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howing posts with label criticism. Show all posts
Showing posts with label criticism. Show all posts

Tuesday, April 07, 2026

Jung, Jun Hee's Argument on Education

[정준희의 논] 제주 4.3과 윤석열 파면 1년 사이, 대한민국 교육에 대해 묻다

2026년 4월 3일 금요일


👍 학창 시절 기억이 나와 닮은 사람 두 번째.

용인 캄푸스 벚꽃 절정! 🌸🌸🌸🍃

Saturday, April 04, 2026

Jung, Jun Hee's Argument EP#105

[정준희의 논] 우리가 기억해야 할 국가 폭력의 얼굴들

2026-03-27 Fri. (P) (주)명랑사회



Sunday, January 23, 2022

phenomenology of 'white'

조정권 (1994)그의 회화는 ‘그려진’ 것이 아니라 붓질에 의해 ‘생성된’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는 지금까지 화면에 무엇을 그려넣거나 나타내 보이겠다는 전통적인 ‘그리는’ 방식에서 떠나 있다. 이 떠나 있는 지점이 그의 회화가 발생하는 정신의 지점이다. 아무것도 그려져 있지 않은 허적(虛寂)의 캔버스를 자연색으로서의 순백색으로 여러 번 묽게 마음의 감으로 칠해나가는 그의 작업은 결국 애초부터 아무것도 실려 있지 않았던 캔버스의 투명한 존재 영역 속으로 환원하는 과정을 보여주고 있다. 그 결과 아무것도 그려져 있지 않은 그의 회화가 도달하는 곳은 투명성이 아닐까. 그는 그 내용 없는 투명한 본질의 구조를 모세가 지팡이 자국으로 바닷물을 갈라 보이듯 열어 보이려 한다. [135] 

그의 백색은 마음의 근원으로의 환원을 의미한다. 그는 평면에 밀착된 백색이 물질로서 남는 것을 거부한다. 그는 정신의 흔적으로서 묽은 백색을 붓질해나가는 것이며 그 흔적을 바탕에 가라앉히기 위해 10번 또는 6번 어떤 때는 수십 번 칠해나간다. 그것은 마치 이끼 낀 바위 위로 오랜 시간 냇물이 흘러내리는 것과 같다. 많은 이 땅의 작가들이 착각하는 게 있다면 ‘현상’은 그려질 수 있다는 믿음이다. 그러나 ‘현상’이란 애초부터 그려질 수 없는 어떤 성질이 아닐까. 서구적 이성에 반하는 반성적 의미에서 동양적 정신으로 수용하는 자연의 현상은 무(無)로의 회귀이다. 생성도 결국 무에 굴복하기 위해 태어난 것이고 소멸도 역시 무로의 회귀이다. 생성도 결국 무에 봉사한다. 그는 무 한가운데 존재하는 거대한 투명성을 훔치고 싶어하는 것이 아닐까. 그 투명성에 도달하기 위한 정신의 여정이 그의 붓질 행위란 점에서 그의 흰 화면을 일단 백색의 현상학이라고 보면 어떨까. 최종 붓질이 끝날 때는 많은 시간적 작용이 지나간 후이지만 그는 처음에 그은 것과 같은 투명한 맛이 감과 맞아떨어졌다고 생각될 때 손을 놓는다. 그는 결코 덧칠을 하거나 지우거나 해서 화면을 죽이거나 살리거나 하지 않는다. 그의 손과 정신은 자연의 간섭을 최대한 끌어들이는 데 주저하지 않는다. 말하자면 붓질 속에서 우연성을 끌어들이고 자연과 의지가 만나 조화를 이루었다고 판단될 때 작업을 끝낸다. [136] 


서유럽 이론에 기댈 의도가 전혀 없더라도 '현상학' 피해 가기도 어렵긴 하지. 하지만 존재론적 특성 때문에 와이트헤드와 더 잘 맞긴 하다. 결국 저자 말대로 '선(禪)'으로 잘 통한다는 점에 동의. 하지만 동아시아 사상에만 매여 있으면 작품의 미술사적 의의와 작가의 획기적 의도를 읽을 수 없게 된다.  

