 자신을 사랑하라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서는 진정한 자기 존엄이 필요하다. 다시 말해 세속 생활의 중심이 되는 나의 '자아'가 객관적 가치와 의미를 소유하고 일정한 정신 수준을 달성하고, 무엇보다도 이기적 의도가 빠진 정신적 완성을 지향한다는 진실에 대한 의식이 필요하다. 자기 자신에 대한 관심, 자기 자신의 영혼을 위한 투쟁은 인간에게 굳건한 결행과 막대한 노력을 요구한다. 윤리적 의미에서 인간은 자기 자신의 실리적 · 이기적 관심사를 조금 더 올리는 것보다 낮추기가 훨씬 더 쉽다. 진정한 정신적 탄생에 이르려면 커다란 내면적 노력이 필요하다. 그리고 인간은 '영혼을 낚는 사람들'의 낚싯대에 쉽게 걸려든 나머지 어쩌면 공통의 고매한 과제를 위해 자신의 개인적인 길을 포기하고, 그럼으로써 어떤 목적을 위해 자신에게 주어진 삶과 자기 자신을 사실상 배신하게 된다는 것을 의식하지 못한다.
인간관계는 사람들이 자기 자신에게는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고 윤리적 노력을 기울이지도 않으면서 모든 요구를 다른 사람들에게, 인류 전체에게 전가하는 방식으로 형성됐다. 사람들은 타인에게 자신을 낮추고 희생하고 사회 건설에 참여하라고 하지만, 정작 자신은 이 과정에 절대 참여하지 않고 세계에서 일어나는 일에 대한 개인적 책임을 거부한다. 이런 과정에 참여하지도 않고, 더 보편적이고 고매하고 내적으로 의미 있는 과제들을 위한 길에서 자신의 편협하고 이기적인 관심사를 포기하지도 않는 짓을 정당화하는 구실은 수천 개가 넘는다. 자기 자신을 냉철하게 바라보고 자기 자신의 삶과 영혼에 책임을 지겠다는 결심과 의지를 보이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우리' 모두 함께, 다시 말해 인류 모두가 문명을 창조한다고 하면서 우리는 개인적 책임을 저버리고 세계에서 일어나는 일에 대한 책임을 자신도 모르게 다른 사람들에게 전가한다. 이런 뿌리 깊은 전제에서 개인과 사회의 갈등은 점점 더 절망에 빠지고, 개인과 인류 사이 소외의 벽은 날로 높아진다.
요컨대, 우리는 어느 누구의 노력도 아닌 바로 우리 '공동'의 노력으로 건설된 사회에서 살고 있는데, 여기서 개인에 대한 요구는 자기 자신에게 부여되지 않고 다른 사람들에게 부여된다. 이러한 상황에서 인간은 낯선 사상과 야심을 위한 수단이 되거나 그 자신이 지도자가 되어 어떤 개인의 권리도 고려하지 않고 다른 사람들의 에너지와 노력을 이용한다. 개인적 책임은 '공동 이익'으로 잘못 이해한 것을 위해 희생되어 사라져버린 것 같았다. 인간은 '공동 이익'에 봉사한답시고 자기 자신에 대한 책임을 방기하는 권리를 획득했다.
우리가 우리 자신의 문제를 누군가에게 전가한 순간부터 물질적 과정과 정신적 과정 사이에 가로놓인 심연이 계속해서 깊어지고 있다. 우리는 다른 사람들이 우리를 위해 마련해준 사상들의 세계에 살면서 이 사상들의 표준에 따라 발전하거나 그로부터 절망적으로 점점 소외되고 그에 대립한다.
Андрей Арсеньевич Тарковский (Andrey Arsenyevich Tarkovsky, 1986): 이런 질문에 답하기 전에, 모든 소설을 영화로 각색할 수 없다는 것부터 말하고 싶다. 요소의 통일성, 문학 이미지의 정확성과 독특함, 형언할 수 없을 정도로 깊이 있는 인물들, 마법적인 구성과 함께 감동적이고 독보적인 작가의 성격이 페이지 사이에서 분명하게 드러나 책 전체에 영향을 주는 능력이 빛나는 작품들이 존재한다. 그러나 오직 영화와 산문 예술을 공평하게 대하는 사람에게만 그런 명작 중 하나를 각색하고 싶다는 의지가 나올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