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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turday, July 11, 2026

Poulenc (1958) La voix humaine

Les Six 1 - Poulenc's Opera 'La voix humaine (인간의 목소리)' 
이한나 Dr. Hanna Lee (Soprano) / 김연화 Yeun Hwa Kim (Choreographer/Dancer) /
 정소라 Sora Jung (Piano) / 조은비 Eunbi Cho (Director) 
이홍범 (조연출/자막) / 경은주 (무대 디자인)
The House Concert 2026 𝐉𝐔𝐋𝐘 𝐅𝐄𝐒𝐓𝐈𝐕𝐀𝐋 "프랑스의 빛" 
2026. 7. 3. Fri. 8pm 서울 예술가의집


[00:22] 𝗙𝗿𝗮𝗻𝗰𝗶𝘀 𝗣𝗼𝘂𝗹𝗲𝗻𝗰 (𝟭𝟴𝟵𝟵-𝟭𝟵𝟲𝟯): La voix humaine (인간의 목소리), FP 171 (1958) 

    on: Jean Cocteau (1930) La Voix humaine  인간의 목소리 <-- 😮😱💘 


💖💖💖💖💖 마침 Lyotard와 딱맞춤!  😍 

중2 때 장 콕토 얼마나 사랑했는데. 💘

Sunday, September 12, 2021

Tarkovsky & Gordon (1958) There Will Be No Leave Today

Александром Гордоном и Андреем Тарковским (Aleksandr Gordon & Andrei Tarkovsky, 1958) Сегодня увольнения не будет… (Segodnya uvol'neniya ne budet…) 
There Will Be No Leave Today 오늘 해고는 없다 (영어 자막)
based on Арка́дий Я́ковлевич Сахни́н (Arkadiy Yakovlevich Sakhnin, 1958) 
Эхо войны. М. (Ekho voyny. M.) The Echo of War


국립영화학교(VGIK) 학생 시절 두 번째 습작, 예비 졸업작품. 1959년 5월 9일 승전 기념일에 텔레비전으로 방영되었다. 원본은 유실되고 영상은 그 녹화본인 듯. 


2021-09-11 흙의 밤 @내 방

강박적이지 않다고 할 수 없는 선택이었는데, 명백한 프로파간다이지만 깊은 위로를 받았다. 내 책임이 아닌 것들에 책임을 지기 위해 애쓰거나 떠맡곤 했던 일들, 본래적으로 그리고 결과적으로 내 책임인 나의 일에 관한 권한이 실제로는 나에게 있지 않아 책임을 지고 싶어도 그러지 못하는 상황들로 점철된 인생이 과거 완료 현재 진행 중. instruction 자체의 문제와 파생되는 문제들. 그저 와이트헤드의 신이 나에게도 있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살 뿐. 조건적 무비판의 조건이 성립하는 가능 조건들에 대한 질문. 그래서 나는 19세기의 사람. 

+

실화를 바탕으로 의뢰에 의해 지원금으로 제작된 선전물이었지만, 병원 장면과 전직 기관총사 민간인 인물을 타르코프스키가 굳이 넣었다고 한다. 이 얼마나 결정적인가. 이래서 모르고 보았더니만. 그리고 묘사의 디테일들. 화면상에서는 디테일에 불과하지만 던지는 질문들을 또렷이 들을 수 있다. (그것들은 '자유 시대'의 네덜란드인 Paul Verhoeven에게서는 대놓고 주요하게 다루어진다. 질문을 미리 만들어서 던지지 않고 관객 스스로 문장으로 만들도록 하니 감상만 하려고 영화를 보면 안 보이지만. 나에게는 가장 좋은 철학 선생님.)    


Андрей Арсеньевич Тарковский (Andrey Arsenyevich Tarkovsky, 1986): 우리 시대가 저물어가고 있다. 더 '정의롭고' 합리적인 사회 조직을 목표로 사회 개조 사상을 추진한 지도자들과 '탁월한 인물들', '대심문관들'이 정점에 섰던 역사 단계 전체도 막을 내리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들은 대중에게 새로운 이념적 · 사회적 사상을 강제하고, 국민 다수의 행복을 위해 생활 조직 형식을 개조하라고 촉구하면서 대중의 의식을 지배하려고 했다. 도스토옙스키는 다른 사람들의 행복을 위해 자신들이 책임을 지겠다고 나서는 '대심문관들'에 대해 이미 경고한 바 있다. 우리는 특정 계급이나 특정 집단의 이익을 소리 높여 주장하고 더 나아가 인류의 이익과 '보편적 선'에 대한 주문을 읊조리듯 기원했던 사람들이 어떻게 사회에서 치명적으로 소외된 개인의 권리를 파렴치하게 짓밟았는지 보았다. 어떻게 '역사적 필연성'에서 '객관적', '과학적' 근거를 찾으면서, 존재론적 차원에서는 주관적으로 의식하는 오류를 범하기 시작했는지 보았다. 

