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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nday, January 07, 2024

Brunello Cucinelli, A Philosopher-Designer 철학자/디자이너 브루넬로 쿠치넬리

김홍기 @월말김어준(2023년 12월): Brunello Cucinelli, A Philosopher-Designer 
캐시미어 제왕 브루넬로 쿠치넬리의 "인본주의적 자본주의" (후략)




Brunello Cucinelli on Humanistic Capitalism in an Age of AI
VOICES2023 | The Business of Fashion


At BoF VOICES 2023, the Italian designer spoke about the balance required to run an ethical fashion business while embracing new technologies. 

Since 1978, Brunello Cucinelli’s namesake brand has been a standard-bearer for both luxury clothing and a more responsible way of doing business. At a time of great change, Cucinelli believes that businesses must strike a balance between embracing technological innovation that could threaten livelihoods, like AI, to push creativity forward while also keeping  humanity at the heart of business. 

“I believe in a kind of contemporary way of capitalism. We are a listed company. We do want to make a profit, but a fair profit at that. There should be a balance between profit and giving back,” he explains. 

Key Insights: 

- Cucinelli’s approach to labour is guided by his working-class upbringing and seeing his father was demeaned and belittled at work. “I saw tears in his eyes and that was my source of inspiration to have a completely different vision of the world,” he says. “I wanted my human beings to be surrounded by pleasant places. I wanted them to make handsome money. And I wanted them to be treated like thinking souls.” 

- This philosophy of ‘humanistic capitalism’ also extends to customers. “We need to redress the balance. Shoppers want to know exactly where a specific item has been made, how it's been made, whether creation has harmed it along the process. We need a new social contract with creation,” he explains. 

- Mr Cucinelli believes artificial intelligence offers both solutions and challenges. “Technology is a blessing from creation, but sometimes it steals the soul that creation bestowed upon us,” he says. However, he adds, when used correctly, “AI will be just a partner for us, and we will rediscover the value of truth and human beings.” 

When it comes to planning for the future of his company, Cucinelli hopes his successor will share his humanistic ethos. “I would like my company to still be there for the coming 100, 200 years. And I would like whoever runs it to keep believing in a contemporary capitalism, to make a fair profit while respecting human beings and creation.”



Saturday, June 18, 2022

Albert Camus

[高省芳歌] 알베르 카뮈의 '페스트' - 2/4편
고려대학교 문과대학 2021-11



완전 우연히 업로드 직후 보게 되었고, 그 사이 서너 번은 본 것 같은데 또 새로우니 문제롤세. 이러니 훨씬 더 빠르신 평소 속도로는 잘 해야 20% 정도만 입력된다. 내가 말하는 속도가 유달리 느려서 도저히 적응이 안 된다. 마님이 희귀하게 만족하신 명강의. 심지어 인용도 하신다. 전무후무. 나도 처음 자연히 'complete edition'이라는 단어가 떠올랐다. 그리고 관계적으로는 절대 몰랐을 뻔했던 것을 조금 이해하게 되었다. 인내로 인한 소모가 심하시리라는 것.  

