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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nday, July 11, 2022

french phenomenology

Herbert Spiegelberg (1960/1982): 실존주의 사상의 조류가 현상학의 대의를 위해서 무엇을 했는가? 실존주의가 현상학에서 다루는 현상들의 범위에다 하나의 주제 혹은 여러 주제들을 보탠 것 이상의 아무것도 아니라면 그것은 환영받을 수 있었다. 더구나 몇몇의 실존적인 주제들은 확실히 그 자체로도 충분히 의미있는 것들이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이런 주제들은 '실존'에 빠져 있는 현상학의 일방적인 치우침에 대해 염려를 불러일으킬 만큼 '비실존적인' 현상들을 희생시키면서 강조되었다. 그리하여 실존주의의 주목할 만한 성공은 다소 의심스러운 명성과 함께 현상학에 대한 보다 심각한 위험을 수반했다. 그것은 특히 철학에 보다 큰 학적인 엄밀성을 주려는 후설 현상학의 기본 목표를 방해했다. 왜냐하면 너무도 많은 현상학적 실존주의자들의 저작물들이 학의 역사적인 예증화에 대해서뿐만 아니라 학의 이념에 대해 다소 공개적인 적대감을 드러내보이기 때문이다. 때때로 메를로-뽕띠의 경우에서와 같이 이러한 반과학적인 진술들은 실제로 오류로 이끌어가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 진실들은 단지 학에 대한 객관주의적인 해석 혹은 기계주의적인 해석만을 겨냥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 결과는 늘 보듯이 알 수 없고, 모호하고 신비화시키는 분위기만이 남았을 뿐이다. 또 한편으로 현상학적인 실존주의자들은 자주 현상학의 원래 기풍인 끈기있는 탐구의 정신과는 거리가 먼 예언자적인 각성자의 역할을 취하고 있다. [26] 

보다 더 정확히 말하여 기술의 임무는 종종 다소 가볍고 피상적인 것으로 받아들여진다. 의미있는 현상에 대해 전 범위에 걸쳐 추적하는 충분한 주의를 쏟지 않는다. 이러한 불충분한 주의마저 포괄적이고, 그리고 위험한 일반화의 기초로서 너무나 급속히 선택된 몇몇의 현상들에 대해서 자주 전혀 다른 조명을 던지곤 하였다. 여기서 현상의 여러 가능한 대안적인 의미들을 거의 고려하지 않는 해석학적인 해석이 즉시 도입된다. 이러한 해석은 자주 야심적인 존재론적, 그리고 형이상학적 구조들과 연결되어 있다. 실존적인 현상들로부터 존재 일반의 해석에로의 전이가 쉽게 이루어져 보다 비판적인 독자들을 자주 숨차게 만든다. [26-27]  

-- 최경호 옮김(1992) 


Pro! 보편주의적 객관성, 인과, 기계론을 '과학'과 동일시하는 오류는 french theories가 공유하는 착각이다. 그런 '과학'이라면 이미 케플러도 갈릴레오도 있을 수가 없었다. 그런 '과학'을 깨기 시작한 것이 바로 근대 과학(오늘날 우리가 과학이라고 부르는 것)이었으니까. 자력과 중력의 발견이 대표적이다.(연역적 이성에 반하는 연금술적 신비주의 전통의 경험주의 또는 기술자의 생업.) 프랑스의 실증주의가 베이컨의 스키엔티아, 즉 귀납적 지식과 콩트에 뿌리를 두고 있기 때문인 것으로도 보인다. 맥락과 인식 상황에 의한 구속을 전제로 하는 현대 수학과 현대 물리학의 성립 이후로 개진된 '현대' 사상들에서 이러한 외면/무지가 나타나는 것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지 늘 당황스럽다. 과연 이해할 필요가 있는지 의심스럽다. 구세대인 나도 전자기력을 이미 초등 교과과정에서 배웠고, 현대 물리학에 대한 교양적 소개 또한 이제 고등 교과과정에 들어 있다. 인과와 기계론에 따랐다면 내가 '공학' 석사 논문을 쓸 수가 없었다. 온라인을 벗어난 시스템 (개발은 물론) 설계부터가 불가능하니까. 모든 과학들은 이미 인간적인 한계에 의한 것이다. 그것이 근대의 각성이었다. 그 한계들을 일반론적으로 명시하는 것이 모든 과학적 이론의 출발이며, 구체적으로 규정할 수 있게 되는 것이 기술의 학술적 도전이 성공한 경우의 결과이다. 존재하지 않는 대립 구도에 의한 공격을 방어할 가치가 있다고 여기는 학자는 없는 것으로 보이므로 다행히 고민할 거리가 남아 있지는 않지만. 다만 양쪽에서 아무런 실질적 대화가 이루어지지 않으니 지켜보기 답답할 뿐. 반과학주의에서의 '과학'이 실제/역사적 과학인 적이 있기나 한가 싶다. 차라리 그것의 내용은 퓌타고라스교나 데카르트주의가 아닌가? 새삼스레 비교조주의 정도인 것이 아닌가? 20세기에 살았으면서 왜 20세기를 살지 않았는지 의아하다. 히로시마와 나가사키는 멀어서 그랬다 쳐도 뉘른베르크에서는 그럼 뭐였는지? 그래서 자꾸 'post'를 붙이려고 하나? 


