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ursday, April 08, 2021

Arnold Schönberg (1913) Die gluckliche Hand, Op.18

Arnold Schönberg (1913) Die gluckliche Hand, Op.18 
 The Simon Joly Chorus + Philarmonia Orchestra conducted by Robert Craft
Koch International Classics,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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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odor W. Adorno (1949/1975): 해명되지 않은 것을 해명되지 않은 채 놓아둠으로써 <행복한 손>에서 나타나는 카오스적인 측면은 가상과 유희에 반대하는 입장을 보이는 쇤베르크의 지적 성실성이다. 그러나 카오스의 현실은 전체 현실이 아니다. 카오스의 현실에서는 교환사회의 법칙이 출현하며, 이 법칙에 따라 교환사회는 맹목적으로, 그리고 인간의 머리 위에서 재생산된다. 이 법칙은 다른 사람들을 제멋대로 다루는 권력의 지속적인 증가를 포함하고 있다. 세계는 가치법칙과 집중에 의해 희생당하는 사람들에게는 카오스적이다. 그러나 세계는 "그것 자체로서는" 카오스적이지 않다. 세계를 지배하는 원리가 혹독하게 짓밟는 대상인 개별 인간만이 세계가 카오스적이라고 생각할 따름이다. 개별 인간에게 세계가 카오스로 나타나게 만드는 폭력들이 종국적으로는 카오스의 재조직을 떠맡는다. 카오스는 폭력이 만들어내는 세계이기 때문이다. 카오스는 코스모스의 기능을 갖고 있으며, 질서에 앞서서 나타나는 무질서이다. 철학에서 카오스와 체계가 함께 속해 있듯이, 사회에서도 카오스와 체계가 함께 속해 있다. 표현주의적으로 나타나는 카오스의 한복판에서 구상된 가치 세계는 기세를 올리면서 떠오르는 새로운 지배의 특징들을 담지하고 있다. <행복한 손>의 그 남자는 노동자들과 마찬가지로 연인도 거의 보지 않는다. 그는 자기 자신에 대해 갖는 연민을 정신의 비밀스런 왕국으로 끌어올린다. 그는 이 왕국의 우두머리이다. 그의 강력한 힘은 음악에서, 그의 나약함은 가사에서 효과를 발휘한다. 그가 대변하고 있는 사물화 비판은 바그너의 사물화처럼 반동적이다. 그의 사물화 비판은 사회적 생산관계들을 향하고 있지 않으며, 분업을 향하고 있다. 쇤베르크에게 고유하게 나타나는 사물화 비판의 실제는 이러한 혼동으로 인해 병들어 있다. 쇤베르크는 음악에서 고도로 특화된 지식을 문학적인 시도를 통해 보완하려고 하였지만 바로 문학적인 시도에 의해 쇤베르크의 사물화 비판의 실제는 중압감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여기에서 또한 바그너적인 경향이 붕괴되고 있다. 바그너의 종합예술작품에서 예술적 생산과정의 합리적인 조직을 통해 아직도 응집되어 있고 이렇게 해서 바그너 작품의 진보적인 요소를 유지시켜 주던 것이 쇤베르크에서는 괴리되면서 산산조각이 난다. <행복한 손>의 남자는 기존의 질서에 경쟁자로 등장하면서도 기존의 질서에 충실하게 머물러 있다. 그는 다른 사람들보다 "더욱 간단하게 그렇게 할 수 있는" 것이다. 쇤베르크가 작품에서 창조한 남자는 "터키 사람들의 수급 2개를 매단 밧줄을 허리띠처럼 몸에 두르고", "칼집에서 빼든 피 묻은 칼을 손에 들고 있다." 그에게는 이 세계에서 이처럼 잘못된 일이 생기고 있지만, 그는 그럼에도 힘을 가진 사람이다. 그의 목덜미를 물어뜯고 있는 불안이라는 괴물은 그에게 복종을 강요한다. 무력한 자는 자신의 무력함과 스스로 타협을 하면서 그에게 자행된 불의를 다른 사람들에게 자행한다. 이러한 행동을 하는 그 남자는 역사적으로 이중의 의미를 갖고 있다. 무대를 "기계기술자의 작업장과 대장장이의 작업장의 중간 정도로 꾸미라는" 연출자의 지시만큼 그 남자가 갖고 있는 역사적 이의성(二義性)을 정확하게 지적해 주는 것도 없을 것이다. 새로운 즉물성의 예언자인 주인공은 — 장인(匠人)으로서 — 옛 생산방식이 갖고 있는 마력을 살려내야 한다. 쓸모없는 것을 거부하는 그의 단순한 몸동작은 왕관을 생산하는 데 도움이 된다. 그가 귀감으로 삼고 있는 지크프리트는 최소한 칼을 만들어냈다. "음악은 장식적이어서는 안 된다. 음악은 진실하여야 한다." 그러나 예술작품은 다시 오로지 예술만을 그 대상으로 삼는다. 예술작품은 자신이 사회적으로 속해 있는 현혹의 상호연관관계로부터 예술적 탈출을 감행하지 않을 수 없다. 극단적으로 소외된 절대적 예술작품은 실명 상태에 빠진 채 오로지 자기 자신에 대해서만 동어반복적으로 관계를 가질 뿐이다. 예술작품의 상징적 중심은 예술이다. 이렇게 해서 예술작품은 공허해진다. (문병호 옮김, 2012: 79-81)


카오스를 폭력으로, 질서를 이성(합리적 체계성)으로, 사회학적으로 해석한 다음 자신의 역사적 변증법을 적용하는 듯. 신기하다. 카오스를 무조로, 질서를 화음으로, 음악적으로 해석한 다음 역시 자신의 역사적 변증법을 사회학적으로가 아니라며 양식사학적으로가 아닌 예술철학적으로 적용한다. 하나의 음에도 음 전체의 상태를 내포하는 역사가 있단다. 이건 멋지다.       

그래도 프랑크푸르트 학파 쪽으로 들어갈 거 아니라서 얼마나 다행인지.  

버밍엄 쪽 아님을 알기 전부터 이미 알고 있었다. 구조주의 쪽은 확실히 아님도 지원하기 훨씬 전부터 알고 있었다. 나의 원망이 언제부터 왜 생겼기에 뒤늦게 부활했는지 모르시겠지. 꿈에 왕림하셨다. 혼비백산했다. 드물게 현실적인 꿈이었다. 아직 안 괜찮다. 현실이 더 무서운 것 같아서. 

하여튼 '행복한 손'보다는 '행운의 손'으로 옮기는 것이 더 맞을 것 같다. 

사이버네틱 아트에서 백남준을 뺄 수는 없다. 몰르와 교류했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슈투트가르트에서는 음악은 안 했나 보다. 다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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