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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nday, June 13, 2021

complexity : chaos : migma

복잡계 이론과 카오스 이론 사이에는 뚜렷하고도 미묘하거나 부분적으로 무효한 동시에 역사적이고 입법적이며 적용상의 차이가 있다. 전자(비선형 동역학)를 전공한 동문들도 있지만, 후자는 유사과학으로 취급하는 사람도 있다. 그런데 내가 아직 실천적 영역에서 그 경계와 경우들을 섬세하게 구별하지 못하고 있다. 이론적인 기본 차이만 알 뿐인데 더구나 이제야 나에게 본격적으로 중요하게 된 체계 이론에서는 후자의 영향력이 더 크다. 단순히 3년만 더 주시라고 하면 될 문제 같았다면 고민해 봤을 법도 한데, 그러지 못했던 이유다. 세미나는 커녕 토론 상대도 없는 고립된 형편에서 중학생 때부터였다고는 해도 교양 수준을 벗지 못한 자의적 판단만으로 심사용 논문에 반영하는 것은 위험하다. 어차피 할일이라 틈틈이 읽기는 계속하면서도. 오늘도 카우프만을 펼쳤다가 한숨이 나와서 뒤치락거리다 우연히 발견했다. 우리나라에는 재야 과학계라는 것이 거의 없다 하겠지만, 복잡성 이론을 연구하는 대학의 통계물리학자가 카오스 이론을 (아무리 글릭에 의해 대중화된 지 오래라고 해도) 포괄하면서도 표준 과학과 구별하는 방식으로 자기조직화 개념을 심지어 대중을 청자로 두고 강의를 하다니!      

김.범준 2020-11-21 [openLecture@naver] '복잡한' 세상: <확실성의 종말> <혼돈의 가장자리> 

물리학 하는 사람들이 보통 개방성이 강하기는 하지만 이토록 열린 태도는 어려운 만큼 그 자체로 감동적이다. 

카오스와 혼돈의 헬라어가 전혀 다르다는 사실을 어제 비로소 알게 되는 등... 단어 공부에 허우적대기는 어제오늘 일이 아니지만 끝없는 시간 소모에 지쳐 버린 와중이라 더더욱 감사. 처음에 분야별 용어집/핸드북/정전 목록부터 받으면서 차이를 실감한다는 해외 대학 학위자들이 그 차등을 유지하기 위해 담합하는 고의적 전략이라더니, 정말 그런 속셈인 거야? 당사자들이 본인들의 이야기를 해 준다는 것을 여기저기서 들으면서도 설마 여태 그런 수준이랴 의심했었지만. 자신이 얻어 온 것 이상으로 아직도 지원받지 못하고 있던 후학들의 형편을 실감하고 분개하여 필사적으로 끌어올린 오늘날의 이공계 수준. 내가 브레멘에서 음대생이나 미대생들과 달리 동경심이 아닌 우월감을 품었던 것에는 냉정한 현실이 있었을 뿐이다. 그렇게 각자가 연아퀸인 그 개인들을 보다가... 어이없을 뿐이다. 영어 논문만 쓰면서도 이런 마음을 베푸는데, 너무 대조적이면 조금은 안 찔리나? (그런 의미에서도 정암학당은 국가적 보루이다.)  

서울대 교수님 질문 좋고. 존경스러운 뒷이야기를 들은 후광으로 더욱. 

척도의 문제, 척도 없음의 의미의 문제, 학문적 수사법(은유와 매체)의 문제, 표상력의 문제. 모두 나의 문제들이다. 체력도 떨어지고 참고로만 본다고 생각했는데 원치 않게 선명한 거울에 비친 것은 각각 아리스토텔레스/헤겔/장하석, 니체/들뢰즈, 크래머, 비고츠키/해킹/드앤...이라는 다시 나의 첩첩산중 같은 일상 속 조금씩 알수록 더 어려워지는 이름들. 