사실 문명사 전체에 걸쳐, 역사 과정이란 세계 구원과 인간 조건의 개선을 위해 공상가와 정치인들의 머릿속에서 무르익은 더 '확실하고' '올바른' 길을 사람들에게 매번 제시하면서 형성됐다. 이런 재건 과정에 참여하려면 '소수자들'은 매번 자신만의 사고방식을 포기하고 자신의 노력을 외부로 돌려 제안된 행동 계획에 맞춰야만 했다. '진보'를 위한 역동적인 대외 행동의 조건 속에서 인간은 미래와 인류를 구원하면서 자신에게 고유한 것과 개인적인 것, 현재적인 것을 망각했고 공동의 노력에 사로잡힌 채 자신의 고유한 정신적 특성의 의미를 저버렸다. 이런 과정을 거친 결과 개인과 사회에 더욱더 절망적인 갈등 상황이 형성됐다. 예수 그리스도가 "너 자신처럼 네 이웃을 사랑하라"고 말한 의미대로, 자기 자신의 이익을 생각하지 않고 다른 모든 사람의 이익을 걱정해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사실 예수의 말은 당신 안에서 초개인적인 것을 존중할 수 있을 만큼, 다시 말해 당신이 개인적이고 탐욕스럽고 이기적인 관심사에 빠지지 않게 해주고, 당신 자신을 타인에게 내주고, 의심도 판단도 없이 타인을 사랑하게 하는 신적인 원리를 존중할 수 있을 만큼 당신 자신을 사랑하라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서는 진정한 자기 존엄이 필요하다. 다시 말해 세속 생활의 중심이 되는 나의 '자아'가 객관적 가치와 의미를 소유하고 일정한 정신 수준을 달성하고, 무엇보다도 이기적 의도가 빠진 정신적 완성을 지향한다는 진실에 대한 의식이 필요하다. 자기 자신에 대한 관심, 자기 자신의 영혼을 위한 투쟁은 인간에게 굳건한 결행과 막대한 노력을 요구한다. 윤리적 의미에서 인간은 자기 자신의 실리적 · 이기적 관심사를 조금 더 올리는 것보다 낮추기가 훨씬 더 쉽다. 진정한 정신적 탄생에 이르려면 커다란 내면적 노력이 필요하다. 그리고 인간은 '영혼을 낚는 사람들'의 낚싯대에 쉽게 걸려든 나머지 어쩌면 공통의 고매한 과제를 위해 자신의 개인적인 길을 포기하고, 그럼으로써 어떤 목적을 위해 자신에게 주어진 삶과 자기 자신을 사실상 배신하게 된다는 것을 의식하지 못한다. 

인간관계는 사람들이 자기 자신에게는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고 윤리적 노력을 기울이지도 않으면서 모든 요구를 다른 사람들에게, 인류 전체에게 전가하는 방식으로 형성됐다. 사람들은 타인에게 자신을 낮추고 희생하고 사회 건설에 참여하라고 하지만, 정작 자신은 이 과정에 절대 참여하지 않고 세계에서 일어나는 일에 대한 개인적 책임을 거부한다. 이런 과정에 참여하지도 않고, 더 보편적이고 고매하고 내적으로 의미 있는 과제들을 위한 길에서 자신의 편협하고 이기적인 관심사를 포기하지도 않는 짓을 정당화하는 구실은 수천 개가 넘는다. 자기 자신을 냉철하게 바라보고 자기 자신의 삶과 영혼에 책임을 지겠다는 결심과 의지를 보이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우리' 모두 함께, 다시 말해 인류 모두가 문명을 창조한다고 하면서 우리는 개인적 책임을 저버리고 세계에서 일어나는 일에 대한 책임을 자신도 모르게 다른 사람들에게 전가한다. 이런 뿌리 깊은 전제에서 개인과 사회의 갈등은 점점 더 절망에 빠지고, 개인과 인류 사이 소외의 벽은 날로 높아진다. 