후설에 있어서 가장 감동적인 것들 중의 하나는 생의 진실로 생생하고 절박한 문제들, 혹은 그 자신이 궁극적으로 '실존'이라고 부른 것에 아직 도달할 수 없다는 대가를 치로고서라도 정초에 대한 헌신적이고 끈기있는 느린 작업의 필요성을 고집한 점이다. 현대의 무대 속에서 충분한 구실을 발견했다는 이유로 현상학은 너무나 자주 이러한 문제들에 충분한 준비도 없이 달려들었다. [27] 

그렇지만 다행스럽게도 초기의 현상학적인 철저함의 정신이 아직 죽지 않았다는, 그리하여 프랑스 현상학이 그 개척자들에 의해 얻은 득점을 높일 수 있는 충분한 암시가 있다. 다음에 오는 장들은 주로 그 장래성 있는 기여들을 제시하려는 시도를 의미한다. [27] 

-- 최경호 옮김(1992)  



나의 첫 논문이 내용보다 동기에 있어서는 더욱 순진한, 물론 어설픈, 현상학적인 것이었음을... 그 방법도 프랑스 쪽에서. 다만 그 시도의 대상이 어떤 '개념'이었을 뿐. (사소하게는, 독일식 문헌학적 개념사가 아닌 프랑스식 계보학적 방법이라는 점과 함께.) '연구 대상의' 내용이 주류 철학적/전통 과학철학적/비주류 미학적이라는 사실은 연구 자체의 '방법'과 무관하다. 학술적 가치가 있었다고 여기지는 않지만, 무슨 의욕이 남았겠어? 따라가기 위해서라면 더 이상 해 볼 수 있다고 상상할 수 있는 일이 남아 있지 않았다. 

나는 설령 언제가 능력을 갖춘다고 하더라도 자격 조건상 현상학의 해설자가 될 수 없고, 그것을 방법으로 쓸 자유는 누구에게나 있으니까. 


Tuesday, February 01, 2022

Kant vs Husserl by Thévenaz

국역본이 완역이라면 1952년 [신학과 철학]지 원문은 달랐네. 어째 원문이 더 명확하고 체계적인 것 같아 보이나, 까막눈이니.  


Pierre Thévenaz (1966): 이 새로움을 해명하기 위해서는, 초월적 지향성에 있어서의 데카르트적 주제(명증성, 직관, 요컨대 보는 것)와 칸트적 주제(의식에서의 대상 구성, 곧 의식의 구성하거나 창조하는 활동)의 근원적인 상호결합을 이해해야 한다. 비록 후설이 특별히 환원의 일차적인 설명을 함에 있어 칸트적 언어를 사용하고 있기는 하지만(『현상학의 이념』), 우리는 여기에 속으면 안 된다. [43]

칸트처럼, 후설은 대상이 주체에 준거하는 것이고, 인식의 문제가 본질적으로 구성의 문제라고 생각한다. 이것은 (심리학적인 것이 아니라 초월적인) 의식에서 출발하여 우리가 지향적 세계의 구조, 또한 무엇보다도 그 의미의 통일성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라고 보는 입장에 속한다. 하지만 데카르트처럼 후설은 의식 안에서, 단순히 인식의 형식적 요소 및 통일성, 대상의 가능성의 조건을 보는 것이 아니라 구체적으로 주어진 것(경험적인 것이 아닌)에서, 의식(심리적이 아닌)에서 직접적으로 체험된 것을 본다. 또한 대상은 이러한 의식을 통해 구성되지 않으며, 대상은 이 의식의 봄에 그 자신을 주거나 자기 자신을 드러낸다. 여기서 우리는 데카르트적인 직관이라는 주제와 칸트적인 구성이라는 주제를 결합하는 이 스스로 줌이라는 개념 덕분에 그 모든 실재론과 관념론(심리학주의적이거나 주관주의적인)을 대담하게 넘어서게 된다. 우리는 모든 초월론, 특별히 후설이 함축하는 초월론 때문에 이러한 진전을 이룰 수 있었다. 현상학은 우리를 일종의 초월적 봄 내지는 초월적 체험으로 초대한다. 이것은 신칸트주의의 그 모든 구성주의를 뒤로 하고 나온 것으로, 명증으로의 단호한 복귀, 무엇보다도 의식이 의식 자체를 코기토 속에서 파악하게 하는 필증적 명증성으로의 복귀다. [44-45] 

-- 김동규 옮김(2011)  


난 단지 그의 언어에 속았을 뿐이었는데, 잘못 읽었다고 할 수도 없었네. 그의 모든 저작을 읽으려 하지 않았을 뿐. 다만 교수님을 폭발하시게 한 학생이 또 있었을 것 같지가 않았다. 혼자 힘으로 할 수 있는 것만 할 수밖에 다른 길이 없었다.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2011년 이래 5판 째인데... 이나마도 내 미련퉁이 같은 현실무감각 때문에 오늘 2년 만에 답을 찾게 되었네.