시인이라서 직업 평론가들의 글과는 확실히 다르다. 시가 참 좋은데, 구도(求道)를 행한다는 고양의 자의식이 아닌 일상의 공간에서 이처럼 무위 해탈을 이루는 습속의 결과였나 보다.  


Saturday, May 08, 2021

Martin Heidegger (1957) Der Satz vom Grund 근거율

Martin Heidegger (1957): '인포메이션'은 실제로 현대인에게 가능한 한 빠르고 포괄적이며 명료하게 필요, 욕구, 그에 대한 만족의 확보를 성과 있게 전달하는 보고를 의미한다. 이에 따라 인간의 언어를 정보 도구로 여기는 생각이 점차 우위를 차지하고 있다. 왜냐하면 언어를 정보로 규정하는 것은 사고하는 기계와 거대한 계산기의 설치를 위해 충족되어야 할 근거를 가장 먼저 제공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보는 형식 속에 넣음(in-formieren), 즉 [형식 속에 넣어] 전달하는 것(benachrichtigen, 뒤쪽으로 향함)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정보는 조직하는 일을 한다. 다시 말해 정보는 설치하고 정렬한다(richten ein und aus). 전달로서 '인포메이션'은 이미 인간, 모든 대상, 부속물을 하나의 형식 안으로 들여놓는 장치(Einrichtung)이다. 이 형식은 지구 전체, 나아가 지구 밖의 것에 대한 인간의 지배를 확보하기에 충분한 것이어야 한다. 

'인포메이션'의 형태에는 모든 표상작용을 위해 송달되고 충족되어야 할 근거의 위력적인 원리가 지배하며, 현대라는 세계사적 시대(Weltepoche)를 모든 것이 원자 에너지의 송달에 매달려 있는 시대로 규정한다. 

우리는 성찰적 사유를 준비하기 위해 근대적 인간과 오늘날 인간이 모든 표상작용을 위한 위력적인 근거명제에서 표명되는 요구를 듣고 있는지에 대해 물었다. 이에 대해 우리는 '예'로 대답하고 '어떻게'를 제시하였다. 오늘날 인간은 근거명제에 점차 예속되면서 근거의 근거명제에 대해 지속적으로 귀를 기울이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예속이 들음의 유일한 방식도 아니며, 본래적인 방식도 아니라고 한다면, 우리는 다음과 같이 한 번 더 물어야 한다. 우리는 근거율의 요구를 듣는가? 그러나 지금 우리가 주목하고 있는 것은 언제 비로소 우리가 그 요구를 참으로 듣는다고 할 수 있는가에 대한 것이다. 그것은 우리에게 본래적으로 말을 건네는 것에 대해 우리가 응답할 때이다. 도대체 근거율의 요구 속에 말을 건네는 것이 있는가? 그리고 우리는 위력적인 근거명제가 말하는 곳을 향해 귀를 기울이고 있는가? 우리는 '아니오'라고 고백해야 한다. 어떤 점에서 '아니오'인가? 우리가 명백하고 결정적으로 근거율이 본래적으로 말하고 있는 것을 충분히 듣고 숙고하지 않고 있다는 점에서 그렇다. [305-307] 


우리가 '존재는 근거로서 경험된다'고 말할 때, 사태연관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이 드러난다. 여기에서 근거는 '라치오', 즉 해명(Rechenschaft)으로 제시된다. 

이에 따르면 인간은 해명을 요구하고 해명을 부여하는 생명체, 즉 이성적 동물(animal rationale)이다. 인간은 방금 언급한 규정에 따라 계산적으로 고려하는 (rechnen) 생명체이며, 이때 계산적으로 고려함은 넓은 의미에서 이해된다. 그 의미를 로마상인의 낱말인 '라치오'라는 낱말이 물려받았다. 이 의미는 그리스의 사유가 로마의 표상작용으로 옮겨지는 시기에 있었던 키케로(Cicero)에게서도 이미 등장한다. 

존재는 근거로서 경험된다. 근거는 '라치오', 해명으로 제시된다. 인간은 계산적으로 고려하는 생명체이다. 이 모든 것은 아주 상이한 변천 속에서도 서양 사유의 전체 역사를 통해 일치되는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이러한 사유는 근대적이고 유럽적인 사유로서 오늘날의 세계시대, 즉 원자시대로 세계를 옮겨놓았다. 유럽에서 일어나고 있는 이러한 단순하면서도 섬뜩한 사태연관에 직면하여 우리는 다음과 같이 묻는다. 

