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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riday, February 03, 2023

Andrei Tarkovsky (1979) Stalker

Андре́й Арсе́ньевич Тарко́вский (Andrei Arsenyevich Tarkovsky, 1979) Сталкер 
Stalker  잠입자 
screenplayed by Аркадий Натанович Стругацкий (Arkady Natanovich Strugatsky) · Борис Натанович Стругацкий  (Boris Natanovich Strugatsky)
based on Братья Стругацкие (Arkady & Boris Strugatsky, 1972) Пикник на обочине (Piknik na obochine) Roadside Picnic  노변의 피크닉 
* 칸 영화제 (32회) 에큐메니컬 상 (Prix du Jury Œcuménique)





OST by Эдуа́рд Никола́евич Арте́мьев (Eduard Artemyev



Esa Luttinen (2012) Vyöhyke (Zone) 보기 링크(영어 자막)


Saturday, June 18, 2022

Albert Camus

[高省芳歌] 알베르 카뮈의 '페스트' - 2/4편
고려대학교 문과대학 2021-11



완전 우연히 업로드 직후 보게 되었고, 그 사이 서너 번은 본 것 같은데 또 새로우니 문제롤세. 이러니 훨씬 더 빠르신 평소 속도로는 잘 해야 20% 정도만 입력된다. 내가 말하는 속도가 유달리 느려서 도저히 적응이 안 된다. 마님이 희귀하게 만족하신 명강의. 심지어 인용도 하신다. 전무후무. 나도 처음 자연히 'complete edition'이라는 단어가 떠올랐다. 그리고 관계적으로는 절대 몰랐을 뻔했던 것을 조금 이해하게 되었다. 인내로 인한 소모가 심하시리라는 것.  

나의 첫 카뮈는 고2 때 아마 조금 남달리 최초의 인간이었다. 문과는 어떤지 몰라도 95%가 의대 지망인 여고 이과반에서 이러고 살았다는 것은 나의 생활이 입시 준비와는 무관한 파탄 상태였다는 방증례라 하겠다. 하지만 음전한 기질을 타고난 나에게 공부 좀 하라며 등짝을 후려칠 정도의 친구가 되기 위해서는 나에 대한 호감이 특별히 강하고 예리한 관찰력이 있어야 한다는 난관이 있었다. 물론 옛날 얘기고, 요즘은 논술 대비로 나도 완독한 게 없는 헤겔 정도는 읽어 줘야 하는 것 같았다. 난 기억력이 나쁘지만 몇 장면(에서의 나의 감정과 생각들)은 아직 생생하다. 하지만 난 그에게 특별한 문학적 재능은 없다는 사실에 많이 놀랐다. 그 정도로 유명한 작가에게서 그런 느낌을 받았던 적은 지금까지도 없으니까. 심지어 그는 초등학교 은사와도 친한 사이였던 것 같지는 않았다. 어휘가 늘어나는 시기에 자유로운 대화가 가능한 상대가 없었다는 한계를 극복할 수 있는 인간은 없다는 것이 나의 지론이다. 디킨스? 그에게는 신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상대가 꼭 인간 생물일 필요는 없으니까. 사실 불후의 작가들에게는 그 상대가 대체로 책이 아닌가? 카뮈는 책과 거리낌없이 놀면서 보낸 시간이 별로 없었다는 것은 확실히 알 수 있다. 많이는 읽었을 텐데, 아마 그 교사에게처럼 긴장하고 삼가하고 물러서 있는 심정으로 진행된 경험이 아니었을까? 그의 재능은 학자적인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3 때 연극에 대한 편애와 소재에 대한 역사적 지식으로 인해 조금 기대를 가지고 읽었던 희곡집에 너무 실망하여 다시는 그를 읽지 않을 뻔했다. 코로나 바이러스가 아니었다면. 내 사랑 체호프와 비교하기도 민망했다. 좀 연도를 생각하자. 물론 노벨 문학상이 아니었다면 굳이 불평할 이유는 없었을 테지.

재작년에 지구적 사태로 인해 페스트를, 그렇지만 나의 상황으로 인해 야금야금 무려 두 달에 걸쳐 읽었지만, 대표작들을 하나도 읽지 않았으니 길게 할 말은 없다. 가장 의미 깊다고 생각한 것은 역사적 유비 때문만이 아니라도 다층적인 체육관 장면이었고. 첫 등장부터 애착을 느꼈던 그랑에 대한 작가의 시선으로부터 받은 위안과. 그래도 문학적이라기엔 너무 기계적으로 교훈적이다. 작품 안에서 모든 장치들과 기능들에 대한 직설적인 자기 해설까지 온전히 끝내 버리고 있다. 배운 용어로, 눈이 시릴 정도로 투명하다. 철학적 우화. 설교집. 