사실 설명은 첫 면담 때 폭포수처럼 해 주셨으나 녹음도 못 하게 하시고 도통 따라갈 수가 없었다. 무엇보다 내가 칸트와 구별을 못 했던 건 (지금도 말끔히 하는 것 같지는 않지만) 칸트를 먼저 읽어서 홀렸기 때문이 아니라 (좋아하는 건 맞지만) 서유럽 근대 과학을 주입하는 한국의 초중고를 졸업했기 때문이다. 

이제 순서대로, sense data도 qualia도 아닌 '이미 주어진 것'들 사이의 구별 그리고 희망컨대(?) 결정적으로 뒤프렌의 '아 프리오리'가 남았는데, 이런 그나마의 때늦은 행운이 또 올는지? kairos missed. 기운만 뺀다. 


+

Pierre Thévenaz (1966): 우리는 세계에서 살아가길 멈출 수 없다. 마찬가지로 세계에 대해 반성하는 일 또한 멈출 수 없다. 왜냐하면 반성은 여전히 세계를 지향하는 방식이기 때문이다. 철학은 삶에 겹쳐져 있고, 철학이 우리에게서 분리된다고 상상할 경우에도, 철학은 세계를 [이전과는] 다르게, 보다 강렬하게 살아가게 한다. 그러므로 후설에게 체험된 세계란 이성으로부터 소외당하는 것이 절대 아니다. 단지 이 이성은 너무 자주 잠재적인 것으로 머물러 있고, 나타나기 위해서는 수많은 노력과 다양한 전복을 요구받을 뿐이다. 이것이 바로 철학에 있어 무한한 과업으로 남겨진 세계의 의미와 이성의 의미에 대한 의식에 이르러야 하는 이유이다. 

-- 김동규 옮김(2011: 47)


Sunday, January 23, 2022

phenomenology of 'white'

조정권 (1994)그의 회화는 ‘그려진’ 것이 아니라 붓질에 의해 ‘생성된’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는 지금까지 화면에 무엇을 그려넣거나 나타내 보이겠다는 전통적인 ‘그리는’ 방식에서 떠나 있다. 이 떠나 있는 지점이 그의 회화가 발생하는 정신의 지점이다. 아무것도 그려져 있지 않은 허적(虛寂)의 캔버스를 자연색으로서의 순백색으로 여러 번 묽게 마음의 감으로 칠해나가는 그의 작업은 결국 애초부터 아무것도 실려 있지 않았던 캔버스의 투명한 존재 영역 속으로 환원하는 과정을 보여주고 있다. 그 결과 아무것도 그려져 있지 않은 그의 회화가 도달하는 곳은 투명성이 아닐까. 그는 그 내용 없는 투명한 본질의 구조를 모세가 지팡이 자국으로 바닷물을 갈라 보이듯 열어 보이려 한다. [135] 

그의 백색은 마음의 근원으로의 환원을 의미한다. 그는 평면에 밀착된 백색이 물질로서 남는 것을 거부한다. 그는 정신의 흔적으로서 묽은 백색을 붓질해나가는 것이며 그 흔적을 바탕에 가라앉히기 위해 10번 또는 6번 어떤 때는 수십 번 칠해나간다. 그것은 마치 이끼 낀 바위 위로 오랜 시간 냇물이 흘러내리는 것과 같다. 많은 이 땅의 작가들이 착각하는 게 있다면 ‘현상’은 그려질 수 있다는 믿음이다. 그러나 ‘현상’이란 애초부터 그려질 수 없는 어떤 성질이 아닐까. 서구적 이성에 반하는 반성적 의미에서 동양적 정신으로 수용하는 자연의 현상은 무(無)로의 회귀이다. 생성도 결국 무에 굴복하기 위해 태어난 것이고 소멸도 역시 무로의 회귀이다. 생성도 결국 무에 봉사한다. 그는 무 한가운데 존재하는 거대한 투명성을 훔치고 싶어하는 것이 아닐까. 그 투명성에 도달하기 위한 정신의 여정이 그의 붓질 행위란 점에서 그의 흰 화면을 일단 백색의 현상학이라고 보면 어떨까. 최종 붓질이 끝날 때는 많은 시간적 작용이 지나간 후이지만 그는 처음에 그은 것과 같은 투명한 맛이 감과 맞아떨어졌다고 생각될 때 손을 놓는다. 그는 결코 덧칠을 하거나 지우거나 해서 화면을 죽이거나 살리거나 하지 않는다. 그의 손과 정신은 자연의 간섭을 최대한 끌어들이는 데 주저하지 않는다. 말하자면 붓질 속에서 우연성을 끌어들이고 자연과 의지가 만나 조화를 이루었다고 판단될 때 작업을 끝낸다. [136] 


서유럽 이론에 기댈 의도가 전혀 없더라도 '현상학' 피해 가기도 어렵긴 하지. 하지만 존재론적 특성 때문에 와이트헤드와 더 잘 맞긴 하다. 결국 저자 말대로 '선(禪)'으로 잘 통한다는 점에 동의. 하지만 동아시아 사상에만 매여 있으면 작품의 미술사적 의의와 작가의 획기적 의도를 읽을 수 없게 된다.  