위에서 언급한 규정, 즉 인간이 이성적 동물이라는 규정이 인간의 본질을 다 드러내고 있는가? '존재는 근거를 뜻한다'는 말이 존재에 대해 말할 수 있는 최종적인 말인가? 그렇다고 한다면 인간의 본질, 존재에 대한 인간의 귀속성, 존재의 본질은 여전히 계속해서 놀라움을 일으킬 만큼 사유할 가치가 있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그렇다고 한다면 오로지 계산적으로 고려하는 사유의 질주와 그것의 엄청난 성과를 위해 사유할 가치가 있는 것을 포기해도 되지 않은가? 그렇지 않다면 계산적으로 고려하는 사유에 현혹되어 사유할 가치가 있는 것을 지나치는 대신에 사유가 그것에 응답할 수 있는 길을 찾으려고 우리는 애쓰고 있는가? 

물어야 할 것은 바로 이것이다. 그것은 사유가 물어야 할 세계 물음(Weltfrage)이다. 이 물음에 대한 대답에서 이 땅과 이 땅 위의 인간 현존재에서 무엇이 일어날 것인지가 결정된다. [316-318] 

-- 김재철 옮김(2020)  


프레게를 읽은 직후 [동일성과 차이]를 읽었으니 어설피 의분에 빠지지 않을 수 있었겠나. 이만큼 술술 읽히는 건 그토록 열받은 상태로 보낸 세월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부끄럽다고요. 그래도 지금 이런 촉박한 시점에 이 책을 제목만 보고 펼칠 줄 아는 능력이 생긴 게 다 그 덕이라 후횐 없다네. Danke für Ihre Hilfe!  


Secret Garden (2002) You Raise Me Up 
ft. Johnny Logan

Thursday, April 08, 2021

Arnold Schönberg (1913) Die gluckliche Hand, Op.18

Arnold Schönberg (1913) Die gluckliche Hand, Op.18 
 The Simon Joly Chorus + Philarmonia Orchestra conducted by Robert Craft
Koch International Classics, 2001