사정들로 인해 긴장을 풀려다가 너무 풀어 버린 후 복구가 안 되어 우울증이 생긴 것 같아 긴장 해소용 아닌 발생용 몸부림. 

  

Friday, January 28, 2022

Sergei Bondarchuk (1967) War and Peace

1. Andrei Bolkonsky (1/2)



1. Andrei Bolkonsky (2/2)



2. Natasha Rostova



3. The Year 1812



4. Pierre Bezukhov


in: Серге́й Фёдорович Бондарчу́к (Sergei Bondarchuk, 1966-1967) 
Война и мир (Voyna i mir) War and Peace (영어 자막)



씬들이 아니라 프레임들이 명화.   

+

역시 내가 놀려고 할 때는 몸이 안 좋을 때였어... 단지 좌절하지 않기 위한 방편. 어떻게 예외가 없어... 


Monday, November 08, 2021

Jean-Jacques Annaud (1986) The Name of the Rose OST by James Horner



중3 때 영화로 먼저 봤는데, 부러워서 심장 터지는 줄 알았다. 이제는 아드소도 부럽소. 나도 길 잃는 게 특기인데, 마스터가 없어. guilt-free가 편하긴 해도.   


OST by James Horner 





Giacomo Battiato (2019) Il nome della rosa (8부작 연속극) trailer
전편 나중에 보기@왓챠








라디오 드라마 (8부작) 


Sunday, October 17, 2021

Arkady & Boris Strugatsky (1972) Piknik na obochine (Roadside Picnic) 노변의 피크닉

가장 안 중요한 부분. 


Аркадий Натанович Стругацкий (Arkady Natanovich Strugatsky) · Борис Натанович Стругацкий (Boris Natanovich Strugatsky) (1972) Пикник на обочине (Piknik na obochine) Roadside Picnic : 

"좋아요, 말해 드리지. 다만 리처드, 당신의 질문이 외계인학이라는 유사과학에 속한다는 사실을 우선 말해 둬야겠습니다. 외계인학이란 공상과학과 형식적 논리를 부자연스레 섞어 놓은 거라 할 수 있지요. 외계의 이성에 인간의 심리를 갖다 붙이는 잘못된 접근 방식이 그 연구법의 근본에 있으니." 

"그게 왜 잘못된 거죠?"

"언젠가 생물학자들이 인간 심리를 동물에게 대입하려 했을 때 이미 실패했기 때문입니다. 지구의 동물이었는데도." 

"잠시만요. 그건 전혀 다른 이야기잖아요. 우리는 이성을 지닌 생명체의 심리에 대해 말하고 있는 거 아닌가요......" 

"그렇습니다. 다만 우리가 이성이란 게 도대체 뭔지 알았더라면 아주 좋았겠지요." 

"그럼 우리가 모르고 있다는 말씀인가요?" 누넌은 놀랐다. 

"당연히 모르지요. 대개는 아주 평면적인 정의만을 얘기합니다. 이성은 인간의 행동을 동물의 행동과 구분 짓는 인간만의 특징이라고. 아는지 모르겠지만, 이런 정의는 모든 것을 분명히 이해하면서도 말을 못할 뿐인 개와 그 개의 주인을 구분 짓는 시도에 불과합니다. 그런데 이런 평면적인 정의에서 좀 더 예리한 고찰이 파생하기도 하지요. 위에서 언급한 인간의 활동에 대한 우울한 관찰에 기반 해서 말입니다. 예를 들면 이런 겁니다. 이성이란 살아 있는 생명체가 비합리적이거나 부자연스러운 행동을 하도록 하는 능력이다." 

"그러네요, 우리 이야기네요." 누넌이 동의했다. 

"안타깝게도 그렇습니다. 혹은, 이런 가설적 정의도 있어요. 이성이란 아직 완성되지 못한 복잡한 본능이다. 요컨대 본능적 행위는 언제나 합리적이고 이치에 맞는다는 얘기지요. 백만 년이 흐르면 본능이 완성될 테고, 그렇게 되면 우리는 이성과는 분명 불가분인 실수란 것을 하지 않게 될 겁니다. 그리고 그때, 우주에 뭔가 변화가 생긴다면, 감사하게도 우리 인류는 멸망할 테지. 다시 한 번 말하자면, 그때는 실수를 하지 않게 될 것이기 때문, 즉, 엄격한 프로그램으로 검토된 선택지 외에 다양한 선택지를 시험해 보지 않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박사님께서 말씀하시는 건 모두...... 뭐랄까, 좀 굴욕적이군요." 

"그럼 또 다른 정의, 아주 원대하고 고귀한 정의를 말해 보지요. 이성이란 주변 세계를 해치지 않으면서 그 세계의 힘을 이용하는 능력이다."

누넌은 얼굴을 찌푸리고는 고개를 흔들었다. 