시인이라서 직업 평론가들의 글과는 확실히 다르다. 시가 참 좋은데, 구도(求道)를 행한다는 고양의 자의식이 아닌 일상의 공간에서 이처럼 무위 해탈을 이루는 습속의 결과였나 보다.  


Saturday, October 23, 2021

thermal physics 2001 spring

그제 도착한 교양서를 2차 접종 후 지난 번과 똑같은 증상으로 바로 보지 못하고 오늘에야 깨어나, 돌고 도는 미궁에 몇 번째인지 같은 지점으로 돌아와 무력해진 마음의 저항 때문에 퍼즐 게임이나 하며 뒤적이기만 하다가, 동아줄 같은 역자 해설을 읽게 되었다. 그런데 반갑기보다 대체 아직도 이러고 있는 형편이 감당이 안 되고, 감당이 안 되고 있는 상태가 까마득히 오래되어 익숙해져 버렸다. 습관이 무섭다고 꽤 편하다. 게다가 난 늘 플랜 B를 가지고 있다. 청소년 대상 역사소설을 쓰기로. 소재도 있다. 바로 취재를 시작하면 된다. 복잡계 과학은 내 말로 설명할 능력이 없다. 며칠 밤샌다고 될 영역도 아니고. 필요한 게 지식이 아니라 이해라서. 통계물리는 안 들었고, 열물리를 들었던 것 같은데, 기억이 날 리가 있나. 내가 공부를 안 하기도 했지만, 강의 잘 하시는 교수님들과 지독히도 시운이 안 맞았던 것도 사실이다. 좋은 인상이 아니다. 어릴 때 보던 책들과 함께 베란다 종이 상자에 들어 있는 것 같은데 마님의 허가를 받을 수가 없으므로, 그렇게 포기했다. 

시사 방송이나 틀어 놓고 가장 가까운 책장 칸에 B5 공책 바인더가 갑자기 눈에 들어와서 꺼내 보니 개나리색 캔버스 천으로 마감 처리된 디자인이 참 예뻤구나, 한 것까지 무의식 중의 일이었다. 여전히 아무것도 하기 싫었겠지. 바로 뒤에 꽂힌 빈 노트인 줄 이미 알고 있는 걸 굳이 꺼내서 먼지나 털려고 보니 "열물리학" "학번" "이름". 아, 커버일 뿐. 내용은 머나먼 종이 상자 안에 있고, 무엇보다 어느 상자인지 알 수가 없으므로, 계속 포기했다. 

내용이 있다... 이상하게 짧다. 물론 교재가 따로 있긴 했지마는. 노트에 구태여 강의 관련 사항들을 세세히 적는 습관이 있는데 없는 걸 보면, 종강도 일찍 한 것 같고. 자연계에는 이런 강의가 없는데. 부실해서 아끼지 않고 보관에서 탈락시켰던 걸까? 설마 이십 년 뒤에 인문학을 공부하게 되어 다시 필요할 수도 있을 것 같아서 이렇게 손 닿는 곳에 놓아 둔 건 아니었을 테니. 이렇게 시작한다. 


2001.3/12.달

Statistical Mechanics > Kinetic theory of Gases > Thermodynamics 

entropy S = lnW

ds = dQ/T 


1. Energy in Thermal Physics

1-1. Thermal Physics 

- Temperature 란? 

(1) is what you measure with a thermometer (operational definition 실험적 입장) 

(2) is the thing that's the same for the two objects after they've been in (ㄱ) contact (ㄴ) long enough (theoretical definition 이론적 입장)  

(ㄱ) => Thermal equilibrium (열평형 상태)

after two objects have been in contact long enough 

(ㄴ) => Relaxation time

; The time required for a system to come to thermal equilibrium 


물론 다음부터는 죄다 수식. 큰 글씨로 A4 39쪽밖에 안 되는데, 그냥 한번 손으로 옮겨 보면 술법이 나오려나? 무념무상 채색본으로. 


꿈을 해몽한 바에 따르면, 바스카는 포기하라는 것 같다. 이런 걸 왜 꿈이나 해석하고 있는지. 포기되었든 포기하였든 다시는 나를 이런 환경 속에 두지 않겠다. 성장 없는 시간은 죽음과 같다. 그래서 티탄. 


+ 노트는 다음과 같이 끝난다. 


"phenomenology" 현상학 

; He의 성질을 기술할 뿐(가정), 그 원리는(physics) 모름. 


