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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turday, April 15, 2023

Maurice Jarre (1965) Suite for Dr. Zhivago

Maurice Jarre (1965) Suite for Dr. Zhivago
Wiener Philharmoniker (Vienna Philharmonic Orchestra) / Valery Gergiev conductor
Summer Night Concert 2020-06-25




David Lean (1965) Doctor Zhivago  닥터 지바고
based on Boris Pasternak (1957) До́ктор Жива́го (Doctor Zhivago
닥터 지바고 (국역본): 박형규(2018)김연경(2019) / 홍대화(2022)

 

"1905년 혁명 전야부터 1914년 1차세계대전과 이어지는 내전, 1922년 러시아에 세계 최초의 사회주의정권이 수립되기까지 대격변의 시기 ..."


 

OST by Maurice Jarre



Thursday, October 20, 2022

Brouwer: Hika and the Young Composer


Leo Brouwer (b. 1939, cub): 

[0:00] Hika – In Memoriam Toru Takemitsu (1996) 

[6:27] Tres apuntes (1959) 

[12:00] Fuga No. 1 (1959) 

[14:34] 20 Estudios sencillos (1972/1983) 

[46:31] Elogio de la danza (1964) 

[52:37] Danza característica "Quítate de la Acera" : I. Allegro (1957) 



부화(충격, 탈진: 질문이 잘못 되었었다는 것을 깨달음) --> 수술(고통, 참회: 답이 이미 주어져 있었다는 것을 깨달음) --> 개안(현기증, 이해: 그것들이 왜 답이었는지 깨달음) ==> 이제 입학하면 되겠네. 환장하네.   


Sunday, September 26, 2021

Andrei Tarkovsky (1962) Ivanovo detstvo (Ivan's Childhood)

Андрей Арсеньевич Тарковский (Andrei Arsenyevich Tarkovsky, 1962) 
Ива́ново де́тство (Ivanovo detstvo) (러시아 원어/영어 자막) 
Ivan's Childhood  이반의 어린 시절  
based on Владимир Осипович Богомолов (Vladimir Osipovich Bogomolov, 1957) Иван (Ivan
* 베네치아 영화제 (23회) 황금사자상      * 샌프란시스코 영화제 (5회) 금문상


2021-09-25 흙의 낮 @내 방 

밤에 보면 힘들 것 같아서. 

타르코프스키에게 방법인 것이 베리만에게 소재이다. 배타적이지 않을 뿐. 이래저래 나에게는 마치 갈릴리의 예수와 타르소스의 파울로스 같다. 성공한 예술에서 작가의 의도란 관객에게 전달된다기보다는 관객 안에서 피어난다. 고유하게.     

연출에 완전히 자유롭지 못했음을 알 수 있었는데 책에 그 형편이 나와 있다. 속 뻔한 작태들과 입장 없음이라는 강력한 입장을 무력증의 핑계로 대고 있는 내가 한심하다. 철학 고전과 미학 페이퍼는 예술-공학자들과 읽게 되겠지. 변명 없이. 


Андрей Арсеньевич Тарковский (Andrey Arsenyevich Tarkovsky, 1986): (네 번의) 모든 꿈은 상당히 구체적인 연상을 근거로 하고 있다. 예를 들면, 첫 번째 꿈은 처음부터 끝까지, 바로 "엄마, 저기 뻐꾸기가 있어!"라고 외치는 대목까지, 나의 어린 시절의 첫 추억 가운데 하나다. 이것은 세계와 처음 만나는 시간이었다. 그때 나는 네 살이었다. 

인간에게 회상은 소중하다. 따라서 회상이 항상 시적인 색채로 장식되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가장 아름다운 회상은 어린 시절의 회상이다. 사실, 기억은 과거의 예술적 재구성에서 토대가 되기 전에 일정한 손질이 필요하다. 여기서는 특별한 감정적 분위기를 잃지 않도록 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러한 분위기가 없다면, 자연주의식으로 자세하게 재구성되는 회상은 모두 쓰라린 환멸감만 불러일으킬 것이다. 당신이 태어난 집이지만, 이미 오랫동안 보지 못한 집을 상상하는 것과 시간의 거대한 간극을 통해 이 집을 직접적으로 관조하는 것 사이에서 나오는 차이가 매우 크기 때문이다. 보통 회상의 시적 특성은 회상의 구체적인 원천과 충돌하게 되면 깨지기 마련이다. 나는 바로 이런 기억의 특성으로부터 발전해 나오는 어떤 독특한 원리 위에서 최고로 흥미로운 영화가 탄생할 수 있다고 확신한다. 행위와 사건의 논리, 주인공의 행동 논리는 외적으로 깨지게 된다. 이것은 그의 회상과 몽상에 관한 이야기가 된다. 그렇게 되면, 심지어 주인공 자신을 보여주지 않고도, 더 확실하게 말하자면, 전통적인 연출로 만들어진 영화에서 흔히 그런 것처럼 주인공을 보여주지 않고도 커다란 의미를 표현할 수 있고 독특한 성격을 묘사할 수 있으며 주인공의 내면세계를 드러내 보일 수 있다. 이러한 방법은 문학과 시에서 주인공의 서정적 이미지를 구현하는 것과 일치한다. 주인공 자신은 부재하지만, 그가 무엇을 어떻게 생각하는지가 그에 관한 분명하고 확실한 관념을 만들어낸다. 