"아니요. 그건 너무 과한데요...... 그건 우리 이야기가 아니잖아요...... 그럼 이건 어떨까요? 인간이란 동물과는 달리 앎에 대한 억누를 수 없는 열망에 사로잡힌 존재다. 어디선가 그런 글을 읽었는데요."

"나도 읽었습니다." 밸런타인이 말했다. "하지만 모든 불행은 인간, 적어도 집단으로서의 인간은 그 알고자 하는 열망을 쉬이 극복한다는 데 있어요. 내가 봤을 땐, 인간에겐 그러한 열망 자체가 아예 없는 것 같고. 이해하려는 열망은 있지만, 이해하는 데 지식이 꼭 필요한 건 아니지요. 예를 들어 에 대한 가설은 완벽하게 아무것도 몰라도 완벽하게 모든 것을 이해할 수 있는,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가능성을 줍니다...... 인간에게 극도로 단순화한 세계 시스템을 제시하고 그 단순화한 모델을 토대로 어떤 사건이든 해석하도록 하는 겁니다. 이러한 접근방식에는 어떠한 지식도 필요 없지. 외운 형식 몇 개에 직관이라 불리는 것을, 실용적인 사고와 상식이라 불리는 것을 더하면 될 뿐." 

"잠깐만요." 누넌이 말했다. 그는 맥주를 마저 마시고 빈 잔을 테이블에 탁 하고 내려놓았다. "말 돌리지 마세요. 그럼 이렇게 여쭤볼게요. 인간이 외계 생명체와 만났어요. 그들은 서로가 이성적 존재라는 걸 어떻게 알 수 있죠?" 

"나는 모르겠소." 밸런타인이 즐거워하며 대답했다. "내가 그것에 관해 읽었던 글은 모두 자가당착에 빠졌습니다. 그들이 우리와 접촉할 수 있다면 그건 그들이 이성적이란 의미다. 혹은 뒤집어서, 그들이 이성적이라면 우리와 접촉할 수 있을 것이다. 다시 말해, 인간의 심리를 지닐 영광을 누리는 외계 생명체면 이성적이라는 겁니다. 뭐 그런 거지. 리처드, 보니것 읽어 봤습니까?"

"관심 없어요. 전 박사님이라면 모든 것을 이미 체계적으로 정리해 뒀을 거라 생각했는데요." 누넌이 말했다. 

"체계적으로 정리하는 건 원숭이도 할 수 있지요." 밸런타인이 지적했다. 

"아니요, 잠시만요." 누넌이 말했다. 왠지 그는 속은 기분이었다. "하지만 박사님께서 그렇게 간단한 걸 모르신다면...... 됐습니다. 그게, 이성이야 어떻든 상관없습니다. 도저히 이해가 불가능한 영역인 것 같군요. 하지만 방문은요? 어쨌든, 방문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시죠?" 

"피크닉을 한번 떠올려 보시지요......" 밸런타인이 대답했다. 

누넌은 전율했다. 

"뭐라고 하셨죠?" 

-- 이보석 옮김(2017: 227-231) 


아주 어릴 때, 외계인, 외계 생명체라는 말을 처음 들었을 때 너무 이상했던 것이, 우리가 '생명'이라고 여기는 것을 그들도 그렇게 여긴다는 보장이 없는데(있다면, 이미 만난 적이 있다는 얘기고.), 그들이 그들에게 '생명'으로 생각하는 것을 우리가 그렇게 여길 가능성이 도대체 어디에서 성립한다는 것인지 하는 거였다. (게다가, 중딩 때야 알게 된 거였지만, 우리는 물론 우리의 '생명'을 정의하지 못하고 있다.) 한참 후, [혹성탈출]을 리메이크 영화로 처음 보았을 때, 그야말로 제국주의 의식의 정점에 이른 산물이로구나, 하고 경악했는데, 짜릿하게도(?) 원작자가 프랑스인이었다는. 그 원작을 읽지 않았지만, 인간에 대한 것이 아니라 사회에 대한 것으로서는 깊이 인정한다. 시리즈 영화 중 무엇이든 기회가 있을 때마다 다시 열심히 보게 된다. 

그래도 난 [어비스]가 좋더라. 카메론은 늘 자신이 인간인 것에 대해 겸손하고 더 중요한 건 그 겸손할 줄 앎으로 인해서 나오는 모든 비합리적인 선택과 자멸적인 행동을 알아보고 일일이 헤아려 대견스러워한다. 사랑할 줄 안다. 현숙한 아이 인간처럼. 문득, 파이널 판타지 10(Final Fantasy X)과 상통하는 세계관이라고 할까. 누군가들은 성인용 디즈니 랜드라고 하겠지만. 누군가는 그래서 너는 이용하고 싶은 마음이 들게 한다고 했지만. (난 그를 동정할 만큼도 관심이 없고.) 입장할 수 있다면, 그래도 난 돈 내고 싶다. 