요컨대, 우리는 어느 누구의 노력도 아닌 바로 우리 '공동'의 노력으로 건설된 사회에서 살고 있는데, 여기서 개인에 대한 요구는 자기 자신에게 부여되지 않고 다른 사람들에게 부여된다. 이러한 상황에서 인간은 낯선 사상과 야심을 위한 수단이 되거나 그 자신이 지도자가 되어 어떤 개인의 권리도 고려하지 않고 다른 사람들의 에너지와 노력을 이용한다. 개인적 책임은 '공동 이익'으로 잘못 이해한 것을 위해 희생되어 사라져버린 것 같았다. 인간은 '공동 이익'에 봉사한답시고 자기 자신에 대한 책임을 방기하는 권리를 획득했다. 

우리가 우리 자신의 문제를 누군가에게 전가한 순간부터 물질적 과정과 정신적 과정 사이에 가로놓인 심연이 계속해서 깊어지고 있다. 우리는 다른 사람들이 우리를 위해 마련해준 사상들의 세계에 살면서 이 사상들의 표준에 따라 발전하거나 그로부터 절망적으로 점점 소외되고 그에 대립한다. 

믿기 어렵고 야만적인 상황이 아닐 수 없다! 

-- 라승도 옮김(2021: 290-292) 


Sunday, August 29, 2021

Stephen Toulmin (1958) The Uses of Argument

Stephen Toulmin (1958/2003): 실질적 논변은 자료와 지지작용으로부터 결론으로 이행할 때 빈번하게 유형전환을 행한다. 다시 말하면 이는 바로 우리가 실질적 논변의 각각의 영역을 그 자체에 관련된 기준에 의해 판단해야 함을 의미한다. 인식론에서 근본적인 오류는 이런 유형의 비약을 논리적인 심연으로 취급하는 것이다. 모든 지식 주장이 분석적으로 정당화되어야 한다는 요구와 그렇게 정당화될 수 없는 모든 것들에 대한 거부는 이런 오류가 도달하는 첫 번째 유혹이다. 다음 단계는 상황을 치유하겠다는 희망을 갖고서, 선험론과 현상론을 거쳐서 회의론이나 혹은 실용주의로 이르는 지루한 열차에 몸을 싣는 것이다. 논변에 있어서 실질적인 단계가 논리적 심연을 나타낸다는 생각을 버리자. 그러면 논리학과 지식론 모두는 좀 더 생산적인 문제들을 다룰 수 있을 것이다. [362]   

-- 고현범/임건태 옮김(2006) 


최초의 지점으로 되돌아옴. 급기야 이럴 것 같은 강력한 느낌에 시달리지 않은 적이 없건만, 선험론, 현상론, 회의론, 실용주의란 네 협곡을 한두 번도 아니고 몇 번인지 세는 것도 진즉 잊고 갈팡질팡하는 것도 모자라, 상위의 입증론과 과학적 설명의 문제, 하위의별도의 측정과 계산가능성의 문제 들에 제대로 돌진했다기보다 접근가능한 자료 수색만 하면서 일 년을 보냈다고 여쭐 수는 없을 것 같은데, 이 문장으로 지난 일 년이 거의 잘 요약되는 이 사태를 어쩌람? 마치 나에 대한 조서를 보는 듯, 무척 잘 쓰였구먼.   

+

Stephen Toulmin: '인간 오성의 본성'에 관한 물음들은 많은 경우 심리학으로 가장한 논리학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논리학에서의 혼동은 너무 쉽게 지식론에 있어서의 잘못된 개념으로도 이어졌다. 이런 식으로 논점을 벗어난 경우에도 — 즉 실질적 논변들에 있어서도 — 분석성에 도달하려는 욕망은 회의론으로 이어지거나 회의론에 대한 공포 때문에 마찬가지로 과격하게 실제 행동을 중단해 버리는 것으로 이어졌다. 그런 논리학적인 시초의 혼동을 제거할 때만 인식론에 적합한 길은 회의론을 껴안거나 회피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야심을 조절하는 것이란 점이 분명해진다. 즉 어떤 분야에서건 논변과 지식론이 분석적 기준들에 따를 것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좀 더 현실적으로 해당 분야에서 적합하게 요구될 수 있는 그 어떤 종류의 설득력이나 훌륭한 근거를 갖추기를 요구하는 것이다. 

