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unday, January 23, 2022

phenomenology of 'white'

조정권 (1994)그의 회화는 ‘그려진’ 것이 아니라 붓질에 의해 ‘생성된’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는 지금까지 화면에 무엇을 그려넣거나 나타내 보이겠다는 전통적인 ‘그리는’ 방식에서 떠나 있다. 이 떠나 있는 지점이 그의 회화가 발생하는 정신의 지점이다. 아무것도 그려져 있지 않은 허적(虛寂)의 캔버스를 자연색으로서의 순백색으로 여러 번 묽게 마음의 감으로 칠해나가는 그의 작업은 결국 애초부터 아무것도 실려 있지 않았던 캔버스의 투명한 존재 영역 속으로 환원하는 과정을 보여주고 있다. 그 결과 아무것도 그려져 있지 않은 그의 회화가 도달하는 곳은 투명성이 아닐까. 그는 그 내용 없는 투명한 본질의 구조를 모세가 지팡이 자국으로 바닷물을 갈라 보이듯 열어 보이려 한다. [135] 

그의 백색은 마음의 근원으로의 환원을 의미한다. 그는 평면에 밀착된 백색이 물질로서 남는 것을 거부한다. 그는 정신의 흔적으로서 묽은 백색을 붓질해나가는 것이며 그 흔적을 바탕에 가라앉히기 위해 10번 또는 6번 어떤 때는 수십 번 칠해나간다. 그것은 마치 이끼 낀 바위 위로 오랜 시간 냇물이 흘러내리는 것과 같다. 많은 이 땅의 작가들이 착각하는 게 있다면 ‘현상’은 그려질 수 있다는 믿음이다. 그러나 ‘현상’이란 애초부터 그려질 수 없는 어떤 성질이 아닐까. 서구적 이성에 반하는 반성적 의미에서 동양적 정신으로 수용하는 자연의 현상은 무(無)로의 회귀이다. 생성도 결국 무에 굴복하기 위해 태어난 것이고 소멸도 역시 무로의 회귀이다. 생성도 결국 무에 봉사한다. 그는 무 한가운데 존재하는 거대한 투명성을 훔치고 싶어하는 것이 아닐까. 그 투명성에 도달하기 위한 정신의 여정이 그의 붓질 행위란 점에서 그의 흰 화면을 일단 백색의 현상학이라고 보면 어떨까. 최종 붓질이 끝날 때는 많은 시간적 작용이 지나간 후이지만 그는 처음에 그은 것과 같은 투명한 맛이 감과 맞아떨어졌다고 생각될 때 손을 놓는다. 그는 결코 덧칠을 하거나 지우거나 해서 화면을 죽이거나 살리거나 하지 않는다. 그의 손과 정신은 자연의 간섭을 최대한 끌어들이는 데 주저하지 않는다. 말하자면 붓질 속에서 우연성을 끌어들이고 자연과 의지가 만나 조화를 이루었다고 판단될 때 작업을 끝낸다. [136] 


서유럽 이론에 기댈 의도가 전혀 없더라도 '현상학' 피해 가기도 어렵긴 하지. 하지만 존재론적 특성 때문에 와이트헤드와 더 잘 맞긴 하다. 결국 저자 말대로 '선(禪)'으로 잘 통한다는 점에 동의. 하지만 동아시아 사상에만 매여 있으면 작품의 미술사적 의의와 작가의 획기적 의도를 읽을 수 없게 된다.  

시인이라서 직업 평론가들의 글과는 확실히 다르다. 시가 참 좋은데, 구도(求道)를 행한다는 고양의 자의식이 아닌 일상의 공간에서 이처럼 무위 해탈을 이루는 습속의 결과였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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