 => 대본 보기


Theodor W. Adorno (1949/1975): 해명되지 않은 것을 해명되지 않은 채 놓아둠으로써 <행복한 손>에서 나타나는 카오스적인 측면은 가상과 유희에 반대하는 입장을 보이는 쇤베르크의 지적 성실성이다. 그러나 카오스의 현실은 전체 현실이 아니다. 카오스의 현실에서는 교환사회의 법칙이 출현하며, 이 법칙에 따라 교환사회는 맹목적으로, 그리고 인간의 머리 위에서 재생산된다. 이 법칙은 다른 사람들을 제멋대로 다루는 권력의 지속적인 증가를 포함하고 있다. 세계는 가치법칙과 집중에 의해 희생당하는 사람들에게는 카오스적이다. 그러나 세계는 "그것 자체로서는" 카오스적이지 않다. 세계를 지배하는 원리가 혹독하게 짓밟는 대상인 개별 인간만이 세계가 카오스적이라고 생각할 따름이다. 개별 인간에게 세계가 카오스로 나타나게 만드는 폭력들이 종국적으로는 카오스의 재조직을 떠맡는다. 카오스는 폭력이 만들어내는 세계이기 때문이다. 카오스는 코스모스의 기능을 갖고 있으며, 질서에 앞서서 나타나는 무질서이다. 철학에서 카오스와 체계가 함께 속해 있듯이, 사회에서도 카오스와 체계가 함께 속해 있다. 표현주의적으로 나타나는 카오스의 한복판에서 구상된 가치 세계는 기세를 올리면서 떠오르는 새로운 지배의 특징들을 담지하고 있다. <행복한 손>의 그 남자는 노동자들과 마찬가지로 연인도 거의 보지 않는다. 그는 자기 자신에 대해 갖는 연민을 정신의 비밀스런 왕국으로 끌어올린다. 그는 이 왕국의 우두머리이다. 그의 강력한 힘은 음악에서, 그의 나약함은 가사에서 효과를 발휘한다. 그가 대변하고 있는 사물화 비판은 바그너의 사물화처럼 반동적이다. 그의 사물화 비판은 사회적 생산관계들을 향하고 있지 않으며, 분업을 향하고 있다. 쇤베르크에게 고유하게 나타나는 사물화 비판의 실제는 이러한 혼동으로 인해 병들어 있다. 쇤베르크는 음악에서 고도로 특화된 지식을 문학적인 시도를 통해 보완하려고 하였지만 바로 문학적인 시도에 의해 쇤베르크의 사물화 비판의 실제는 중압감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여기에서 또한 바그너적인 경향이 붕괴되고 있다. 바그너의 종합예술작품에서 예술적 생산과정의 합리적인 조직을 통해 아직도 응집되어 있고 이렇게 해서 바그너 작품의 진보적인 요소를 유지시켜 주던 것이 쇤베르크에서는 괴리되면서 산산조각이 난다. <행복한 손>의 남자는 기존의 질서에 경쟁자로 등장하면서도 기존의 질서에 충실하게 머물러 있다. 그는 다른 사람들보다 "더욱 간단하게 그렇게 할 수 있는" 것이다. 쇤베르크가 작품에서 창조한 남자는 "터키 사람들의 수급 2개를 매단 밧줄을 허리띠처럼 몸에 두르고", "칼집에서 빼든 피 묻은 칼을 손에 들고 있다." 그에게는 이 세계에서 이처럼 잘못된 일이 생기고 있지만, 그는 그럼에도 힘을 가진 사람이다. 그의 목덜미를 물어뜯고 있는 불안이라는 괴물은 그에게 복종을 강요한다. 무력한 자는 자신의 무력함과 스스로 타협을 하면서 그에게 자행된 불의를 다른 사람들에게 자행한다. 이러한 행동을 하는 그 남자는 역사적으로 이중의 의미를 갖고 있다. 무대를 "기계기술자의 작업장과 대장장이의 작업장의 중간 정도로 꾸미라는" 연출자의 지시만큼 그 남자가 갖고 있는 역사적 이의성(二義性)을 정확하게 지적해 주는 것도 없을 것이다. 새로운 즉물성의 예언자인 주인공은 — 장인(匠人)으로서 — 옛 생산방식이 갖고 있는 마력을 살려내야 한다. 쓸모없는 것을 거부하는 그의 단순한 몸동작은 왕관을 생산하는 데 도움이 된다. 그가 귀감으로 삼고 있는 지크프리트는 최소한 칼을 만들어냈다. "음악은 장식적이어서는 안 된다. 음악은 진실하여야 한다." 그러나 예술작품은 다시 오로지 예술만을 그 대상으로 삼는다. 예술작품은 자신이 사회적으로 속해 있는 현혹의 상호연관관계로부터 예술적 탈출을 감행하지 않을 수 없다. 극단적으로 소외된 절대적 예술작품은 실명 상태에 빠진 채 오로지 자기 자신에 대해서만 동어반복적으로 관계를 가질 뿐이다. 예술작품의 상징적 중심은 예술이다. 이렇게 해서 예술작품은 공허해진다. (문병호 옮김, 2012: 79-81)


카오스를 폭력으로, 질서를 이성(합리적 체계성)으로, 사회학적으로 해석한 다음 자신의 역사적 변증법을 적용하는 듯. 신기하다. 카오스를 무조로, 질서를 화음으로, 음악적으로 해석한 다음 역시 자신의 역사적 변증법을 사회학적으로가 아니라며 양식사학적으로가 아닌 예술철학적으로 적용한다. 하나의 음에도 음 전체의 상태를 내포하는 역사가 있단다. 이건 멋지다.       

그래도 프랑크푸르트 학파 쪽으로 들어갈 거 아니라서 얼마나 다행인지.  

버밍엄 쪽 아님을 알기 전부터 이미 알고 있었다. 구조주의 쪽은 확실히 아님도 지원하기 훨씬 전부터 알고 있었다. 나의 원망이 언제부터 왜 생겼기에 뒤늦게 부활했는지 모르시겠지. 꿈에 왕림하셨다. 혼비백산했다. 드물게 현실적인 꿈이었다. 아직 안 괜찮다. 현실이 더 무서운 것 같아서. 

하여튼 '행복한 손'보다는 '행운의 손'으로 옮기는 것이 더 맞을 것 같다. 