 

Friday, May 28, 2021

Utilitarianism as philosophical Radicalism 철학적 급진주의로서의 공리주의

가치론의 계보를 통해 니체, 벤덤, 마르크스라는 인물들이 재등장했지만, 댐을 건설할 것도 아니고 쪽배 하나 마련할 셈이라 안 그래도 바다처럼 넓은 강에서 이토록 큰 바위들은 피해 도는 길이 현명하다는 분별 정도는 나도 할 수 있을 줄 알았다. 위치 파악을 할 수 있는 자료들만 찾아 놓고, 아무래도 만약을 대비해서 구해도 놓았지만, 못 이길 유혹은 아닐 줄 알았는데... 굳이 손에 쥐지 않아도 충분할 것 같았던 높은 완성도에 고맙게도 짧기까지 한 역자 박동천(2021) 서문과 저자 엘리 알레비(Élie Halévy, 1901) 서문(전문)에 못지않은 본문의 매끄러움. 영국 공리주의의 이론적 뿌리가 주로 프랑스와 이탈리아 등지의 학자들에 있었음을 문헌적으로 보이고 싶어하는 프랑스인 역사학자의 저술인 점을 염두에 두어야겠지만, 역풍보다 순풍을 불어 주는 힘은 이쪽으로 중딩보다 무식한 나에게 엔진이 된다. 두 달 전 더 이상 홀려 들어갈 시간이 없다고 간신히 덮어 둔 고전 (강준호 옮김)을 결국 다시 펼쳤다. 

Jeremy Bentham (1789): 나는 여전히 내게 필요한 지식을 던져줄 희망이 있는 모든 통로를 추적하고 있었다. 기회가 생길 때마다 나는 처음에 착수했던 문제와 관련된 여러 부문들을 계속 탐구했다. 그 탐구의 이런저런 부문에서 나의 연구는 입법에 대한 전 분야를 망라했을 정도였다. [10] 

'입법' 대신 소프트웨어 기술과 자유의 문제. 이런 수재(21세에 변호사)가 힘들었고 부족하다고 말하는 규모의 작업을 나 따위가 꿈꾸고 있었나? 지극히 일상적인 문제라서 사소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니까 그냥 성실하기만 하면 할 수 있을 거라고. 나는 식탁만 차려 드리려는 거니까. 도마 위에 올려다 드리려는 거니까. 아니면 부엌에 CCTV를. 분신이 두 마리만 있었으면 좋겠다. 인지언어학, 입증이론, 양자역학, 체계이론, ... 3월 말에 이제 4년만 더 주시면 되겠다고 하고 싶었지만... 오리알 신세인 게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 때도 있네.   

Halévy: 모든 공리주의 철학자가 그렇듯이, 벤담의 목표는 도덕학을 하나의 엄밀한 과학으로 확립하는 데 있었다. 그러므로 그는 인간의 영혼에서 가장 쉽게 측정될 수 있는 느낌을 추려내고자 했다. [34] 엘베시우스와 베카리아의 제자는 사악한 법률을 공중에게 해를 끼치는 방향으로 해석하는 직업을 통해서 돈을 번다는 데 이미 저항하고 있었던 것이다. [62] 벤담이 바라봤던 목표는 도덕과 입법의 기술을 인간형태에 관한 하나의 객관적 과학을 토대로 삼은 위에 최초로 설립하는 데 있었다. 공리의 원리는 도덕 설교자의 주관적 선호가 아니라 인간 본성에 관한 객관적 법칙의 표현이라는 점에서 여태까지 꼬리를 물고 제창되어 온 여타 도덕적 격언과는 다르다. [67-68]

Bentham: 입법 과학(legislative science)에는, 수학과 마찬가지로 왕도도 총독의 문도 없다. [24]

신자유주의, 이기심-이타심 논쟁으로 이어지는 역사의 흐름에 조심해야 하고, 답을 주는 것은 아니지만, 나의 고민을 함께해 주는 건 오늘도 미학 밖에 있구나. 가치이론이란 다분히 인위적인 영역 구분을 몰랐다면 어쨌을 뻔. 무섭고 외로웠어요. 