-- 라승도 옮김(2021: 42-43)


Sunday, May 16, 2021

Hans Blumenberg (1957) Nachahmung der Natur. Zur Vorgeschichte der Idee des schöpferischen Menschen 자연의 모방 - 창조적 인간 이념의 전사에 대하여

Hans Blumenberg (1957): 이 무학자 illiteratus가 학계의 권위자들을 마주할 때 보인 어조의 아이러니는, 전제조건들이 같지 않음을 고려하지 않고 자기도 대화에 끼워 주도록 요구하는 데에서 나타나는 말하자면 민주적 양식은 또 다른 기반을 가지고 있다. 그 사람은 자기가 하는 것과 할 수 있는 것을 토대로 — 자기 자신을 이해하고 자신의 가치를 정당화하는데, 이 새로운 각인이 눈길을 끈다. 수행과 자의식의 결합은 역사적으로 결코 자명하지 않지만 쿠자누스의 이디오타에게서 포착될 수 있다. 더 정확히 말하면, 우리가 여기에서 몰두하는 바로 그 관점에서 포착될 수 있다. 

정신에 대한 대화의 제2장에서 "문외한"은 대화의 상대자들인 철학자와 수사학자에게 자신의 수작업이, 즉 이 직업의 종사자를 근근이 먹여 살리고 있을 뿐만 아니라 일반 직업 순위에서는 그렇게나 낮은 등급으로 매겨지는 숟가락 만들기가, 자신의 자기이해와 자기평가를 위하여 자신에게 무엇을 뜻하는지를 설명한다. 물론 이 "예술"도 모방이긴 하지만, 자연의 모방이 아니라 신 자신의 무한한 아르스 infinita ars의 모방이다. 이 아르스가 참신하고 자연발생적이고 창조적인 한에서는 그렇지만, 사실상 이 세계를 창조해 온 한에서는 그렇지 않다. "우리 정신의 이념 밖에 있는 숟가락은 표본을 안 갖고 있다." 숟가락이 곧 예술의 고품위 생산품은 아니지만, 절대적으로 새로운 무엇이고, 자연에 미리 주어져 있지 않은 하나의 형상이며, 단순한 "문외한"은 그 형상을 만들어 내는 사람이다. "왜냐하면 나는 여기서 자연의 사물로부터 그 형태를 모방하지 않기 때문이다." 숟가락, 냄비, 접시 등 "문외한"이 만드는 형태들은 순수하게 기술적인 형태들이다. 그리고 그가 이러한 정황에 대해 기뻐하는 단계에서 현대 "산업 디자인"의 기본 특징인 생산품 자체의 부각 단계에 이르는 데에는 더 이상의 도약이 필요하지 않다. 인간은 존재하는 것에서 자신의 지위를 읽어 내기 위하여 더 이상 자연을, 우주를 바라보지 않고, 오로지 인간의 아르스에 의해서 생겨난 사물세계를 바라본다. 우리의 자리에서 또 중요한 것은 이디오타가 자신의 "수행"을 특히 화가와 조각가가 완성하는 것과 대비시킨다는 점이다. 이들은 사물에서 표본을 가져오겠지만, "나는 아니"라고 이디오타는 말한다. 여기서 창조적이고 참신한 인간의 모든 파토스 그리고 모방원칙과의 결별이 예술적 인간이 아니라 기술적 인간에게서 드러난다는 것은 평가할 수 없을 만큼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이 차이점은 아마도 여기에서 처음 실증적으로 강조되고 있을 것이다. 근본적으로 증명서의 가치는 바로 이 점에 있다. 창조적인 것을 입증하려는 이후의 태도, 즉 거의 전적으로 조형예술과 시문학에 집중하는 태도를 현재에도 취한다면 말이다. 거기서 작가가 자기 자신에 대해 그리고 창조하는 자발성에 대해 말하기 시작한다는 것은 중세 말 이후부터는 예술의 출현형식에 속한다. 반면에 기술 정신의 역사에서는 역사 담지자들의 그러한 자기증명서들이 훨씬 빈약하다. [...] 그것은 무엇보다도 기술의 "할 말 없음" 현상이다. [74-76] 