나의 첫 카뮈는 고2 때 아마 조금 남달리 최초의 인간이었다. 문과는 어떤지 몰라도 95%가 의대 지망인 여고 이과반에서 이러고 살았다는 것은 나의 생활이 입시 준비와는 무관한 파탄 상태였다는 방증례라 하겠다. 하지만 음전한 기질을 타고난 나에게 공부 좀 하라며 등짝을 후려칠 정도의 친구가 되기 위해서는 나에 대한 호감이 특별히 강하고 예리한 관찰력이 있어야 한다는 난관이 있었다. 물론 옛날 얘기고, 요즘은 논술 대비로 나도 완독한 게 없는 헤겔 정도는 읽어 줘야 하는 것 같았다. 난 기억력이 나쁘지만 몇 장면(에서의 나의 감정과 생각들)은 아직 생생하다. 하지만 난 그에게 특별한 문학적 재능은 없다는 사실에 많이 놀랐다. 그 정도로 유명한 작가에게서 그런 느낌을 받았던 적은 지금까지도 없으니까. 심지어 그는 초등학교 은사와도 친한 사이였던 것 같지는 않았다. 어휘가 늘어나는 시기에 자유로운 대화가 가능한 상대가 없었다는 한계를 극복할 수 있는 인간은 없다는 것이 나의 지론이다. 디킨스? 그에게는 신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상대가 꼭 인간 생물일 필요는 없으니까. 사실 불후의 작가들에게는 그 상대가 대체로 책이 아닌가? 카뮈는 책과 거리낌없이 놀면서 보낸 시간이 별로 없었다는 것은 확실히 알 수 있다. 많이는 읽었을 텐데, 아마 그 교사에게처럼 긴장하고 삼가하고 물러서 있는 심정으로 진행된 경험이 아니었을까? 그의 재능은 학자적인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3 때 연극에 대한 편애와 소재에 대한 역사적 지식으로 인해 조금 기대를 가지고 읽었던 희곡집에 너무 실망하여 다시는 그를 읽지 않을 뻔했다. 코로나 바이러스가 아니었다면. 내 사랑 체호프와 비교하기도 민망했다. 좀 연도를 생각하자. 물론 노벨 문학상이 아니었다면 굳이 불평할 이유는 없었을 테지.

재작년에 지구적 사태로 인해 페스트를, 그렇지만 나의 상황으로 인해 야금야금 무려 두 달에 걸쳐 읽었지만, 대표작들을 하나도 읽지 않았으니 길게 할 말은 없다. 가장 의미 깊다고 생각한 것은 역사적 유비 때문만이 아니라도 다층적인 체육관 장면이었고. 첫 등장부터 애착을 느꼈던 그랑에 대한 작가의 시선으로부터 받은 위안과. 그래도 문학적이라기엔 너무 기계적으로 교훈적이다. 작품 안에서 모든 장치들과 기능들에 대한 직설적인 자기 해설까지 온전히 끝내 버리고 있다. 배운 용어로, 눈이 시릴 정도로 투명하다. 철학적 우화. 설교집. 

사정들로 인해 긴장을 풀려다가 너무 풀어 버린 후 복구가 안 되어 우울증이 생긴 것 같아 긴장 해소용 아닌 발생용 몸부림. 

  

Saturday, November 13, 2021

Alain Supiot (2010) L’Esprit de Philadelphie

Alain Supiot (2019): 이처럼 자신의 전통을 현대성의 동력으로 삼으려면 자신만이 가지고 있는 고유함을 파악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산업혁명 이래 제국주의에 잘 저항했던 나라들은 스스로를 파괴하거나 예속시키지 않으면서도 서양 근대성의 일부를 제 것으로 삼을 줄 알았다. 한국은 그중 하나다. 타인을 이해하기 위해 노력할 때 자기 자신을 좀 더 잘 이해할 수 있는 기회가 생긴다. 다양한 문화 사이에 가교를 놓고 가능한 한 많은 사람에게 이방인의 관점을 이해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기 위해 애쓰는 뱃사공 역할이 소중한 까닭도 여기에 있다. 

-- 박제성 옮김(2019: 6) 


"각 분야 학자들에게는 주문서를, '시민'들에게는 초대석을, 입안자와 감독자들에게는 근거 자료를, 개발자들에게는 지침을, 기획자와 운동가들에게는 어휘를"을 묵언의 모토로 간직하고 다리만 놓으려는 내가 내용이 있는 격려를 받은 건 십 년 만에 처음이다. 이 신기한 엽기의 세계 속에 부디 적응되지 말고 일시적 동기화만 이루기를. 생존 가능할 무수한 길들로 애써 빠져 나왔다가 도로 생존할 수 없는 꼭 하나의 길로 다시 들어가는 대신 얻은 욕구 충족은 그 소원을 이미 성취한 것으로 깔끔하게 끝내길. (나의 욕구를 위해 나의 생존을 포기하다니, 난 나한테 너무 헌신적이야.) 그렇게 아직도 보내고 있는 시간의 끝자락에서. 