형식논리학에서 분석적 이상은 자신의 매력을 수학의 명성으로부터 빌려왔던 것 같다. 고대 아테네와 과학 혁명의 시기 모두 철학사는 수학사와 긴밀히 연관되었다. 그래서 그런 결과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명문 기하학 학교의 창립자이자 선생인 플라톤이 모든 학문의 가치 있는 이상을 기하학적 증명에서 발견했다는 사실에 놀랄 필요는 없다. 근대 물리학 발전에 막대한 영향을 미쳤던 '데카르트 기하학'의 창시자인 데카르트가 자연과학과 신학의 모든 근본적인 진리를 유사기하학적인 방법으로 세우려는 생각에 매료되었다는 사실 역시 마찬가지이다. 이런 식으로 우리는 근대미분법의 발명자인 라이프니츠가 어떻게 철학을 수학처럼 '실재적이고 증명할 수 있는' 것으로 만들려는 전망에 환호했는지를 이해할 수 있다.  

다시 말하지만 이런 것들에 놀랄 필요가 없다. 하지만 이런 사실이 우리가 그와 동일한 이상에 의해서 이끌려져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사실 우리는 그보다 그런 이상을 경계해야 하며, 어느 지점에서 그 이상의 영향이 해로운지를 재빨리 알아채야 한다. 물론 일반적으로 보아서 이런 생각이 독창적인 것은 아니다. 하지만 분석적 이상을 포기하는 것의 일련의 결과들이 명백해지려고 한다면, 모든 필연적인 논리적 구별들을 분명하고도 확고하게 명심해야만 한다. [383-384] 

우리의 인식론적 문제들의 상세한 원천에 대한 조명은 오직 좀 더 복합적이고, 영역 의존적인 논리적 범주들의 체계를 구축할 때만이 가능하다. 예를 들어 데카르트 이래로 그가 제기한 감각의 오류 가능성에 관한 문제들은 철학자들을 괴롭혔다. 특히 우리의 모든 감각 경험이 교활한 악마에 의해서 감쪽같이 조작될 수 있으며, 우리를 둘러싼 대상들의 존재와 성질에 관한 기만적인 믿음들을 계속 고수하도록 설정되었을 가능성 — 물론 논리적 가능성이지만 — 이 그러하다. 

처음 봐서는 어떤 문제도 그보다 더 우리의 자존심이나 진정한 지식 주장에 심각하게 도전하지는 못할 것 같다. 하지만 사물들이 보이는 방식으로부터 존재방식으로 진행되는 논변들이 여기서 문제를 만들어 내는 바로 그 분석적 타당성을 이상적으로 성취할 수 있다는 것은 헛된 기대에 불과하다. 데카르트가 주의를 기울인 모든 것은 '논리적 가능성'이며, 이런 '논리적 가능성'(즉 자기모순의 부재)은 사태의 필연적 특성이다. 다른 한편 우리가 실제 논변에서 요구하는 것은 그에 대한 추정들이 실질적 목적에 비추어 반박할 수 없을 만큼 강력한 결론들이다. [384-385]  

플라톤처럼 데카르트에서도 분석적 이상의 기하학적 연결들은 아주 분명하다. 실질적 논변들이 — 모든 종류의 유형의 비약에 대한 의혹을 포함해서 — '논리적 심연'을 포함하고 있다는 생각은 순수수학을 위해 만들어진 척도에 비추어서 그 논변들을 측정할 때 초래되는 자연스런 결과이다. 하지만 유형의 비약과 영역의 차이들은 우리가 안고 시작할 수밖에 없는 것이며, 우리는 절대로 그것들을 없앨 수는 없다. 다시 말하면 결론과 그것을 지탱하는 정보 사이의 유형의 전이는 심연이나 결함이 아니라, 논변의 영역에 특징적인 성질이다. 실질적 논변들에는 필연적 함축이 결여되어 있다는 것, 그것들이 분석적 기준에 따르지 않는다는 사실은 유감스럽거나 변명이 필요한 것 혹은 심판하거나 변화시켜야 할 것이 아니다. 