페이스북과 네이버가 "알고리즘"이라는 이름으로 정보 통제권을 휘두르고 있으니 말이다. 구글과 머스크가 "인공지능"이라는 이름으로 지금 내 기분이 어떠한지 결정하려 한다. 네트워크가 왕도가 되었고 플랫폼 기업들이 총독의 문이 되었다. 단순히 그러지 말라고 항의하는 것은 투정밖에 안 된다. 차단과 불매로는 자기만 피해를 입게 되었다. 월든은 선택이고 실험이어야지 유배나 위험이 되어서는 안 된다. 수학을 수학으로 깰 필요가 생겼다. 벤덤 사후에야 우리는 수학이 초월적이지도 중립적이도 않음을 알게 되었다. 그러니까 무엇을 그 수학적 대상으로 삼고 어떤 수학적 도구를 쓸지 판단하고 비평할 수 있는 것은 수학도 논리학도 물리학도 정보이론도 아니고 각종 인문학이다. 그 전문가들은 자신의 귀빈석을 직접 주문해야 한다. 수정안도 대안도 보안책도 친절히 명령해 주어야 한다. 그러한 자잘한 수고 대신으로 이전과는 달리 투쟁할 필요가 없지 않나. 모든 자동화 기술에는 다름 아닌 그 기술적 필요에 따라 supervisor의 자리가 있으니까요. 좀 차지해 주세요. 마음에 들면 칭찬하고 안 들면 질책해 주세요. 자애롭게 구경만 하시지 말고. 살릴 것과 죽일 것을 여태 갈고 닦으신 저마다의 성미대로 좀 골라 주세요. 적응하고 통찰하시느라 바쁘지 말고. 가장 까다롭고 변덕스러울수록 가장 자격이 있으니까요. 오퍼레이터의 소원이다.   

이제 또 자학의 주말이 시작되려 한다. 

Saturday, May 08, 2021

Martin Heidegger (1957) Der Satz vom Grund 근거율

Martin Heidegger (1957): '인포메이션'은 실제로 현대인에게 가능한 한 빠르고 포괄적이며 명료하게 필요, 욕구, 그에 대한 만족의 확보를 성과 있게 전달하는 보고를 의미한다. 이에 따라 인간의 언어를 정보 도구로 여기는 생각이 점차 우위를 차지하고 있다. 왜냐하면 언어를 정보로 규정하는 것은 사고하는 기계와 거대한 계산기의 설치를 위해 충족되어야 할 근거를 가장 먼저 제공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보는 형식 속에 넣음(in-formieren), 즉 [형식 속에 넣어] 전달하는 것(benachrichtigen, 뒤쪽으로 향함)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정보는 조직하는 일을 한다. 다시 말해 정보는 설치하고 정렬한다(richten ein und aus). 전달로서 '인포메이션'은 이미 인간, 모든 대상, 부속물을 하나의 형식 안으로 들여놓는 장치(Einrichtung)이다. 이 형식은 지구 전체, 나아가 지구 밖의 것에 대한 인간의 지배를 확보하기에 충분한 것이어야 한다. 

'인포메이션'의 형태에는 모든 표상작용을 위해 송달되고 충족되어야 할 근거의 위력적인 원리가 지배하며, 현대라는 세계사적 시대(Weltepoche)를 모든 것이 원자 에너지의 송달에 매달려 있는 시대로 규정한다. 