함부로 옮겨 놓기엔 아까울 만큼 정신의 체취가 뚝뚝 묻어난다. 존경하는 사람은 많지만 사표가 생긴 건 오랜만이다. 더구나 뜻밖이라 얼떨떨. 다 돌아가셔서 그간 가슴에 못들이 박힌 채 힘들게 지냈어. 공통점은 항상 다른 분야, 계층의 인물이었다는 것. 이제 살 것 같아져서 얼마나 외로웠는지 느끼게 되었다. 

그리고 이방인의 눈들을 갖도록 해 주는 것이 바로 문학의 힘이라고 생각한다. 우리 모두 아르고스, 아니 무한 개의 드론 카메라가 되자.  

난 불만만 많을 뿐 보수적이다. (그러니까 실제 정체는 이중스파이 지망생인 셈?) 이 책으로 확실히 노선까지 맞음을 확인하게 되어서 기쁘다. 직속 제자인 역자의 무서운 안목. 21세기에는 자기 스승 제대로 고르는 능력이야말로 비기의 시작이 아닌 완성 자체다.   

 

Alain Supiot (2010): 오늘날 세계는 경제를 인간의 필요에 일치시키고 금융을 경제의 필요에 일치시키는 대신 경제를 금융의 요구에 일치시키고 인간을 경제에 복무하는 "인적 자본"으로 취급한다. 

이 작은 책자의 목적은 1914~1945년 시기의 경험에서 얻은 사회적 교훈들을 망각한 것으로 보이는 이 거대한 반전을 분석하는 것이다. 그러나 또한 "모든 인간이 인종 · 신앙 · 성별과 상관없이 자유와 존엄과 경제적 안정 속에서 그리고 평등한 기회로써 자신의 물질적 진보와 정신적 발전을 추구할 권리"(필라델피아 선언)를 갖는 세상에 대한 이상을 포기하지 않은 모든 사람에게 필라델피아 정신은 여전히 유효하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도 이 책의 목적이다. 

-- 박제성 옮김(2019: 29-30)



Wednesday, November 03, 2021

Alain Supiot (2015) Governance by numbers

박제성 (2019): 그러나 강자의 지배와 약자의 굴종은 자연의 본성도 아니고 사회의 법칙도 아니다. 인간의 숙명 따위는 더더욱 아니다. 그것은 법이 있어야 할 자리에 법은 없고 힘만 있을 때 나타나는 모습이다. 왜냐하면 법은 힘과 힘의 관계를 법과 법의 관계로 전환시키는 기술이기 때문이다. 법은 권력의 도구이기는 하지만, 또한 권력 그 자체를 구속하는 도구이기도 하다. 법은 권력이 권력을 행사하기 위하여 스스로 자신의 목에 걸어 놓은 올가미이다. 법이 강자의 손을 들어 줄 때가 많지만, 그렇다고 법이 없는 상태가 약자에게 더 유리한 것은 결코 아니다. 힘이 모든 관계와 질서의 기준이 될 때 강자는 약자의 말에 귀를 기울일 이유가 전혀 없다. 강자는 자신의 힘에 근거하여 약자의 생명과 재산을 마음대로 약탈할 수 있다. 힘이 준거인 사회에서 약자는 힘이 없다는 바로 그 이유 하나만으로 어떠한 항의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법이 준거가 되는 사회에서는 강자도 자신의 힘을 법에 근거해서 사용하지 않으면 안 된다. 강자가 법을 위반하면 약자는 법에 근거해서 강자의 힘을 물리칠 수 있다. 힘이 아니라 법으로 이기는 것이 중요한 이유는, 힘으로 이기는 것은 강자의 힘보다 더 강한 힘을 갖고 있는 약자(?)에게만 유효하지만, 법으로 이기는 것은 모두에게 유효하기 때문이다. [7]