연속해서 악몽을 꾸는 등 꽤 시달리고 있지만, 리뷰 적을 여유는 없고. 구성과 번역이 훌륭한 역본. 

2021년 9월 타르콥스키 읽던 중 책장에 있어서 불현듯 시독 - 10월 17일 일요일 완독.   

+ 러시아어는 처음부터 필기체를 함께 익혀야 한다네. 

Sunday, September 19, 2021

Andrei Tarkovsky (1960) Katok i skripka (The Steamroller and the Violin)

Андрей Арсеньевич Тарковский (Andrei Arsenyevich Tarkovsky, 1960) 
Каток и скрипка (Katok i skripka) The Steamroller and the Violin  증기기관차와 바이올린
source from george on Vimeo (러시아 원어/영어 자막/저화질)


국립영화학교(VGIK) 시절 세 번째 연출 습작, 졸업작품. 최우등 졸업.


2021-09-18 흙의 밤 @내 방 

아웅~     

 

Андрей Арсеньевич Тарковский (Andrey Arsenyevich Tarkovsky, 1986): 영화에서 나를 굉장히 매료시키는 것은 바로 시적 연결, 시의 논리이다. 내가 볼 때 시의 논리는 예술 중에서 가장 진실하고 시적인 예술인 영화의 가능성에 더 잘 부합한다. 

직선적이고 논리적으로 연속적인 플롯 전개로 이미지를 연결하는 전통적인 드라마보다는 시의 논리가 어떤 경우에도 내게 더 가깝다. 사건들 사이에서 이처럼 지독히도 '올바른' 관계는 대개 독단적인 계산과 사변적이고 사색적인 판단의 강한 영향 아래 탄생한다. 그러나 심지어 이런 것이 없을 때조차도, 인물들이 플롯을 지배할 때조차도 연결의 논리는 삶의 복잡성을 단순화하는 데서 나오는 것으로 드러난다. 

하지만 영화 재료를 통합해주는 또 다른 방법이 존재한다. 이 방법에서 중요한 것은 인간 사유의 논리를 밝히는 것이다. 사건들의 시퀀스와 사건들을 하나의 전체로 만들어주는 편집은 바로 이 사유의 논리에 따라 좌우된다. 

사유의 탄생과 발전은 특별한 법칙을 따른다. 사유의 표현은 논리적 · 사변적 구성과 다른 형식을 요구한다. 내가 볼 때 시적 논리는 전통적 드라마의 논리보다 사유의 발전 법칙에 더 가깝다. 다시 말해 삶 자체에 더 가깝다. 한편, 고전 드라마의 기법들은 오랫동안 극적 갈등의 표현 형식을 규정해온 유일한 모법으로 간주된다. 

시적 연결 형식이 감정을 크게 고양시키면 관객이 적극적으로 반응하게 된다. 관객은 플롯에서 미리 도출된 결론이나 작가의 경직된 지시에 의존하지 않은 채 삶을 발견하는 과정에 참여하게 된다. 관객에게 자유롭게 허락되는 것은 오직 묘사되는 현상들의 심층적 의미를 파고들게 도와주는 것뿐이다. 복잡한 생각과 세계의 시적 비전은 지나치게 명명백백한 것의 틀 안에 끼워져서는 안 된다. 직접적으로 평범한 시퀀스들의 논리는 미심쩍게도 기하학적 원리의 증명을 연상시킨다. 예술에서 이런 방법은 감정적이고 이상적인 평가를 결합해주는 연상적 연결이 열어주는 기회보다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빈약하다. 그래서 영화가 그런 기회를 극히 드물게 사용한다는 것은 매우 유감이다. 하지만 그런 길을 택하는 것이 더 낫다. 이미지가 창조돼 나오는 재료를 '폭발하게' 해주는 내적인 힘이 그 안에 있기 때문이다. 

어떤 대상에 관해 모든 것이 말해지지 않는다면, 여전히 더 생각해볼 가능성이 남아 있다. 그렇지 않다면 결론은 관객이 어떤 생각도 하지 못하는 사이에 만들어져 나온다. 이때 결론은 관객에게 아무런 수고도 없이 제공되기 때문에 관객에게는 그런 결론이 필요하지 않다. 관객이 이미지의 탄생 과정에서 겪는 고뇌와 기쁨을 작가 자신과 함께 나눠 갖지 못한다면, 작가는 관객에게 과연 무엇을 말할 수 있을까? 

이런 창작 방식에는 또 다른 장점이 있다. 예술가가 관객에게 부분들을 하나의 전체로 다시 쌓아 올려서 글자 그대로 말해진 것보다 더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하는 길이 영화를 인식하는 과정에서 관객과 예술가를 같은 선상에 올려놓는 유일한 길이다. 게다가 상호 존중의 관점에서 볼 때 이런 관계는 예술적으로 실현할 가치가 있다.

