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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ednesday, December 01, 2021

Clara Schumann (1846) Piano Trio in G minor, Op. 17


Clara Schumann (1846) Trio für Pianoforte, Violine und Violoncello, g-Moll, op. 17 
(Piano Trio in G minor




Robert Schumann (1847) Trio für Klavier, Violine und Violoncello Nr. 1 d-Moll, op. 63 
(Piano Trio No. 1 in D minor
ATOS Trio: Annette von Hehn violin / Stefan Heinemeyer cello / Thomas Hoppe piano 
2019-12-05  Konzerthaus Berlin


클라라의 결혼 6주년 선물이자 자극 그리고 남편의 답례이자 도전. 💕 


Saturday, October 02, 2021

Terrence Malick (2005) The New World

Terrence Malick (2005) The New World  뉴 월드 


드물게 좋아하는 로맨스 영화. 가장 감동적인 오프닝 중 하나로도.  



OST by James Horner 


Sunday, September 19, 2021

Andrei Tarkovsky (1960) Katok i skripka (The Steamroller and the Violin)

Андрей Арсеньевич Тарковский (Andrei Arsenyevich Tarkovsky, 1960) 
Каток и скрипка (Katok i skripka) The Steamroller and the Violin  증기기관차와 바이올린
source from george on Vimeo (러시아 원어/영어 자막/저화질)


국립영화학교(VGIK) 시절 세 번째 연출 습작, 졸업작품. 최우등 졸업.


2021-09-18 흙의 밤 @내 방 

아웅~     

 

Андрей Арсеньевич Тарковский (Andrey Arsenyevich Tarkovsky, 1986): 영화에서 나를 굉장히 매료시키는 것은 바로 시적 연결, 시의 논리이다. 내가 볼 때 시의 논리는 예술 중에서 가장 진실하고 시적인 예술인 영화의 가능성에 더 잘 부합한다. 

직선적이고 논리적으로 연속적인 플롯 전개로 이미지를 연결하는 전통적인 드라마보다는 시의 논리가 어떤 경우에도 내게 더 가깝다. 사건들 사이에서 이처럼 지독히도 '올바른' 관계는 대개 독단적인 계산과 사변적이고 사색적인 판단의 강한 영향 아래 탄생한다. 그러나 심지어 이런 것이 없을 때조차도, 인물들이 플롯을 지배할 때조차도 연결의 논리는 삶의 복잡성을 단순화하는 데서 나오는 것으로 드러난다. 

하지만 영화 재료를 통합해주는 또 다른 방법이 존재한다. 이 방법에서 중요한 것은 인간 사유의 논리를 밝히는 것이다. 사건들의 시퀀스와 사건들을 하나의 전체로 만들어주는 편집은 바로 이 사유의 논리에 따라 좌우된다. 

사유의 탄생과 발전은 특별한 법칙을 따른다. 사유의 표현은 논리적 · 사변적 구성과 다른 형식을 요구한다. 내가 볼 때 시적 논리는 전통적 드라마의 논리보다 사유의 발전 법칙에 더 가깝다. 다시 말해 삶 자체에 더 가깝다. 한편, 고전 드라마의 기법들은 오랫동안 극적 갈등의 표현 형식을 규정해온 유일한 모법으로 간주된다. 

시적 연결 형식이 감정을 크게 고양시키면 관객이 적극적으로 반응하게 된다. 관객은 플롯에서 미리 도출된 결론이나 작가의 경직된 지시에 의존하지 않은 채 삶을 발견하는 과정에 참여하게 된다. 관객에게 자유롭게 허락되는 것은 오직 묘사되는 현상들의 심층적 의미를 파고들게 도와주는 것뿐이다. 복잡한 생각과 세계의 시적 비전은 지나치게 명명백백한 것의 틀 안에 끼워져서는 안 된다. 직접적으로 평범한 시퀀스들의 논리는 미심쩍게도 기하학적 원리의 증명을 연상시킨다. 예술에서 이런 방법은 감정적이고 이상적인 평가를 결합해주는 연상적 연결이 열어주는 기회보다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빈약하다. 그래서 영화가 그런 기회를 극히 드물게 사용한다는 것은 매우 유감이다. 하지만 그런 길을 택하는 것이 더 낫다. 이미지가 창조돼 나오는 재료를 '폭발하게' 해주는 내적인 힘이 그 안에 있기 때문이다. 

어떤 대상에 관해 모든 것이 말해지지 않는다면, 여전히 더 생각해볼 가능성이 남아 있다. 그렇지 않다면 결론은 관객이 어떤 생각도 하지 못하는 사이에 만들어져 나온다. 이때 결론은 관객에게 아무런 수고도 없이 제공되기 때문에 관객에게는 그런 결론이 필요하지 않다. 관객이 이미지의 탄생 과정에서 겪는 고뇌와 기쁨을 작가 자신과 함께 나눠 갖지 못한다면, 작가는 관객에게 과연 무엇을 말할 수 있을까? 

이런 창작 방식에는 또 다른 장점이 있다. 예술가가 관객에게 부분들을 하나의 전체로 다시 쌓아 올려서 글자 그대로 말해진 것보다 더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하는 길이 영화를 인식하는 과정에서 관객과 예술가를 같은 선상에 올려놓는 유일한 길이다. 게다가 상호 존중의 관점에서 볼 때 이런 관계는 예술적으로 실현할 가치가 있다.

여기서 내가 말하는 시는 문학 장르의 하나가 아니다. 시는 세계에 대한 인식이자 현실을 보는 특별한 성격의 태도이다. 

이때 시는 인간을 평생 지배하는 철학이 된다.  

-- 라승도 옮김(2021: 29-32)


그래서 나에게 '시적'인 작품과 그렇지 않은 작품 사이의 구분만이 의미 있다. 장르나 매체나 상업성 여부나 비평적 등급이 아닌. 솔직히 시적이지 않은 시도 많다. 시적인 웹툰만큼이나. 그 구분은 몸이 한다. 에너지 보존 법칙이 성립하지 않은 세계라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