노동은 생존의 필연성과 관려되어 있기 때문에 지배와 종속의 위험이 다른 영역보다 더 크다고 할 수 있다. 수치를 모델로 삼는 오늘날의 기업이 노동을 비용으로 취급하여 노동자의 안전과 존엄성을 무시할수록 그러한 위험은 더욱 커진다. 그러므로 수치의 위험성을 경고하고 해법을 모색할 수 있는 가능성이 상대적으로 더 큰 곳도 노동의 영역일 것이다. 알랭 쉬피오에 따르면 그것은 "진정으로 인간적인 노동체제"를 실현하는 것이다. 인간적인 노동이란 고용, 임금, 안전 등 노동을 이행하는 조건들이 인간적이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할 뿐만 아니라, 나아가 노동 그 자체가 인간적인 것이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은 인간의 가장 본질적인 속성을 보장할 수 있는 노동일 것이다. 그것은 곧 말이다. 인간은 무엇보다 먼저 말하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노동자는 자신의 노동에 대해서, 자신의 노동을 통해서, 자신의 노동을 위해서 말할 수 있어야 한다. [7-8] 


공부하는 이유 나랑 똑같은 사람 처음 보네. 어떤 전공이든 어떤 전공도 아니든, 소비자이든 피고용인이든, "말할 수 있게" 해 놓기 위해서다. 오직. 소프트웨어는 가상세계가 아니다. 뚜껑 열라고. 

계산은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기계는 아무것도 '알아서' 하지 않는다. 알아서 하는 '인공지능'이란 없다. 의철학과 법철학이 우선이지만 훌륭한 전문가들에 의해 이미 잘 진행되어 온 것으로 안다. 그리고 이제 우리 보통 사람들의 생활은 생명, 생존, 평등의 문제보다 사소한 것들에, 이래도 되고 저래도 될 것 같다고 생각되는 것들에 적어도 시간상으로는 더 많이 종속되어 있다. 편리, 재미, 취향, 자극, 감동, 교제, 공유, 자기개발, 휴식 등의 이름으로. 알고리듬이 아니라 실은 특정 기술 투자자와 광고주들의 편협한 의사에 의해. 인권에 대해 고민한다면 훨씬 더 섬세해져야 한다. 비판적 문제 제기와 대안에 정당성을 제공한다는 연구 활동이 분과학문들에 갇혀 직업 사회에 머물러 있는 동안 현실에 너무 뒤처졌다. 


Alain Supiot (2015): 숫자에 의한 협치 또는 수치(數治)가 법의 지배를 전복시키는 현상은 계산을 통해서 조화를 꿈꾸는 오래된 역사의 일부로서, 그 가장 최근의 버전이라고 할 수 있는 디지털 혁명은 현대의 상상력을 지배한다. 이 사이버네틱스의 상상력은 입법이라는 용어가 아니라 프로그램이라는 용어로 규범성을 사고한다. 사이버네틱스 세계의 인간은 법이 정하는 테두리 안에서 자유롭게 행위하는 인간이 아니라, 할당된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 외부에서 주어지는 신호에 실시간으로 반응하는 인간이다. [27] 

경제학의 관점에서 볼 때 고문 금지는 다른 가치들과 비교해 그 경중을 가늠해야 한다. 리처드 포스너는 "판돈이 충분히 크다면, 고문도 허용될 수 있다"는 생각을 옹호하는 많은 미국 법률가의 목록에서 첫줄에 있던 사람이다. 여기에서 사회적 효용 계산은, 저울의 한쪽에는 고문 금지를 정당화하는 테러 용의자의 존엄성을 올려놓고, 다른 쪽에는 테러로 인해 희생당할지도 모르는 수많은 사람들의 피해 가능성을 올려놓은 다음 양쪽의 무게를 재는 식이다. '핸드의 공식'을 여기에 적용할 수 있다. 만약 수감자의 존엄성에 대한 침해 비용이 100이고, 테러가 발생할 가능성이 0.1 그리고 이로 인해 피해의 예상 금액이 100만이라면, 계산서는 금방 나온다. 수감자를 고문하는 것이 사회적 효용이 더 크다. 사르트르의 [닫힌 방]에 나오는 주인공처럼, 이제 이것만 물어보면 된다. "말뚝, 철망, 가죽깔때기는 어디 있는가?" 