여기서 내가 말하는 시는 문학 장르의 하나가 아니다. 시는 세계에 대한 인식이자 현실을 보는 특별한 성격의 태도이다. 

이때 시는 인간을 평생 지배하는 철학이 된다.  

-- 라승도 옮김(2021: 29-32)


그래서 나에게 '시적'인 작품과 그렇지 않은 작품 사이의 구분만이 의미 있다. 장르나 매체나 상업성 여부나 비평적 등급이 아닌. 솔직히 시적이지 않은 시도 많다. 시적인 웹툰만큼이나. 그 구분은 몸이 한다. 에너지 보존 법칙이 성립하지 않은 세계라서. 

 

Sunday, September 12, 2021

Tarkovsky & Gordon (1958) There Will Be No Leave Today

Александром Гордоном и Андреем Тарковским (Aleksandr Gordon & Andrei Tarkovsky, 1958) Сегодня увольнения не будет… (Segodnya uvol'neniya ne budet…) 
There Will Be No Leave Today 오늘 해고는 없다 (영어 자막)
based on Арка́дий Я́ковлевич Сахни́н (Arkadiy Yakovlevich Sakhnin, 1958) 
Эхо войны. М. (Ekho voyny. M.) The Echo of War


국립영화학교(VGIK) 학생 시절 두 번째 습작, 예비 졸업작품. 1959년 5월 9일 승전 기념일에 텔레비전으로 방영되었다. 원본은 유실되고 영상은 그 녹화본인 듯. 


2021-09-11 흙의 밤 @내 방

강박적이지 않다고 할 수 없는 선택이었는데, 명백한 프로파간다이지만 깊은 위로를 받았다. 내 책임이 아닌 것들에 책임을 지기 위해 애쓰거나 떠맡곤 했던 일들, 본래적으로 그리고 결과적으로 내 책임인 나의 일에 관한 권한이 실제로는 나에게 있지 않아 책임을 지고 싶어도 그러지 못하는 상황들로 점철된 인생이 과거 완료 현재 진행 중. instruction 자체의 문제와 파생되는 문제들. 그저 와이트헤드의 신이 나에게도 있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살 뿐. 조건적 무비판의 조건이 성립하는 가능 조건들에 대한 질문. 그래서 나는 19세기의 사람. 

+

실화를 바탕으로 의뢰에 의해 지원금으로 제작된 선전물이었지만, 병원 장면과 전직 기관총사 민간인 인물을 타르코프스키가 굳이 넣었다고 한다. 이 얼마나 결정적인가. 이래서 모르고 보았더니만. 그리고 묘사의 디테일들. 화면상에서는 디테일에 불과하지만 던지는 질문들을 또렷이 들을 수 있다. (그것들은 '자유 시대'의 네덜란드인 Paul Verhoeven에게서는 대놓고 주요하게 다루어진다. 질문을 미리 만들어서 던지지 않고 관객 스스로 문장으로 만들도록 하니 감상만 하려고 영화를 보면 안 보이지만. 나에게는 가장 좋은 철학 선생님.)    


Андрей Арсеньевич Тарковский (Andrey Arsenyevich Tarkovsky, 1986): 우리 시대가 저물어가고 있다. 더 '정의롭고' 합리적인 사회 조직을 목표로 사회 개조 사상을 추진한 지도자들과 '탁월한 인물들', '대심문관들'이 정점에 섰던 역사 단계 전체도 막을 내리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들은 대중에게 새로운 이념적 · 사회적 사상을 강제하고, 국민 다수의 행복을 위해 생활 조직 형식을 개조하라고 촉구하면서 대중의 의식을 지배하려고 했다. 도스토옙스키는 다른 사람들의 행복을 위해 자신들이 책임을 지겠다고 나서는 '대심문관들'에 대해 이미 경고한 바 있다. 우리는 특정 계급이나 특정 집단의 이익을 소리 높여 주장하고 더 나아가 인류의 이익과 '보편적 선'에 대한 주문을 읊조리듯 기원했던 사람들이 어떻게 사회에서 치명적으로 소외된 개인의 권리를 파렴치하게 짓밟았는지 보았다. 어떻게 '역사적 필연성'에서 '객관적', '과학적' 근거를 찾으면서, 존재론적 차원에서는 주관적으로 의식하는 오류를 범하기 시작했는지 보았다. 