우리는 성찰적 사유를 준비하기 위해 근대적 인간과 오늘날 인간이 모든 표상작용을 위한 위력적인 근거명제에서 표명되는 요구를 듣고 있는지에 대해 물었다. 이에 대해 우리는 '예'로 대답하고 '어떻게'를 제시하였다. 오늘날 인간은 근거명제에 점차 예속되면서 근거의 근거명제에 대해 지속적으로 귀를 기울이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예속이 들음의 유일한 방식도 아니며, 본래적인 방식도 아니라고 한다면, 우리는 다음과 같이 한 번 더 물어야 한다. 우리는 근거율의 요구를 듣는가? 그러나 지금 우리가 주목하고 있는 것은 언제 비로소 우리가 그 요구를 참으로 듣는다고 할 수 있는가에 대한 것이다. 그것은 우리에게 본래적으로 말을 건네는 것에 대해 우리가 응답할 때이다. 도대체 근거율의 요구 속에 말을 건네는 것이 있는가? 그리고 우리는 위력적인 근거명제가 말하는 곳을 향해 귀를 기울이고 있는가? 우리는 '아니오'라고 고백해야 한다. 어떤 점에서 '아니오'인가? 우리가 명백하고 결정적으로 근거율이 본래적으로 말하고 있는 것을 충분히 듣고 숙고하지 않고 있다는 점에서 그렇다. [305-307] 


우리가 '존재는 근거로서 경험된다'고 말할 때, 사태연관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이 드러난다. 여기에서 근거는 '라치오', 즉 해명(Rechenschaft)으로 제시된다. 

이에 따르면 인간은 해명을 요구하고 해명을 부여하는 생명체, 즉 이성적 동물(animal rationale)이다. 인간은 방금 언급한 규정에 따라 계산적으로 고려하는 (rechnen) 생명체이며, 이때 계산적으로 고려함은 넓은 의미에서 이해된다. 그 의미를 로마상인의 낱말인 '라치오'라는 낱말이 물려받았다. 이 의미는 그리스의 사유가 로마의 표상작용으로 옮겨지는 시기에 있었던 키케로(Cicero)에게서도 이미 등장한다. 

존재는 근거로서 경험된다. 근거는 '라치오', 해명으로 제시된다. 인간은 계산적으로 고려하는 생명체이다. 이 모든 것은 아주 상이한 변천 속에서도 서양 사유의 전체 역사를 통해 일치되는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이러한 사유는 근대적이고 유럽적인 사유로서 오늘날의 세계시대, 즉 원자시대로 세계를 옮겨놓았다. 유럽에서 일어나고 있는 이러한 단순하면서도 섬뜩한 사태연관에 직면하여 우리는 다음과 같이 묻는다. 

위에서 언급한 규정, 즉 인간이 이성적 동물이라는 규정이 인간의 본질을 다 드러내고 있는가? '존재는 근거를 뜻한다'는 말이 존재에 대해 말할 수 있는 최종적인 말인가? 그렇다고 한다면 인간의 본질, 존재에 대한 인간의 귀속성, 존재의 본질은 여전히 계속해서 놀라움을 일으킬 만큼 사유할 가치가 있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그렇다고 한다면 오로지 계산적으로 고려하는 사유의 질주와 그것의 엄청난 성과를 위해 사유할 가치가 있는 것을 포기해도 되지 않은가? 그렇지 않다면 계산적으로 고려하는 사유에 현혹되어 사유할 가치가 있는 것을 지나치는 대신에 사유가 그것에 응답할 수 있는 길을 찾으려고 우리는 애쓰고 있는가? 

물어야 할 것은 바로 이것이다. 그것은 사유가 물어야 할 세계 물음(Weltfrage)이다. 이 물음에 대한 대답에서 이 땅과 이 땅 위의 인간 현존재에서 무엇이 일어날 것인지가 결정된다. [316-318] 

-- 김재철 옮김(2020)  


프레게를 읽은 직후 [동일성과 차이]를 읽었으니 어설피 의분에 빠지지 않을 수 있었겠나. 이만큼 술술 읽히는 건 그토록 열받은 상태로 보낸 세월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부끄럽다고요. 그래도 지금 이런 촉박한 시점에 이 책을 제목만 보고 펼칠 줄 아는 능력이 생긴 게 다 그 덕이라 후횐 없다네. Danke für Ihre Hilfe!  


Secret Garden (2002) You Raise Me Up 
ft. Johnny Loga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