이처럼 존엄성을 계량할 수 있는 가치로 환원하고 다른 가치들과 비교해 경중을 재는 방법론은 유럽사법재판소에 의해 채택되었다. 우리의 탈근대주의 법학자들과 달리, 판사는 존엄성 원칙을 법의 무대에서 배제할 수 있는 권리를 당당하게 천명할 수 없다. 판사는 실정법이 인정하는 법적 가치를 고려해야만 한다. 하지만 판사는 리처드 포스너와 같은 잣대로 법적 가치를 계량할 수 있다. 즉, 모든 것은 판돈의 크기에 달렸다. 바꿔 말하면, "이제 등가성이 물신화된다". 유럽사법재판소는 바이킹(Viking) 판결에서, 인간의 존엄성에 대한 존중은 비례성의 원칙에 따라 경쟁의 자유, 상품과 자본 유통의 자유 및 서비스 제공의 자유와 "조정"되어야 한다고 판시했다. [210-211] 

확실히 여기에서 비례성의 원칙을 적용한다는 것은 모든 종류의 규칙을 효용 계산으로 환원하고, 불가침의 법이라는 관념을 논증 과정에서 제거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이 불가침성은 독일 기본법에서 인간의 존엄성이 갖는 특징으로 규정하고 있는 것이다. 모든 종류의 원칙을 상대화하는 경향에 맞서는 몇 안 되는 법원들 가운데 하나가 독일 연방헌법재판소라는 사실은 그러므로 놀라운 일이 아니다. 독일 연방헌법재판소에 따르면, "공권력에 자유롭고 평등하게 참여할 수 있는 권리는 인간의 존엄성에 닻을 내리고 있기 때문에 ...... 민주주의의 원칙을 다른 가치들과 비교, 계량할 수 없다. 그것은 불가침의 원칙이다." [독일 연방헌법재판소, 2009.6.30., 2 BvE 2/08 결정, 리스본 조약, §211 및 216.] 

존엄성에 관한 법적 논쟁에 잠시 끼어든 것은, 법경제학이 "모든 가격을 초월하는 것"을 계산할 수 없기 때문에 이 문제를 처리하기 위해서는 어쨌든 그것에 가격을 부여하는 쪽으로 이끌려 간다는 점을 보여주기 위해서 필요했다. 전체주의적 시장에서는 가격이 없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 것과 같다. [211-212] 

-- 박제성 옮김(2019) 

 

내 동기를 알아볼 수 있는 분이 필요했다. 답을 줄 사람이 아니라. 그리고 내 수행이 목표에 얼마나 모자라는지, 어긋나지는 않는지 나보다 몇 층 아래에서 그리고 몇 층 위에서 다시 봐주실 수 있는 분. 그러니까 학위 다음부터가 더 중요했다. 닫힌 방, 이제야 책장에는 있지만 읽지 못했다. 독일법, 자세히는 몰라도 토양을 선택할 수 있다면 그 나라였다. 난 내가 선택할 수 없는 것에는 별로 관심이 없다. 내가 선택하는 것들에 집중하느라. 다만, 그러다 보니, 다른 사람의 선택도 내 것처럼 중시할 뿐. 

그렇게만으로는 안 된다는 것은 알겠지만... 

   

Thursday, July 22, 2021

Kim, HongBin, the "fingerless maverick"

의지의 기적에 자연의 기적이 응답해 주기를 빌고 빈다. 