사실 문명사 전체에 걸쳐, 역사 과정이란 세계 구원과 인간 조건의 개선을 위해 공상가와 정치인들의 머릿속에서 무르익은 더 '확실하고' '올바른' 길을 사람들에게 매번 제시하면서 형성됐다. 이런 재건 과정에 참여하려면 '소수자들'은 매번 자신만의 사고방식을 포기하고 자신의 노력을 외부로 돌려 제안된 행동 계획에 맞춰야만 했다. '진보'를 위한 역동적인 대외 행동의 조건 속에서 인간은 미래와 인류를 구원하면서 자신에게 고유한 것과 개인적인 것, 현재적인 것을 망각했고 공동의 노력에 사로잡힌 채 자신의 고유한 정신적 특성의 의미를 저버렸다. 이런 과정을 거친 결과 개인과 사회에 더욱더 절망적인 갈등 상황이 형성됐다. 예수 그리스도가 "너 자신처럼 네 이웃을 사랑하라"고 말한 의미대로, 자기 자신의 이익을 생각하지 않고 다른 모든 사람의 이익을 걱정해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사실 예수의 말은 당신 안에서 초개인적인 것을 존중할 수 있을 만큼, 다시 말해 당신이 개인적이고 탐욕스럽고 이기적인 관심사에 빠지지 않게 해주고, 당신 자신을 타인에게 내주고, 의심도 판단도 없이 타인을 사랑하게 하는 신적인 원리를 존중할 수 있을 만큼 당신 자신을 사랑하라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서는 진정한 자기 존엄이 필요하다. 다시 말해 세속 생활의 중심이 되는 나의 '자아'가 객관적 가치와 의미를 소유하고 일정한 정신 수준을 달성하고, 무엇보다도 이기적 의도가 빠진 정신적 완성을 지향한다는 진실에 대한 의식이 필요하다. 자기 자신에 대한 관심, 자기 자신의 영혼을 위한 투쟁은 인간에게 굳건한 결행과 막대한 노력을 요구한다. 윤리적 의미에서 인간은 자기 자신의 실리적 · 이기적 관심사를 조금 더 올리는 것보다 낮추기가 훨씬 더 쉽다. 진정한 정신적 탄생에 이르려면 커다란 내면적 노력이 필요하다. 그리고 인간은 '영혼을 낚는 사람들'의 낚싯대에 쉽게 걸려든 나머지 어쩌면 공통의 고매한 과제를 위해 자신의 개인적인 길을 포기하고, 그럼으로써 어떤 목적을 위해 자신에게 주어진 삶과 자기 자신을 사실상 배신하게 된다는 것을 의식하지 못한다. 

인간관계는 사람들이 자기 자신에게는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고 윤리적 노력을 기울이지도 않으면서 모든 요구를 다른 사람들에게, 인류 전체에게 전가하는 방식으로 형성됐다. 사람들은 타인에게 자신을 낮추고 희생하고 사회 건설에 참여하라고 하지만, 정작 자신은 이 과정에 절대 참여하지 않고 세계에서 일어나는 일에 대한 개인적 책임을 거부한다. 이런 과정에 참여하지도 않고, 더 보편적이고 고매하고 내적으로 의미 있는 과제들을 위한 길에서 자신의 편협하고 이기적인 관심사를 포기하지도 않는 짓을 정당화하는 구실은 수천 개가 넘는다. 자기 자신을 냉철하게 바라보고 자기 자신의 삶과 영혼에 책임을 지겠다는 결심과 의지를 보이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우리' 모두 함께, 다시 말해 인류 모두가 문명을 창조한다고 하면서 우리는 개인적 책임을 저버리고 세계에서 일어나는 일에 대한 책임을 자신도 모르게 다른 사람들에게 전가한다. 이런 뿌리 깊은 전제에서 개인과 사회의 갈등은 점점 더 절망에 빠지고, 개인과 인류 사이 소외의 벽은 날로 높아진다. 

요컨대, 우리는 어느 누구의 노력도 아닌 바로 우리 '공동'의 노력으로 건설된 사회에서 살고 있는데, 여기서 개인에 대한 요구는 자기 자신에게 부여되지 않고 다른 사람들에게 부여된다. 이러한 상황에서 인간은 낯선 사상과 야심을 위한 수단이 되거나 그 자신이 지도자가 되어 어떤 개인의 권리도 고려하지 않고 다른 사람들의 에너지와 노력을 이용한다. 개인적 책임은 '공동 이익'으로 잘못 이해한 것을 위해 희생되어 사라져버린 것 같았다. 인간은 '공동 이익'에 봉사한답시고 자기 자신에 대한 책임을 방기하는 권리를 획득했다. 

우리가 우리 자신의 문제를 누군가에게 전가한 순간부터 물질적 과정과 정신적 과정 사이에 가로놓인 심연이 계속해서 깊어지고 있다. 우리는 다른 사람들이 우리를 위해 마련해준 사상들의 세계에 살면서 이 사상들의 표준에 따라 발전하거나 그로부터 절망적으로 점점 소외되고 그에 대립한다. 

믿기 어렵고 야만적인 상황이 아닐 수 없다! 