섬뜩해! 힝- 😱 

아니, 물리학과에 이런 식인 과목이 어디 있냐고! 그래서 흥미가 없었나 보다. 화학처럼 여겨졌던 것 같다. 마지막 시험 범위가 5장 2절까지라니, 필기가 부실했던 것이 아니라 진도 자체가 반도 안 나간 것 같다. 자대 출신 노교수님의 파행? (++ 필기가 너무 충실한 탓에 확인된 교재는 올해 OUP로 출판사를 바꿔 신판이 나왔다. 잠시 열어 보니 교재는 참 잘 고르셨다. 보통의 물리학 전공 교재들과는 달리 독학도 가능할 정도로 예외적이다.)  


vision이라고 꼭 random variables을 공부할 필요는 전혀 없다. 이유도 모르고 순전히 지도교수님 명령으로 전자공학과 가서 배웠지. 유일하게 강조하셨던 과목. 하다 보니 기계공학과의 filter는 알아서 할 수밖에 없었고. 물론 나중엔 이유를 너무 잘 알게 되었으나. 그리고, 세월이 흘러 수학철학 박사님과 확률철학 세미나를 할 때 날아다녔다. 😎 그때만 해도, 참 운명처럼 느껴지네, 조금 신기하곤 했었는데. 이제, 전부 악마의 손아귀처럼 느껴진다. 😶 

열역학(란다우 이론)이 물리학의 현상학이었다! 😵


++ 이 비유는, 그동안 현상학들이 공유하는 기본 개념어 몇 가지의 기초적인 의미조차 파악하지 못해 괴롭던 나에게 처음으로 현상학이란 이름의 한 장의 이미지를 주었다. "그래서 어쩌자는 건지", "괄호치기가 뭐하자는 건지", 감이 왔다. 내용은 다 잊었어도 수업을 듣긴 들었나 보다. 펠만을 읽기 시작한 덕인지 몰라도. 문제는 이쪽으로는 과학철학 방면인데, 예술철학 쪽으로는 어떻게 되는 건지 여전히 캄캄인 걸 보면, 미학 이론들 전반에 대한 이해가 학부 물리학에도 못 미칠 만큼 아직도 부족해서가 아닐까? 😥습득까지는 못 해도 닥치는 대로 쏟아붓는다고는 했는데. 


Monday, August 02, 2021

Verständlichkeit

G.W.F. Hegel (1806): 의식은 새롭게 현상하는 형태에서 내용의 확장과 특수화가 결여되어 있음을 깨닫는다. 그러나 더 나아가 의식은 구별들이 확실히 규정되어 그것들의 확고한 관계들 속에 정돈될 수 있게끔 해주는 형식의 형성 · 발양이 이루어져 있지 않음을 알아차린다. 이러한 발양이 이루어지지 않은 학문은 보편적 이해 가능성 · 지성성(Verständlichkeit)을 결여하며, 몇몇 개인들의 비교적(esoterisches) 소유물이라는 가상을 지닌다. — 비교적 소유물인 까닭은 그러한 학문이 오로지 그의 개념이나 그의 내적인 것 속에서만 겨우 현전하기 때문이다. 몇몇 개인들의 것인 까닭은 그러한 학문의 확장되지 않은 현상이 그의 현존재를 개별적인 것으로 만들기 때문이다. 완전히 규정되어 있는 것이야말로 비로소 동시에 공교적(exoterisch)이고 개념적으로 파악 가능하며 학습되어 모든 이의 소유물이 될 수 있다. 학문의 지성적 형식은 학문에 이르는, 모두에게 제시되고 모두를 위해 똑같이 만들어진 길이며, 지성을 통해 이성적 앎에 도달하는 것은 학문에 다가서는 의식의 정당한 요구이다. 왜냐하면 지성은 사유, 즉 순수한 자아 일반이고, 지성적인 것은 이미 잘 알려진 것이자 학문과 비학문적 의식에게 공통된 것으로서, 이를 통해 비학문적 의식은 직접적으로 학문에 들어설 수 있기 때문이다. 

이제 비로소 시작되고 따라서 세부적 완벽함이나 형식의 완전함에 도달하지 못한 학문은 바로 그 점에 관해 비난에 내맡겨져 있다. 그러나 이 비난이 학문의 본질에 적중해야 한다면, 그 비난은 저 형성 · 발양의 요구를 인정하지 않고자 하는 것이 부적절한 만큼이나 부당할 것이다. 다음과 같은 대립이 학문적 교양이 현재 풀려고 애쓰고 있지만 아직 그에 관해 적절히 이해하지 못한 가장 중요한 매듭인 것으로 보인다. 한쪽은 자료의 풍부함과 지성성을 내세우며, 다른 쪽은 최소한 이 지성성을 경멸하고 직접적 이성성(Vernünftigkeit)과 신성을 내세운다. 전자가 오로지 진리의 힘에 의해서이건 또한 다른 쪽의 격정에 의해서이건 조용히 침묵하게 되고  또 사태의 근거와 관련하여 스스로 압도되었다고 느꼈을지라도, 그렇다고 해서 그 편이 저 요구들과 관련하여 만족되어 있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그 요구들은 정당하지만 충족되어 있지는 않기 때문이다. 전자의 침묵은 다만 한편으로는 승리에,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지속적으로 자극된 기대와 약속들의 뒤따르지 않는 충족의 결과이곤 하는 권태감과 무관심에 속할 뿐이다.  