    Sumaira Jajja @Dawn 2021-07-20: Hope fades for missing South Korean amputee climber on Broad Peak 

파키스탄에서는 사람이 기사를 쓰는구나. 이미 결론을 내리고 있는 것은 보기 괴롭지만. 그런데 기자가 가정한 대로 대장과 도착한 러시아 구조팀 사이에서의 언어 문제가 문제가 되었을 것 같지는 않다. 베테랑들끼리. 추락의 충격으로 몸과 장비에 문제가 생겼겠지. 장애 상태에 대한 정보는 김홍빈이란 이름만으로 그들 사이에서는 충분했을 것 같은데, 우리 캠프에서 구조팀으로 요청 장비(주마 2대와 무전기)의 내용이 전달되지 못했던 것이 아닌지? 상황이 너무 잔인해 뉴스 찾기가 무서웠지만, 한국인들 댓글들이 더 끔찍해서, 다른 언어들로 검색하게 되었다. 

"Kim 'the fingerless maverick' went on to do what he loved the most — climb mountains, test the human spirit and overcome adversity."

어릴 때는 나도 '매버릭'처럼 될 거라고 믿었는데... 애꾸눈 선장 하록보다, 식인종의 왕인 삐삐 아빠보다, 검은 바다 해적단보다, 아라곤 더 스트라이더보다 훨씬 더 멋있어서 처음으로 탐나는 별명이에요, 대장. 

+

    김진수 @광주일보 2021-07-21: 김홍빈 구조작업 벌인 러시아 팀, 구조 일지 공개 

의지의 기적에 자연의 기적이 응답해 주기를 빌었는데... 유일하게 무한한 의지에 맞서 '자연'이란 "그저" 한계일 뿐...  

그런데 이런 마음으로는 산에 오르지 못한다 들었다. 산이 자리를 허락해야 오를 수 있는 거라고. 지구 밖에도 지구에도 한 사람 안에도 내가 전혀 모르는 너무 많은 우주들이 있다. 

사랑을 의지라고 여기는 사람만이 그것이 무한한 줄을 안다. 자신을 이겨내지 못하고 있는 나는 나를 고작 위로나 한다. 의지 없이 할 수 있는. 

++

20일 광주시 산악연맹 보고 보도

23일 중국, 파키스탄 헬기 월경 허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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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일 수색 중단 결정, 산악인장 준비 

    김진수 @광주일보: 산 사나이, 히말라야의 별이 되다 

 

Saturday, July 17, 2021

Dmitri Shostakovich (1941) Symphony No. 7 in C major, Op. 60 "Ленинградская (Leningrad)"

 

Дми́трий Дми́триевич Шостако́вич (Dmitri Dmitriyevich Shostakovich, 1941) Симфония № 7 «Ленинградская» до мажор соч. 60 (Symphony No. 7 in C major, Op. 60, "Leningrad")  
hr-Sinfonieorchester (Frankfurt Radio Symphony) + Klaus Mäkelä
2019-11-01  hr-Sinfoniekonzert ∙ Alte Oper Frankfurt


나에게는 좋아하던 곡이 아닌데도 귀가 특별히 즐거운 연주일 따름이지만, 예술의 초월적 권능과 어쩔 수 없이 부러워지는 문화. 이렇게 다시 만난 러시아(작곡), 독일(악단), 핀란드(지휘)라니, 나도 이런데 이들에게는 더욱 만감이 서릴 장면. 아무튼 단번에 기억하게 된 클라우스 매켈라는 96년생으로 현재 노르웨이의 오슬로 필 상임 지휘자라니 다른 의미로 orz. 그렇다면 문제의 도시에서는? 


Симфонический оркестр Санкт-Петербургской филармонии / Ю́рий Хату́евич Темирка́нов 
Saint Petersburg Philharmonic Orchestra / Yuri Temirkanov
2018-05-05  Saint Petersburg Philharmonic Orchestra Grand Hall


저음부의 무게감이 굉장한데 묘하게 우아한 기품이 있다. 확실히 도저히 못 살겠는 괴로움과 압박을 주기도 하고, 의외로 발랄한 모습에는 소박함이 넘쳐 매력적이다. 해석이 이렇게나 다르다니 애써 찾은 보람을 준다. 매켈라의 쇼스타코비치가 시적이라면 테미르카노프의 오케스트라는 영화적이랄까. 완전히 다른 종류의 생생함이 의미심장하군.  


cf. Ed Vulliamy@TheGuardian 2001-11-25: Orchestral maneouvres (part two)  


A radio address by Shostakovich 
1941-09-16 Leningrad

"An hour ago, I finished the score of two parts of a large symphonic composition. If I succeed in writing this composition well, if I succeed in completing the third and fourth parts, then it will be possible to call this composition the seventh symphony. 

