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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turday, February 21, 2026

이달승 (2010) 우정의 글쓰기 Translator's Commentary on Blanchot (1955)

Maurice Blanchot (1955kr2010) <본질적 고독>(L’isolement essentiel) (tr. 이달승) 부분: 

" 고독이라는 말이 가리키고자 하는 것을 우리가 경험할 때, 우리는 예술에 관한 그 무엇을 배우게 되는 것 같다. " [14] 

" 작품이 말하는 것, 그것은 절대적으로 작품은 존재한다는 사실 그것뿐이다. 이것을 벗어나서 작품은 아무것도 아니다. 작품이 그 이상을 드러내 주기를 바라는 자는 아무것도 발견하지 못하고, 그것이 아무것도 드러내지 못한다는 사실을 발견한다. 쓰기 위해서건 읽기 위해서건 작품에 기대어 살아가는 자는 존재한다는 말, 이를테면 언어가 그것을 숨기면서 보호하거나 작품의 침묵하는 공허 가운데 사라지면서 나타나게 하는, 그러한 존재한다는 말밖에 표현하지 못하는 고독에 처해 있다. " [15-16] 


이달승(2010): 알 듯 모를 듯한 의혹 속에는 그 의혹을 풀어야 한다는 이른바 미학적 관심 등과 같은 음란한 조바심이 끼어들기도 하였다. 조바심에 쫓기는 의혹이 매혹으로 다가서지 못하는 것은, 매혹은 원래가 의혹이 낳는 또 다른 의혹 속에 잠겨들 때만 찾아드는 것이기 때문일까. 아마도 벗한다는 것은 의혹을 벗어나 안다는 것과는 다른 일일 것이다. 또 다른 의혹으로의 길을 열어 주는 의혹 속의 앎이라면 모를까, 의혹을 벗어나 안다는 생각이 들면 그것 자체가 벗어날 수 없는 장애가 되기 쉽다. [408] 

 

고독. 홀로 있다는 것은 남들로부터 세계로부터 떨어져 있다는 것이 아니다. 사람이라는 게 이상하다. 다른 사람들과 함께 있을 때는 홀로로서의 나의 윤곽이 그려지기도 하나, 막상 거울 속의 자신을 보듯 자신과 마주친 자신은 그 윤곽이 흐려지기 마련이다. 그래서 홀로 있을 때면 난 내가 여기에 있다고 말하기 어려워지고, 그때 내가 나 자신으로 있기 위해 숨기고 있는 나의 그림자와도 같은 '그 누구'가 나를 맞이하러 오는 것일까. 그렇게, 홀로는 나의 윤곽을 흐리게 하면서 둘이 된 느낌을 갖게 된다. "'내 곁에는 언제나 과다하게 한 명이 더 있어'. 이렇게 은자는 생각하고 있소. '언제나 하나 곱하기 하나 결국에는 둘이 돼! 나와 나는 언제나 지나치게 열띤 대화를 하고 있소'"(니체)  [409] 

 


그러니까, 작품이 고독 자체라 따로 내 고독이 들어갈 공간이 없다. 그 품에서 나는 고독을 잃어 버리고 영 잊고 만다. 자기 우주 밖에 나와 있는 사람이 나라는 우주와 만나 폭발을 일으킬 chance는 없다. 늘 그랬듯 남은 시간도 최대한 이 두 공간만 오가며 보낼 거다. 하나는 너무 많고, 또 하나는 너무 적다. 어느 쪽이든 새로 열리는 무한히 다른 문들이다. 온통 경탄뿐. 

Wednesday, August 20, 2025

about Erasmus

in: 데시데리우스 에라스뮈스(Desiderius Erasmus) 지음, 차기태 옮김, 바보 여신의 바보 예찬(Moriae Encomium; Stultitiae Laus), 서울: 필맥, 2011.

 

차기태(2011): 사실 '비판은 하되 배반은 하지 않는 것'은 쉽지 않다. 세이렌의 유혹으로부터 벗어나는 것만큼이나 어려운 일이다. 한쪽으로부터는 박해와 수난의 위협을 받고, 다른 한쪽으로부터는 기회주의자니 회색분자니 하는 낙인이 찍히기 일쑤다. 때문에 중용의 자세를 지키는 사람은 남다른 고뇌와 갈등을 피해 갈 수 없다. 세상에서 잊히거나 수난과 몰락의 운명을 감수해야 한다. 중용의 길을 걸은 인물 가운데 소크라테스와 토마스 모어는 사형당했고, 에라스무스는 가톨릭과 프로테스타트 양쪽으로부터 비판과 의심을 받았다. 소크라테스는 친지들로부터 탈옥하라는 권유를 받았지만 뿌리쳤다. 백범 김구는 암살당했다. 이렇듯 어느 쪽으로든 치우친 노선을 배격하고 중용의 길을 선택하는 것은 가시밭길을 예약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어찌 보면 이것은 생각이 깊은 사람들 모두의 숙명일지도 모른다. 

에라스무스가 양쪽으로부터부터 외면당할 위험을 감수하면서 중용의 길을 가기로 한 것은 무엇보다 진실에 입각해 생각하고 살아가려는 자세 때문이었다고 생각된다. [278-279] 


말이 아닌 삶에서 중용은 목표가 아닌 유일한 결과들일 뿐이다. 극소수의 눈에만 그렇게 보이는. 

그게 남자의 결과일 때에는 소수의 추종자 모임이 생기기 마련이다. 최소한의 사실들은 이후 그들에 의해 전달되고 기억된다. 그게 여자의 결과일 때에는, 거기에 어떤 결과라고 부를 만한 것은 애초에 남아 있지 않고, 대신 모두가 사형 선고에 찬동하기에 그 중 누구나 때때로 손쉬운 입지에 이르기만 하면 득의양양 살해 시도의 대상으로 삼는 한 사람의 악덕과 평화로운 '결말'의 이야기가 만들어진다. 그리고, 통으로 삭제된다. 요즘은 악덕보다 무능이란 죄목을 붙이는 추세다. 


옮긴이의 헌신과 마음과 도무지 요즘 같지 않게 자기 모습을 담은 글이 감동을 준다. 

  

Saturday, April 13, 2024

Thursday, August 04, 2016

'predicating of' vs. 'belonging in'

predicating of 와 belonging in의 문제





어제 독회에 나갔다가 혼자 다른 방에 있던 바람에 바로 옆에서 삼십 분이나 늦는, 무척 나다운 생쇼를 벌인 덕에 완전 챙겼던 찰칵 두 방! (암흑의 경로에 암흑 뿐인지라 더 귀해졌다. e북 있으면 사고 싶은데 없고. orz) 그래도 구글에 앞부분 상당량의 preview가 있다. (위에 찰칵은 뒷부분이지롱~) 학교 도서관에도 웬일로 있네.

cf. 저자
http://philosophy.columbia.edu/directories/faculty/wolfgang-man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