-- 라승도 옮김(2021: 290-292) 


Thursday, September 02, 2021

Vangelis (1982) Blade Runner by Ridley Scott

Vangelis (1982) Tears in Rain 
in Blade Runner  블레이드 러너 by Ridley Scott




Main Theme




full OST by Vangelis





Denis Villeneuve (2017) Blade Runner 2049  블레이드 러너 2049  OST 



그래도 교수님께 이메일 쓰는 게 더 어렵다. 그런 느낌이 좀 안 묻어나도록 하려니 더욱. 차라리 논문을 쓰고 말지. 날 샜다. 이런 존재가 내 인생에 언제 있었어야 해 본 거라도 있지. 유딩 된 것 같다. 하는 말도 그때보다 못한 수준이네. 여섯 살 때 도도하단 말 여러 번 들었는데. 도도하다가 무슨 뜻인지 모를 때. 웃픔. 쾌적한 지구를 위해 그만둬야 하나... 


Wednesday, April 28, 2021

Erwin Schrödinger (1958) Mind and Matter 정신과 물질

Erwin Schrödinger (1958): 발전은 거부할 수 없는 운명에 의해 결정된다는 믿음으로 사태를 방치하지 말아야 한다. 우리가 발전을 원한다면, 발전을 위해 무언가 해야 한다. 또한 발전을 원하지 않는다면 하지 말아야 한다. 정치적 사회적 발전과 역사적 사건들 일반이 운명의 장난으로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주로 우리의 행동 때문에 발생하듯이, 더 큰 규모의 역사에 다름 아닌 우리의 생물학적 미래를 어떤 자연법칙에 의해 미리 결정된 불변의 운명으로 여겨서는 안 된다. 적어도 연극의 주인공인 우리에게는 사태가 그러할 수 없다. 설령 우리가 새와 개미를 보듯이 우리를 지켜보는 더 높은 존재에게는 그렇다 할지라도 말이다. 사람들이 좁은 의미와 넓은 의미의 역사를 예정된 것으로 여기는 경향이 있는 이유는 매우 명백하다. 그것은 모든 개인 각자가, 자신의 의견을 많은 사람들에게 전파하고 그것에 따라 행동하도록 설득할 수 없는 한, 자신에게는 거의 아무 힘도 없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 

현재 대부분의 생산 공정에서 진행 중인 기계화와 '바보화(stupidization)'는 우리의 지능 기관의 일반적 퇴보를 가져올 수 있는 심각한 위험 요소라고 나는 믿는다. 수공업의 억압과 따분하고 지루한 조립 라인 작업의 확산에 의해 영리한 노동자로서 살 기회와 무감각한 노동자로서 살 기회의 비중이 동등해질수록, 영리한 뇌와 유능한 손과 날카로운 눈은 점점 더 불필요해질 것이다. 심지어 천성적으로 따분한 노동이 더 쉽다고 느끼는 우둔한 인간이 더 선호될 것이다. 그런 인간들이 더 쉽게 성장하고 정착하여 자손을 낳을 것이다. 결과적으로 재능이나 재주와 관련해서 부정적인 선택이 일어날 가능성이 다분하다. 

[...] 다행스럽게도 우리의 현재 행복과 미래 진화는 나란히 함께 간다. 지루함은 우리의 삶에서 결핍 다음으로 나쁜 가장 심각한 독소가 되었다. 우리가 발명한 교묘한 기계들이 불필요한 사치품을 점점 더 많이 생산하도록 방치하는 대신에, 그 기계들을 인간의 바보 같고 기계적이고 '기계 같은' 노동을 대신할 수 있는 수준으로 발전시켜야 한다. 인간이라는 훌륭한 존재가 하기에 너무 하찮은 노동을 기계가 맡아야 한다. [...] 전 세계의 큰 기업들과 재벌들이 서로 경쟁하는 한, 이런 일이 실현되리라는 작은 희망을 품을 수 있다. 하지만 그런 종류의 경쟁은 흥미롭지도 않고 생물학적으로 무가치하다. 우리의 목표는 그런 경쟁 대신에 인간 개인들 간의 흥미롭고 지적인 경쟁을 회복하는 것이 되어야 한다. 

-- 전대호 옮김 (2007: 186-189) 


오퍼레이터로서 탱크의 자리를 지망하고 건너왔다. 나는 탱크와 달리 시온 출신이 아닌 매트릭스 출신이지만, 그래서 유리한 점이 있다. 설령 탱크처럼 조종간까지는 못 맡게 되더라도 그래서 백업을 해 주진 못하더라도 네오들이 쓸 총알 알고리듬 같은 건 얼마든지 만들 수 있을 것 같았으니까. 침투 루트를 좀 알고 있으니까. 그들의 설계도를 읽을 수 있으니까. 그런데 아직도 각성하지 않는 모피어스들을 보며 절망한다. 이미 늦었지만 아직 늦지 않았는데... 