[...] 우리는 쿠자누스의 이디오타를 역사적 지표로 여겨야 하지, 역사를 형성하는 에너지로 여길 필요는 없다. [80] 

-- 양태종 옮김 (2011: 69-124) 


"존재와 자연의 동일성" 문제와 "창조적 인간" 이념 사이의 관계를 "역사의 현상학"으로 탐구한 논문. 최고! 이쯤은 그냥 오지게 재밌는 부분. 밑줄이 민폐. 부분 인용은 실례. 눈부신 해석 수준에 압도된다. 순결한 오라클. 해석의 힘을 무차별로 권력욕에 할당하여 중화하는 시도가 저 아래로 보이는 재미는 덤.  

헤겔을 직접 소화한 학자와 마르크스의 필터로 헤겔을 읽은 학자들의 길이 서로 얼마나 갈리는지 보여 준다. 중고딩 때부터 어찌어찌 지금까지 지식 없이 그저 "직성"으로 느껴 왔던 생리적 거부감의 대상이 특정하게 무엇인지 오늘에야 알게 되었다. 마르크스가 아닌 줄은 독일 이데올로기와 정치경제학비판을 부분이나마 읽자마자 선입관을 깨어 주는 그 지독한 인간주의에 반했기에 첫눈에 알았다. 헤겔도 비슷하다. 최강 난이도라기에 전공자의 개인 번역본과 직강으로 살짝 구경이나 하면서야 굳이 싫달 거리도 없었다. 상호주관성에는 개념 자체보다 그 고투에 어설피 감동받기도 했으니까. 주범이 누구인지 입증해 주는 것 같은 논문을 어렵게 구했던 날의 기억도 생생하고, 명저의 느낌이 나서 답인 줄 알고 서문만 읽은 오지랖도 어언 8년 전이네. 따지면 수십 년 동안 마음 한 켠에 풀리지 않는 실뭉치 같은 걸림돌로 남아 있었는데, 그 정체가 비로소 밝혀지다니, 뜻밖의 감회다. 마치 공범들을 알지만 범행을 밝힐 수 없어 답답했던 미제 사건이 해결된 기분. 그렇다고 지금 다윈을 읽지는 좀 말자. 어차피 내가 아는 정도의 학자 중에 간단한 도식으로 정리될 수 있는 경우는 없으니까. 중요한 건, 인용은 없어도 내 눈에도 읽히는 헤겔까지 멋져 보이게 만드는 하지만 니체와 후썰 정신으로 무장한, 위대한 이 분 블루멘베르크! 


Saturday, May 08, 2021

Martin Heidegger (1957) Der Satz vom Grund 근거율

Martin Heidegger (1957): '인포메이션'은 실제로 현대인에게 가능한 한 빠르고 포괄적이며 명료하게 필요, 욕구, 그에 대한 만족의 확보를 성과 있게 전달하는 보고를 의미한다. 이에 따라 인간의 언어를 정보 도구로 여기는 생각이 점차 우위를 차지하고 있다. 왜냐하면 언어를 정보로 규정하는 것은 사고하는 기계와 거대한 계산기의 설치를 위해 충족되어야 할 근거를 가장 먼저 제공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보는 형식 속에 넣음(in-formieren), 즉 [형식 속에 넣어] 전달하는 것(benachrichtigen, 뒤쪽으로 향함)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정보는 조직하는 일을 한다. 다시 말해 정보는 설치하고 정렬한다(richten ein und aus). 전달로서 '인포메이션'은 이미 인간, 모든 대상, 부속물을 하나의 형식 안으로 들여놓는 장치(Einrichtung)이다. 이 형식은 지구 전체, 나아가 지구 밖의 것에 대한 인간의 지배를 확보하기에 충분한 것이어야 한다. 

'인포메이션'의 형태에는 모든 표상작용을 위해 송달되고 충족되어야 할 근거의 위력적인 원리가 지배하며, 현대라는 세계사적 시대(Weltepoche)를 모든 것이 원자 에너지의 송달에 매달려 있는 시대로 규정한다. 