실용적인 견지에서 분석적인 보증들이 그러한 경우들에 요구되어지는 것은 과도하다고 말할 필요조차 없다. 정당한 이유가 작동한다는 확신이 우리가 합리적으로 요구할 수 있는 모든 것이라거나 필연적 함축을 논외로 하고 이것을 수용해야 한다는 확신도 마찬가지이다. 비록 그런 말이 (우리가 지금까지 도달한 입장과 완전히 다르다고 할 수는 없고) 겸손하게 들릴지는 모르겠지만, 이런 관점조차 오해를 유발한다. 왜냐하면 지금은 '논외로 하고'와 같은 말을 쓸 장소가 아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그 말들에는 상황이 보증하지 않는 함축된 변명이 있다. 

하나의 이미지를 떠올리면서 이 논의를 마치는 것이 유익할 것 같다. '논리적 심연'이라는 말에 간직된 경쟁적 이미지가 야기하는 효과를 무마시킬 만한 이미지 말이다. 우리에겐 그런 말처럼 혼란스런 연상을 가져오지 않는 유형 전환의 추론을 그려내는 길이 필요하다. 다양한 가능성들이 제기된다. 즉 하나의 논리 유형을 가진 정보로부터 다른 유형의 결론에로의 이행은 '심연'을 건너는 걸음이라기보다는 '수위'의 변화나, '방향'의 변화, 또는 태도의 변화로 간주될 수는 없는가? 아마도 이 마지막 비유가 가장 도움이 될 것이다. 왜냐하면 태도의 변화라는 것은 적합한 기준으로 판단할 때 시기적으로 부적절하거나, 성급하거나, 시기상조일 수 있거나 그렇지 않다면, 적절하거나, 정당하거나, 시기적절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사실 태도가 — 미세하게 구별되는 신호나 동작은 차치하고 — 명확하게 언어적인 것이 되는 지점이 있다. 그래서 두 개의 발화들 간의 논리 유형의 차이는 — 바로 이런 식으로 확장된 의미에서 — 두 유형의 의사소통적 태도 간의 차이이다. 

운전자는 전방도로에 차가 없는 것을 보고서, 뒤차에 추월신호를 보낼 수 있다. 도로가 비었다는 것을 보는 것은 이런 식으로 신호를 보내는 하나의 이유를 제공한다. 다시 말하면 전자는 후자를 정당화한다. 하지만 비록 보는 것과 신호하는 것이 별개의 것이라 해도, 보는 것과 그렇게 하는 것 간에 '심연'은 없다. 다만 차이가 존재할 뿐이다. 신호하는 것을 정당화하기 위해서 우리는 다만 전방 도로 상태를 지적하기만 하면 된다. 여기에서 우리는 시각과 행위 간의 간격을 메워줄 더 나아간 원칙들을 제공할 필요가 없다. 이제 실질적인 물음은 '신호하기 자체가 보는 것에 필적할 수 있는가, 또는 보는 것이 신호하기에 필적하는가?'가 아니라 '어떤 경우에 보는 것이 신호하기와 같은 (전적으로 구별되는) 활동을 정당화하는가?'이다. [385-387] 

-- 고현범/임건태 옮김(2006)  


툴민으로부터 배운 건 전혀 아니었지만, 그에겐 지적의 대상이었던 것이 나에겐 폭력의 두 원천으로 여겨졌고, 그의 결론이 나에겐 신조로 이미 구축되어 있었다. 구별하지 못했던 고통들도 아니었고, 인식하지 못했던 목표들도 아니었다. 일단은, 이라며 비켜 가려 했던 마음의 수법에 자꾸만 발목을 잡혔는지, 아니면, 사안의 내부 관계적 순서와 진행의 실천 절차를 달리하지 못하는 우둔함인지 모르겠네. 현실적으로 후자에 무게가... 執迷. 

전략에 허점과 기복이 있을 수 있다. 전술을 철회해야만 할 수 있다. 전투에서 패배할 수 있다. 총알에 불량품이 있을 수도 있으면 안 된다. 자기가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는 글이 있다. 그 말이 알차고 훌륭해서 이해하려고 노력할 가치가 충분하더라도. 