사이버네틱 아트에서 백남준을 뺄 수는 없다. 몰르와 교류했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슈투트가르트에서는 음악은 안 했나 보다. 다행이다. 


Monday, April 05, 2021

meritocracy

"노력주의로 변신한 능력주의"(김만권, 2021: 269)란 구절에 극렬히 동감하던 중 근본적인 시각차를 절감하였다.    

능력주의(meritocracy): '지능(I.Q) + 노력(effort) = 능력(merit)'이라는 등식 아래, '개인이 지닌 능력' 외에는 그 어떤 것도 개인의 성취를 좌우하는 요소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발상 (Michael Young, 1958

이라는데, 공식의 "지능" 항이 출생이라는 운에 달려 있다는 것. 정의상의 "IQ"가 유전에 의해 결정된다는 주장을 인지 심리학이 보증하고 있음을 알지만, 존중하여 "선천적 재능"으로 말을 바꾼다면 무슨 딴지인지 전달될까? 

김만권(2021: 273): 사랑하는 이들에게 능력이란 덕목을 요구하는 대신, 보호라는 제도의 우산을 씌워 주세요. 

또한 같은 내용이라도 이렇게 표현이 다르면 의미도 다르게 느껴지니 맘에 걸리는 데가 있다. 다양한 것들을 일렬의 순서로 세울 수 없기 때문에 하나의 공통의 것(그것이 공정한 복지이든 평등한 권리이든 다른 무엇이든)의 기준이 될 수 없고, 이것은 불평등이나 민주주의와 앞서거니 뒤서거니 야기하는지 침해하는지를 따질 계제 이전에 기본적으로 인권 자체의 문제이다. 결과적으로 인간 존엄의 문제가 될 수밖에 없는 과정을 분석할 사회학이나 성찰할 철학의 대상이라기보다는. 

그러니까, 질적인 것을 서열화할 수 있다는 발상을 전제로 한 모든 다방면의 시도 자체에 생리적으로, 거의 천성적으로, 전폭적으로, 과민하게 반발하는 성질을 가지고서 AM을 비판이 아닌 설명을 어떻게 하겠느냐고요... 그런 이유로 유치원도 다니기 힘들었는데. 친절했던 교사가 우리들을 하나, 둘, 셋... 세는 걸 보고 충격 받았던 순간이 지금도 생생하다. 왜냐하면, 그런 내가 얼마나 이상한 건지 아니면 설마 아닌지 어른이 되면 알겠거니 해서 그때까지 이 사태를 잊지 말자고 다짐했었기 때문에. 학습지에 네 개의 사과와 세 개의 귤 그림 옆에 4+3=7이라고 써야 한다는 것은 알겠는데, 7까지 가기 전에 4부터 문제였다. 아니, 맨 왼쪽 사과와 두 번째 사과가 왜 같다는 것인지 끔찍스러워서 오랜 세월 고민이었다. 사과와 귤 들한테 너무 미안하고 슬펐다. 숙제를 안 할 수는 없고, 아쉬운 대로 서로 다른 색깔 색연필로 칠해 줬다. 아래로 비슷한 문제가 여러 개인데 색연필 개수가 열두 개밖에 안 되어서 애가 탔다. 최대한 다른 색으로 칠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궁리했다. 그렇게 하고 싶었던 것이 아니라 그렇게 해야만 한다고 느꼈다. 그래서 검은색 사과와 보라색 귤이 생겼다. 그것이 조합론의 문제인 줄은 십 년도 넘게 지나서야 배웠지만.    

나 참 살기 힘들었구나. 확실히 지금이 더 편한 것 같지?  

어쨌든 모든 인간은 서로 다른 면에서 탁월하다. 덧붙여 한 사람이 탁월한 분야는 늘 둘 이상이다. 물론 능력보다 성공이 더 운에 좌우된다. 상황이 바뀌면 강점이 약점 되고 약점이 강점 된다. 어쩔 텐가? 복지가 아니라도 공정성이 아니라도 민주주의가 아니라도 사랑이 아니라도 예의가 아니라도, 신자유주의라도, 다른 어떤 경우라도 일렬로 세우면 안 된다. 사람한테. 