우리는 성찰적 사유를 준비하기 위해 근대적 인간과 오늘날 인간이 모든 표상작용을 위한 위력적인 근거명제에서 표명되는 요구를 듣고 있는지에 대해 물었다. 이에 대해 우리는 '예'로 대답하고 '어떻게'를 제시하였다. 오늘날 인간은 근거명제에 점차 예속되면서 근거의 근거명제에 대해 지속적으로 귀를 기울이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예속이 들음의 유일한 방식도 아니며, 본래적인 방식도 아니라고 한다면, 우리는 다음과 같이 한 번 더 물어야 한다. 우리는 근거율의 요구를 듣는가? 그러나 지금 우리가 주목하고 있는 것은 언제 비로소 우리가 그 요구를 참으로 듣는다고 할 수 있는가에 대한 것이다. 그것은 우리에게 본래적으로 말을 건네는 것에 대해 우리가 응답할 때이다. 도대체 근거율의 요구 속에 말을 건네는 것이 있는가? 그리고 우리는 위력적인 근거명제가 말하는 곳을 향해 귀를 기울이고 있는가? 우리는 '아니오'라고 고백해야 한다. 어떤 점에서 '아니오'인가? 우리가 명백하고 결정적으로 근거율이 본래적으로 말하고 있는 것을 충분히 듣고 숙고하지 않고 있다는 점에서 그렇다. [305-307] 


우리가 '존재는 근거로서 경험된다'고 말할 때, 사태연관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이 드러난다. 여기에서 근거는 '라치오', 즉 해명(Rechenschaft)으로 제시된다. 

이에 따르면 인간은 해명을 요구하고 해명을 부여하는 생명체, 즉 이성적 동물(animal rationale)이다. 인간은 방금 언급한 규정에 따라 계산적으로 고려하는 (rechnen) 생명체이며, 이때 계산적으로 고려함은 넓은 의미에서 이해된다. 그 의미를 로마상인의 낱말인 '라치오'라는 낱말이 물려받았다. 이 의미는 그리스의 사유가 로마의 표상작용으로 옮겨지는 시기에 있었던 키케로(Cicero)에게서도 이미 등장한다. 

존재는 근거로서 경험된다. 근거는 '라치오', 해명으로 제시된다. 인간은 계산적으로 고려하는 생명체이다. 이 모든 것은 아주 상이한 변천 속에서도 서양 사유의 전체 역사를 통해 일치되는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이러한 사유는 근대적이고 유럽적인 사유로서 오늘날의 세계시대, 즉 원자시대로 세계를 옮겨놓았다. 유럽에서 일어나고 있는 이러한 단순하면서도 섬뜩한 사태연관에 직면하여 우리는 다음과 같이 묻는다. 

위에서 언급한 규정, 즉 인간이 이성적 동물이라는 규정이 인간의 본질을 다 드러내고 있는가? '존재는 근거를 뜻한다'는 말이 존재에 대해 말할 수 있는 최종적인 말인가? 그렇다고 한다면 인간의 본질, 존재에 대한 인간의 귀속성, 존재의 본질은 여전히 계속해서 놀라움을 일으킬 만큼 사유할 가치가 있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그렇다고 한다면 오로지 계산적으로 고려하는 사유의 질주와 그것의 엄청난 성과를 위해 사유할 가치가 있는 것을 포기해도 되지 않은가? 그렇지 않다면 계산적으로 고려하는 사유에 현혹되어 사유할 가치가 있는 것을 지나치는 대신에 사유가 그것에 응답할 수 있는 길을 찾으려고 우리는 애쓰고 있는가? 

물어야 할 것은 바로 이것이다. 그것은 사유가 물어야 할 세계 물음(Weltfrage)이다. 이 물음에 대한 대답에서 이 땅과 이 땅 위의 인간 현존재에서 무엇이 일어날 것인지가 결정된다. [316-318] 

-- 김재철 옮김(2020)  


프레게를 읽은 직후 [동일성과 차이]를 읽었으니 어설피 의분에 빠지지 않을 수 있었겠나. 이만큼 술술 읽히는 건 그토록 열받은 상태로 보낸 세월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부끄럽다고요. 그래도 지금 이런 촉박한 시점에 이 책을 제목만 보고 펼칠 줄 아는 능력이 생긴 게 다 그 덕이라 후횐 없다네. Danke für Ihre Hilfe!  


Secret Garden (2002) You Raise Me Up 
ft. Johnny Loga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