내용과 관련하여 다른 쪽 사람들은 때때로 아주 쉽사리 스스로 커다란 확대를 수행한다. 그들은 자기들의 지반에로 일군의 자료들, 요컨대 이미 잘 알려진 것과 정리된 것을 끌어들이며, 특히 기이한 것들과 호기심이 갈 만한 것들을 다룸으로써 그만큼 더욱 더 그런 종류의 앎이 이미 마무리한 여타의 것을 소유하는 동시에 또한 아직 규칙을 통해 정돈되지 않은 것마저도 지배함으로써 모든 것을 절대적 이념에 종속시키는 것으로 보인다. 이리하여 절대적 이념은 모든 것에서 인식되고 확장된 학문으로 성장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 확장을 좀 더 상세히 고찰하게 되면, 그것은 하나의 동일한 것이 자기 자신을 상이하게 형태화함으로써 성립한 것으로 나타나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은 단지 상이한 자료에 외면적으로 적용되어 상의성의 지루한 가상을 획득할 뿐인 하나의 동일한 것의 몰형태적인 반복이다.

-- 이신철 옮김(2013: 29-30)


고딩 때였다, Sokal affair가. 그때 난 참 늦게 터졌다고 느꼈다. 그리고 그것이 나만의 느낌이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않았다. 나만이 아닐 우리에게라면 그가 물리학자라는 사실은 거기서 아무런 의미가 없다. 우리가 문제시하는 건 내용이 아니라 방법이니까. 정확히 말하면, 방법들에 대한 기준들 (회피). 또는 없는 것을 마치 다른 식으로 있는 척 짜고 치는 행태. 엘리트주의 교육을 채택하고 있는 나라에서 학자가 신분이 되는 특별한 폐쇄적 형편을 국력과 위세로 밀어붙이면서 벌어지는 사정들이라고, 전통에 대한 열등감에 사로잡힌 나라에서 개방적 태도와 실용적 평가로 가장한 손쉬운 편승이라고 이해해 주면서. Erwin Metzke의 주해에 따르면, 계몽주의와 그에 대립하여 나름 그를 극복한 낭만주의에 대한 헤겔의 대결이라는데, 내 수준에 솔직한 감상은, 세상에 욕을 이토록 잘하는 사람 처음 본다며 감탄스럽다. (무슨 선전포고문이 이리도 길고 힘든지... 공명의 출사표 연작이 울고 갈 판. 어차피 살인적 실내 온도에 세월아 네월아.) 전장에 나가 보기도 전에 드디어 이긴 듯이 처절히/철저히 지치게 되니 꼭 이처럼 이기게 해 줄 것 같은 기분이 드는 대장인 걸까? 수재였단 분들이 보통 헤겔 전공인 걸 보면.       

아무튼 헤겔-비트겐슈타인-포퍼라는 적어도 교양 수준에서는 상식적으로 (거리가 멀면 대립도 안 하니까) 유의미한 교점이 없어 보이는 세 사람의 각자의 문제들 중에 그것 때문에 내가 미쳐 버리겠는 문제가 유사한 형태로 공유되어 있다. 모든 고전이 담고 있는 인류 공통의 문제들 말고. 그런데 지금으로서는 별로 반갑지가 않고 더 미칠 것 같다. 고의가 아니고(벤제에겐 중요하지만 메를로퐁티마저 방법으로 쓰는 헤겔이라니 등등) 어쩌다 보니 인지하게 되었지만 더 이상 파악할 시간이 없는데, 이미 손에 있는 자료들을 두고 또 넘어가지도 못하겠고, 난 내가 누군지 점점 더 알 수 없게 되어 버렸다. 그게 유일하게 아는 거였는데.   

리뷰들에 대한 리뷰를 훈련받지 못하면 전공한 것이 아니다. 그냥 교양이지. 근대라고 부른다며. 돈 있으면 알라딘 우수 고객.  

 

Sunday, May 16, 2021

Hans Blumenberg (1957) Nachahmung der Natur. Zur Vorgeschichte der Idee des schöpferischen Menschen 자연의 모방 - 창조적 인간 이념의 전사에 대하여

Hans Blumenberg (1957): 이 무학자 illiteratus가 학계의 권위자들을 마주할 때 보인 어조의 아이러니는, 전제조건들이 같지 않음을 고려하지 않고 자기도 대화에 끼워 주도록 요구하는 데에서 나타나는 말하자면 민주적 양식은 또 다른 기반을 가지고 있다. 그 사람은 자기가 하는 것과 할 수 있는 것을 토대로 — 자기 자신을 이해하고 자신의 가치를 정당화하는데, 이 새로운 각인이 눈길을 끈다. 수행과 자의식의 결합은 역사적으로 결코 자명하지 않지만 쿠자누스의 이디오타에게서 포착될 수 있다. 더 정확히 말하면, 우리가 여기에서 몰두하는 바로 그 관점에서 포착될 수 있다. 

