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ednesday, August 20, 2025

about Erasmus

in: 데시데리우스 에라스뮈스(Desiderius Erasmus) 지음, 차기태 옮김, 바보 여신의 바보 예찬(Moriae Encomium; Stultitiae Laus), 서울: 필맥, 2011.

 

차기태(2011): 사실 '비판은 하되 배반은 하지 않는 것'은 쉽지 않다. 세이렌의 유혹으로부터 벗어나는 것만큼이나 어려운 일이다. 한쪽으로부터는 박해와 수난의 위협을 받고, 다른 한쪽으로부터는 기회주의자니 회색분자니 하는 낙인이 찍히기 일쑤다. 때문에 중용의 자세를 지키는 사람은 남다른 고뇌와 갈등을 피해 갈 수 없다. 세상에서 잊히거나 수난과 몰락의 운명을 감수해야 한다. 중용의 길을 걸은 인물 가운데 소크라테스와 토마스 모어는 사형당했고, 에라스무스는 가톨릭과 프로테스타트 양쪽으로부터 비판과 의심을 받았다. 소크라테스는 친지들로부터 탈옥하라는 권유를 받았지만 뿌리쳤다. 백범 김구는 암살당했다. 이렇듯 어느 쪽으로든 치우친 노선을 배격하고 중용의 길을 선택하는 것은 가시밭길을 예약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어찌 보면 이것은 생각이 깊은 사람들 모두의 숙명일지도 모른다. 

에라스무스가 양쪽으로부터부터 외면당할 위험을 감수하면서 중용의 길을 가기로 한 것은 무엇보다 진실에 입각해 생각하고 살아가려는 자세 때문이었다고 생각된다. [278-279] 


말이 아닌 삶에서 중용은 목표가 아닌 유일한 결과들일 뿐이다. 극소수의 눈에만 그렇게 보이는. 

그게 남자의 결과일 때에는 소수의 추종자 모임이 생기기 마련이다. 최소한의 사실들은 이후 그들에 의해 전달되고 기억된다. 그게 여자의 결과일 때에는, 거기에 어떤 결과라고 부를 만한 것은 애초에 남아 있지 않고, 대신 모두가 사형 선고에 찬동하기에 그 중 누구나 때때로 손쉬운 입지에 이르기만 하면 득의양양 살해 시도의 대상으로 삼는 한 사람의 악덕과 평화로운 '결말'의 이야기가 만들어진다. 그리고, 통으로 삭제된다. 요즘은 악덕보다 무능이란 죄목을 붙이는 추세다. 


옮긴이의 헌신과 마음과 도무지 요즘 같지 않게 자기 모습을 담은 글이 감동을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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