  

Friday, January 29, 2021

postModernism

노선을 정할 수준도 못 되고, 지금 그럴 필요가 꼭 있어야만 하는지 의심스럽기도 하지만, 이 세계에 어떤 갈래들이 이미 있는지는 알아 두고 싶다. 나에게는 과거의 개인적인 고민들을 하나씩 해결하려는 희망과 미완성의 지도를 채워 나가려는 내적 동기 말고 남아 있는 것이 이제 없기 때문이다. 자기모순을 감내할 수 있는 여력을 가지고 있지 못하다. 그만큼 절박하다. 그런데 이것은 한국에서 공부한 사람은 몰라야만 어떤 것들을 유지할 수 있는 어떤 것들 중 하나인 것 같다. 그런데 독일 학위자가 그것을 출판될 책에서 보란 듯이 꺼내 놓았다. 

 

이순예(2015): 그런데 이 '몸짓'으로서의 포스트모더니즘은 자기 토대를 망각한 운동이었다. 자유를 보편이념으로 추대할 수 있게 해준 토대가 다름 아닌 산업혁명을 촉발하고 성공시킨 과학주의였다는 사실을 간과하고 그 과학적 해명방식을 못마땅해 하면서 자유자재로 해명하고 싶어 했던 것이다. 더 풍요로운 세상을 위해서라는 깃발도 내걸었다. 누구에게나 모든 것이 가능한 세상이 되었으므로 세상을 '제대로' 해명하겠다는 의도를 가지고 계몽에 임하는 자는 타인의 가능성을 제한하는 사람으로 치부되었다. 사안에 맞는 해석을 하겠다는 노력은 해석의 중심을 계속 거머쥐려는 권력의 속성으로 분류되었다. 모든 것이 가능하므로 더 큰 가능성을 위해 모든 제한이 철폐되어야 한다는 주장(anything goes)은 실제로 결실을 거두었다. 자본이 모든 경계를 넘어서 자신의 논리를 관철하는 신자유주의 세상이 도래한 것이다. (p. 31)


이 분은 그 어떤 것들 중 하나를 터트릴 셈이셨던 걸까? 그 어떤 것들 중 하나보다 그 셈이 잠시 더 궁금해졌다. 지금의 내가 밑줄 쳐야 했던 부분은 이 다음부터였지만, 파생한 상황들이 아닌 핵심적인 사실로부터 모두의 현실을 연결짓기로 이만큼 깊이 찌른 것을 처음 보았다. 

자신이 규약주의의 정합론에 근거한 경기에 임하고 있음을 모르는 과학자/공학자/기술자는 20세기 이후로 없다. (없는 것이 정상인데, 가끔 있는 것 같기는 하다. 문제는 그 소수의 예외 경우 중 대중에게 말을 하는 비율이 높다는 것이다.) 이곳에서는 규칙에 따라 당락과 점수가 매겨진다. 그 규칙에는 종류들과 변종들이 있고, 세칙과 예외규칙 들로 이루어진 위계가 공개되고 끊임없이 개정된다. 모든 참가자는 개정안을 낼 수 있다. 그래서 자신의 전공을 벗어나 무언가를 이해하고자 할 때에도 또한 규칙을 먼저 묻게 된다. 내용이나 심지어 권한보다 방식이 절차상으로도 우선될 수밖에 없다. 풍부함 또는 열린 문들, 그리고 모호함이란 탈을 쓴 직무유기의 게으름 또는 접근금지 푯말로 위협하는 폐쇄구역 지정권의 남발 사이에 무슨 은밀한 연락망이나마 있다는 듯한 뉘앙스를 받아 주기 어렵다. 언어의 문제로 치부해 줄 수 없는 꿍꿍이가 있는 것으로 느껴진다. 그곳에서는 질문을 듣지 않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대답을 기다리지도 않는다. 자리는 이미 꽉 차 있고, 해가 지지 않는다. 일종의 유토피아는 실제로는 볼 때마다 공포스럽다. 나는 들어가지 못하는 곳이지만, 들어가고 싶지도 않다.  


Wednesday, May 30, 2018

Stefan Kempas (2010) Schwarz wie Milch


Stefan Kempas (2010) Schwarz wie Milch
- Konzeption und Realisation eines Kurzfilmes zum Thema: Beeinflussung durch Medien

http://schwarzwiemilch.d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