Wednesday, April 28, 2021

Erwin Schrödinger (1958) Mind and Matter 정신과 물질

Erwin Schrödinger (1958): 발전은 거부할 수 없는 운명에 의해 결정된다는 믿음으로 사태를 방치하지 말아야 한다. 우리가 발전을 원한다면, 발전을 위해 무언가 해야 한다. 또한 발전을 원하지 않는다면 하지 말아야 한다. 정치적 사회적 발전과 역사적 사건들 일반이 운명의 장난으로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주로 우리의 행동 때문에 발생하듯이, 더 큰 규모의 역사에 다름 아닌 우리의 생물학적 미래를 어떤 자연법칙에 의해 미리 결정된 불변의 운명으로 여겨서는 안 된다. 적어도 연극의 주인공인 우리에게는 사태가 그러할 수 없다. 설령 우리가 새와 개미를 보듯이 우리를 지켜보는 더 높은 존재에게는 그렇다 할지라도 말이다. 사람들이 좁은 의미와 넓은 의미의 역사를 예정된 것으로 여기는 경향이 있는 이유는 매우 명백하다. 그것은 모든 개인 각자가, 자신의 의견을 많은 사람들에게 전파하고 그것에 따라 행동하도록 설득할 수 없는 한, 자신에게는 거의 아무 힘도 없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 

현재 대부분의 생산 공정에서 진행 중인 기계화와 '바보화(stupidization)'는 우리의 지능 기관의 일반적 퇴보를 가져올 수 있는 심각한 위험 요소라고 나는 믿는다. 수공업의 억압과 따분하고 지루한 조립 라인 작업의 확산에 의해 영리한 노동자로서 살 기회와 무감각한 노동자로서 살 기회의 비중이 동등해질수록, 영리한 뇌와 유능한 손과 날카로운 눈은 점점 더 불필요해질 것이다. 심지어 천성적으로 따분한 노동이 더 쉽다고 느끼는 우둔한 인간이 더 선호될 것이다. 그런 인간들이 더 쉽게 성장하고 정착하여 자손을 낳을 것이다. 결과적으로 재능이나 재주와 관련해서 부정적인 선택이 일어날 가능성이 다분하다. 

[...] 다행스럽게도 우리의 현재 행복과 미래 진화는 나란히 함께 간다. 지루함은 우리의 삶에서 결핍 다음으로 나쁜 가장 심각한 독소가 되었다. 우리가 발명한 교묘한 기계들이 불필요한 사치품을 점점 더 많이 생산하도록 방치하는 대신에, 그 기계들을 인간의 바보 같고 기계적이고 '기계 같은' 노동을 대신할 수 있는 수준으로 발전시켜야 한다. 인간이라는 훌륭한 존재가 하기에 너무 하찮은 노동을 기계가 맡아야 한다. [...] 전 세계의 큰 기업들과 재벌들이 서로 경쟁하는 한, 이런 일이 실현되리라는 작은 희망을 품을 수 있다. 하지만 그런 종류의 경쟁은 흥미롭지도 않고 생물학적으로 무가치하다. 우리의 목표는 그런 경쟁 대신에 인간 개인들 간의 흥미롭고 지적인 경쟁을 회복하는 것이 되어야 한다. 

-- 전대호 옮김 (2007: 186-189) 


오퍼레이터로서 탱크의 자리를 지망하고 건너왔다. 나는 탱크와 달리 시온 출신이 아닌 매트릭스 출신이지만, 그래서 유리한 점이 있다. 설령 탱크처럼 조종간까지는 못 맡게 되더라도 그래서 백업을 해 주진 못하더라도 네오들이 쓸 총알 알고리듬 같은 건 얼마든지 만들 수 있을 것 같았으니까. 침투 루트를 좀 알고 있으니까. 그들의 설계도를 읽을 수 있으니까. 그런데 아직도 각성하지 않는 모피어스들을 보며 절망한다. 이미 늦었지만 아직 늦지 않았는데... 

네오가 매트릭스에서 낮에는 프로그래머로 밤에는 해커로 투잡을 했듯이, 전설의 해커 모피어스는 전직 고등학교 문학 담당 교사였다, 라고 처음 영화를 봤을 때부터 생각했다. 오비디우스로 박사 학위 논문을 썼나 보다고. 그가 대련 프로그램과 점프 프로그램 안에서 네오에게 무엇을 가르치는지 보면 확실하다. 얼른 네오들을 찾아서 현실을 보여 주고 좋은 알약을 고르게 하고 잘 훈련시켜서 팀에 데리고 들어가야 하는데. 어쩌면 이 모피어스들은 자신이 모피어스임을 모르는지 아니면 알고 싶지 않은 건지 모르겠다. 무엇보다 모피어스는 신념이 강해야 하는데 말이다.  


이렇게 중요한 이야기를 적는 곳이 아닌데, 고립무원이라 그런지 점점 심각해지는 것 같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