정신에 대한 대화의 제2장에서 "문외한"은 대화의 상대자들인 철학자와 수사학자에게 자신의 수작업이, 즉 이 직업의 종사자를 근근이 먹여 살리고 있을 뿐만 아니라 일반 직업 순위에서는 그렇게나 낮은 등급으로 매겨지는 숟가락 만들기가, 자신의 자기이해와 자기평가를 위하여 자신에게 무엇을 뜻하는지를 설명한다. 물론 이 "예술"도 모방이긴 하지만, 자연의 모방이 아니라 신 자신의 무한한 아르스 infinita ars의 모방이다. 이 아르스가 참신하고 자연발생적이고 창조적인 한에서는 그렇지만, 사실상 이 세계를 창조해 온 한에서는 그렇지 않다. "우리 정신의 이념 밖에 있는 숟가락은 표본을 안 갖고 있다." 숟가락이 곧 예술의 고품위 생산품은 아니지만, 절대적으로 새로운 무엇이고, 자연에 미리 주어져 있지 않은 하나의 형상이며, 단순한 "문외한"은 그 형상을 만들어 내는 사람이다. "왜냐하면 나는 여기서 자연의 사물로부터 그 형태를 모방하지 않기 때문이다." 숟가락, 냄비, 접시 등 "문외한"이 만드는 형태들은 순수하게 기술적인 형태들이다. 그리고 그가 이러한 정황에 대해 기뻐하는 단계에서 현대 "산업 디자인"의 기본 특징인 생산품 자체의 부각 단계에 이르는 데에는 더 이상의 도약이 필요하지 않다. 인간은 존재하는 것에서 자신의 지위를 읽어 내기 위하여 더 이상 자연을, 우주를 바라보지 않고, 오로지 인간의 아르스에 의해서 생겨난 사물세계를 바라본다. 우리의 자리에서 또 중요한 것은 이디오타가 자신의 "수행"을 특히 화가와 조각가가 완성하는 것과 대비시킨다는 점이다. 이들은 사물에서 표본을 가져오겠지만, "나는 아니"라고 이디오타는 말한다. 여기서 창조적이고 참신한 인간의 모든 파토스 그리고 모방원칙과의 결별이 예술적 인간이 아니라 기술적 인간에게서 드러난다는 것은 평가할 수 없을 만큼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이 차이점은 아마도 여기에서 처음 실증적으로 강조되고 있을 것이다. 근본적으로 증명서의 가치는 바로 이 점에 있다. 창조적인 것을 입증하려는 이후의 태도, 즉 거의 전적으로 조형예술과 시문학에 집중하는 태도를 현재에도 취한다면 말이다. 거기서 작가가 자기 자신에 대해 그리고 창조하는 자발성에 대해 말하기 시작한다는 것은 중세 말 이후부터는 예술의 출현형식에 속한다. 반면에 기술 정신의 역사에서는 역사 담지자들의 그러한 자기증명서들이 훨씬 빈약하다. [...] 그것은 무엇보다도 기술의 "할 말 없음" 현상이다. [74-76] 

[...] 우리는 쿠자누스의 이디오타를 역사적 지표로 여겨야 하지, 역사를 형성하는 에너지로 여길 필요는 없다. [80] 

-- 양태종 옮김 (2011: 69-124) 


"존재와 자연의 동일성" 문제와 "창조적 인간" 이념 사이의 관계를 "역사의 현상학"으로 탐구한 논문. 최고! 이쯤은 그냥 오지게 재밌는 부분. 밑줄이 민폐. 부분 인용은 실례. 눈부신 해석 수준에 압도된다. 순결한 오라클. 해석의 힘을 무차별로 권력욕에 할당하여 중화하는 시도가 저 아래로 보이는 재미는 덤.  

헤겔을 직접 소화한 학자와 마르크스의 필터로 헤겔을 읽은 학자들의 길이 서로 얼마나 갈리는지 보여 준다. 중고딩 때부터 어찌어찌 지금까지 지식 없이 그저 "직성"으로 느껴 왔던 생리적 거부감의 대상이 특정하게 무엇인지 오늘에야 알게 되었다. 마르크스가 아닌 줄은 독일 이데올로기와 정치경제학비판을 부분이나마 읽자마자 선입관을 깨어 주는 그 지독한 인간주의에 반했기에 첫눈에 알았다. 헤겔도 비슷하다. 최강 난이도라기에 전공자의 개인 번역본과 직강으로 살짝 구경이나 하면서야 굳이 싫달 거리도 없었다. 상호주관성에는 개념 자체보다 그 고투에 어설피 감동받기도 했으니까. 주범이 누구인지 입증해 주는 것 같은 논문을 어렵게 구했던 날의 기억도 생생하고, 명저의 느낌이 나서 답인 줄 알고 서문만 읽은 오지랖도 어언 8년 전이네. 따지면 수십 년 동안 마음 한 켠에 풀리지 않는 실뭉치 같은 걸림돌로 남아 있었는데, 그 정체가 비로소 밝혀지다니, 뜻밖의 감회다. 마치 공범들을 알지만 범행을 밝힐 수 없어 답답했던 미제 사건이 해결된 기분. 그렇다고 지금 다윈을 읽지는 좀 말자. 어차피 내가 아는 정도의 학자 중에 간단한 도식으로 정리될 수 있는 경우는 없으니까. 중요한 건, 인용은 없어도 내 눈에도 읽히는 헤겔까지 멋져 보이게 만드는 하지만 니체와 후썰 정신으로 무장한, 위대한 이 분 블루멘베르크! 