네오가 매트릭스에서 낮에는 프로그래머로 밤에는 해커로 투잡을 했듯이, 전설의 해커 모피어스는 전직 고등학교 문학 담당 교사였다, 라고 처음 영화를 봤을 때부터 생각했다. 오비디우스로 박사 학위 논문을 썼나 보다고. 그가 대련 프로그램과 점프 프로그램 안에서 네오에게 무엇을 가르치는지 보면 확실하다. 얼른 네오들을 찾아서 현실을 보여 주고 좋은 알약을 고르게 하고 잘 훈련시켜서 팀에 데리고 들어가야 하는데. 어쩌면 이 모피어스들은 자신이 모피어스임을 모르는지 아니면 알고 싶지 않은 건지 모르겠다. 무엇보다 모피어스는 신념이 강해야 하는데 말이다.  


이렇게 중요한 이야기를 적는 곳이 아닌데, 고립무원이라 그런지 점점 심각해지는 것 같아. 



Monday, April 26, 2021

Erwin Schrödinger (1944) What is Life 생명이란 무엇인가

Erwin Schrödinger (1944): 순전히 과학적인 관점에서 분노도 편견도 없이 생명을 탐구하느라 상당히 애를 쓴 내게, 우리 논의의 철학적인 함축들에 대한 나 자신의 주관적일 수밖에 없는 견해를 덧붙일 기회를 허락해주길 바란다. 

앞의 논의에서 제시된 증거에 따르면, 살아 있는 존재의 몸속에서 일어나며 또한 그 존재의 정신적 활동, 자기의식 등에 대응하는 공간 시간적 사건들은 (그 사건들의 복잡한 구조와 물리학과 화학의 공인된 통계학적인 설명을 고려할 때) 엄격하게 결정론적이지는 않을지 몰라도 최소한 통계 결정론적이다.

내가 보기에 양자 불확정성은 일부에서 주장하는 것과 달리 감수 분열이나 자연적 혹은 X선 유발 돌연변이 같은 사건들의 순수한 우연성을 강화하는 것(이 사실은 명백하고, 잘 알려져 있다) 외에는 생물학적으로 의미 있는 역할을 하지 않는다. 나는 물리학자들에게 이런 점을 강조하고 싶다. 

논의를 진행하기 위해 살아 있는 존재가 통계 결정론적이라는 것을 사실로 전제하자. 만일 '자신이 순전히 기계라고 선언하는 일'이 잘 알려진 불쾌감을 동반하지 않는다면, 모든 공정한 생물학자가 이 사실에 동의할 것이라고 나는 믿는다. 그런 불쾌감이 동반되는 이유는, 이 사실이 직접적인 자기반성에 의해 확인할 수 있는 자유의지에 모순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직접적인 경험들 자체가 아무리 다양하고 이질적이라도, 그것들이 서로 모순되는 것은 논리적으로 불가능하다. 그러므로 우리가 다음의 두 전제로부터 옳고 모순되지 않는 결론을 도출할 수 있을지 생각해 보자. 

  1. 내 몸은 자연법칙에 따르는 순수한 기계로서 작동한다.
  2. 그러나 나는 내가 결과를 내다보면서 내 몸의 운동을 지휘하고, 또한 이것이 가장 중요하고 운명적일 텐데, 내가 그 운동에 대해 전적인 책임을 느끼고 인정한다는 것을, 부정할 수 없는 직접적 경험을 통해 안다.
이 두 사실에서 추론할 수 있는 유일한 결론은 내가 (가장 넓은 의미의 '나', 즉 한 번이라도 '나'를 느끼거나 발설한 적이 있는 모든 의식 있는 정신이) 자연법칙에 따라서 '원자들의 운동'을 통제하는 당사자라는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다른 과정 같은 결론. 내 경우 소프트웨어 공학이 결정적이었다. 그 의미 때문에 지금 이 순간에도 이러고 있는 것인데, 십 대 때 이미 고전이었던 Watson의 이중나선을 읽고 자란 나로서는 어리둥절해지는, DNA 발견 이전의 당시 상황에 적응하느라 주말을 통째로 날리고 또 날을 새우고도 쓰기는 커녕 읽기도 멈춘 현실 상황에 숨 막히는 압박이 한순간에 보람으로 돌아왔다. 지나치게 사적인 기쁨이라는 것이 문제인데... 큰 지도에서 필독서임을 알면서도 나름 펼치지 않고 버틴 몇 달 끝이었으나, 이 방면으로 평생 자제력이 오차 범위 내에서 절대 0도의 에너지 준위에 머물러 있는 나인 걸 어쩌겠소. orz. 

이게 다 최소 볼츠만까지 커버해야 나오는 벤제 때문이야.    

Wednesday, May 30, 2018

Stefan Kempas (2010) Schwarz wie Milch


Stefan Kempas (2010) Schwarz wie Milch
- Konzeption und Realisation eines Kurzfilmes zum Thema: Beeinflussung durch Medien

http://schwarzwiemilch.d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