Wednesday, February 03, 2021

Wertlehre 가치론

Johannes Hessen (1959) Lehrbuch der Philosophie Band 2: Wertlehre 국역 이강조

“가치 문제의 취급은 어떤 특수한 과제를 완수해야 하기 때문”에 가치론은 철학 교과에서 독립적이고 그 자체로 완결된 것이다. “오늘날 이러한 문제를 다루고자 하는 사람은 정말 수많은 혼란된 방향과 관점에 그 자신이 대립해 있음을 알게 될 것이다. 그가 이 해당 저작에 몰두하면 할수록, 그는 더더욱 이 저작 모두가 어떤 일정한 학파의 관점에서 서술되었다는 사실을, 그럼에도 우리들에게 말하자면 상이한 여러 학파의 관점에 관해 어떤 공통의 기반을 얻고자 하는 저작이 없다는 사실을 확인하게 된다.” (p. 11)

이 엄청난 낭비라고밖에 할 수 없는 시간 소모에 마흔 넘어 의대는 우스운 서른 넘어 공대라는 미친 선택을 하게 했던 독학의 비효율이 되풀이되고 있다. 우울증은 필연이다. 도대체 백 년 동안 뭣들 하고 계신 건지 원망을 훌쩍 넘어 복수심이 맺히려고 한다. 지난 9년 동안 물들지 않으려고 날마다 노력했다. 떠나왔던 세 분 공학 교수님들의 칼같은 시선과 말씀들이 뼈에 박혀서 언제 어디서고 따라다녔기에 가능했다. 절대 물들지 말자. 그러려면 욕하지도 말고 아예 보지도 듣지도 말자. 그만큼 단단해진 좌우명이 울화병이 되었다. 

1959년의 개정판을 번역한 이 책은 현재의 철학도에게 추천할 만하지는 않다. 저자가 제시하는 철학이란 학제의 구성 체계도 학파 차이를 감안하더라도 아주 일반적인 것은 아니다. 삽질 대마왕 나조차 굳이 읽어야 하나 여러 번 망설였다. 그러나 먼저 Werkmeister (1970) 국역본에 선택의 여지가 없었고, 김영정 (2005)에서 중요한 정보를 얻을 수 있었지만 전체적으로 부족했기에 어쩔 수가 없었다. 그런데 뜻밖에 이 1판 서문(1948)이 절치부심하던 마음을 달래 주는 것이 아닌가... 필요보다는 위안을 주는구나 싶었는데...  

“가치론에 있어서 현상학적 방법은 특수한 의미가 있다. 왜냐하면 여기서는 일체가 올바른 "가치 직관"에 달려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 가치 직관을 통해서 분석적 및 종합적 사유가 활동할 수 있는 재료를 비로소 얻을 수 있다. 왜냐하면 이 사유는 직관된 것을 그것의 계기(契機)로 분석하고, 그리고 나서 필연적 정초 관계를 드러내고, 마지막으로 전체를 종합적으로 정돈하여 통일하게 되기 때문이다.” (p. 24)

다음부터가 대박인데, 아무튼 작년부터 이 겨울을 다 바쳐 Kant - Herbart - Lotze - Brentano - Meinong, Ehrenfels - Rickert, Scheler - Hartmann 이라는 계보라기보다는 연결선의 상황적 의미를 겨우 알아채게 되었다. 그동안 개별 텍스트들이 용어사전이든 고전 원전이든 핸드북이든 해설서이든 도통 읽히지가 않아 밑 빠진 독같았는데 비로소 밑을 메꿨다. 독일어 텍스트들에서 얻은 결정적인 키워드들을 소화하지 못해 Putnam에까지 길이 꼬이는 종횡무진 와중이라 정작 각각의 본론에는 "물론" 들어가지도 못했지만. 처음엔 Ehrenfels에 관한 한글 문서가 달리 없어 시작되었고, Bense와 Dufrenne의 공통 분모라 여겨져 핑계를 삼았지만, 실은 Hartmann에게 설렘을 느꼈던 것이 결정적 계기였다는. 좌우간 이 후련하지도 가벼워지지도 못하게 미칠 듯 지나버린 시간을 어쩌란... 울화가 다시 돋아난다. 이 5분이면 정리해 줄 수 있는 가닥을! 나도 이 지역 전통에 따라 절대 안 가르쳐 줘야지. 하나만 그냥 물들자. 유료로 몇 년씩 서럽게 얻은 것들 무료로 단번에 선뜻 나누며 살았는데 이제 곱게 분위기 맞춰 줄게. 


+ 다시 칸트가 갑이다. 
+ 서광사에 많은 빚을 졌지만, 신뢰는 깨졌다. 
+ 이러고 베르그손 마저 읽고 싶으면 졸업은 날아가나? 

++ 아니! 절대 물들지 않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