Why do I announce this? So that the radio listeners who are listening to me now will know that the life of our city goes on as normal. 

We are all now doing our military duty. Soviet musicians, my dear friends and numerous brothers-in-arms, my friends! Remember that our art is now in great danger. Let us defend our music, let us work honestly and selflessly!"


로 봤을 때, 반히틀러였느냐 반스탈린이었느냐의 문제에 대한 논란과 관련해서는 증언의 내용이 사실에 가까운 것 같다. 저 정도면 단순히 민족/애국주의라고도 소비에트 정부의 선전에 무조건 협력했다고도 할 수 없다. 오히려 당시 참혹한 상황을 고려한다면 입장이 분명하다 못해 강경한데, 인기와 이용가치 때문에 양쪽에서 얼버무림을 당한 거겠지.   

다만, 심리전의 수단으로 무리하게 강행된 초연을 위해 기아 상태에서 연습에 강제 동원되어 급사당한 무명의 민간인 음악가들과 더불어 압력을 받아 고난을 겪은 가족들이 있었음도 기억한다.  


Saturday, May 08, 2021

Martin Heidegger (1957) Der Satz vom Grund 근거율

Martin Heidegger (1957): '인포메이션'은 실제로 현대인에게 가능한 한 빠르고 포괄적이며 명료하게 필요, 욕구, 그에 대한 만족의 확보를 성과 있게 전달하는 보고를 의미한다. 이에 따라 인간의 언어를 정보 도구로 여기는 생각이 점차 우위를 차지하고 있다. 왜냐하면 언어를 정보로 규정하는 것은 사고하는 기계와 거대한 계산기의 설치를 위해 충족되어야 할 근거를 가장 먼저 제공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보는 형식 속에 넣음(in-formieren), 즉 [형식 속에 넣어] 전달하는 것(benachrichtigen, 뒤쪽으로 향함)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정보는 조직하는 일을 한다. 다시 말해 정보는 설치하고 정렬한다(richten ein und aus). 전달로서 '인포메이션'은 이미 인간, 모든 대상, 부속물을 하나의 형식 안으로 들여놓는 장치(Einrichtung)이다. 이 형식은 지구 전체, 나아가 지구 밖의 것에 대한 인간의 지배를 확보하기에 충분한 것이어야 한다. 

'인포메이션'의 형태에는 모든 표상작용을 위해 송달되고 충족되어야 할 근거의 위력적인 원리가 지배하며, 현대라는 세계사적 시대(Weltepoche)를 모든 것이 원자 에너지의 송달에 매달려 있는 시대로 규정한다. 

우리는 성찰적 사유를 준비하기 위해 근대적 인간과 오늘날 인간이 모든 표상작용을 위한 위력적인 근거명제에서 표명되는 요구를 듣고 있는지에 대해 물었다. 이에 대해 우리는 '예'로 대답하고 '어떻게'를 제시하였다. 오늘날 인간은 근거명제에 점차 예속되면서 근거의 근거명제에 대해 지속적으로 귀를 기울이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예속이 들음의 유일한 방식도 아니며, 본래적인 방식도 아니라고 한다면, 우리는 다음과 같이 한 번 더 물어야 한다. 우리는 근거율의 요구를 듣는가? 그러나 지금 우리가 주목하고 있는 것은 언제 비로소 우리가 그 요구를 참으로 듣는다고 할 수 있는가에 대한 것이다. 그것은 우리에게 본래적으로 말을 건네는 것에 대해 우리가 응답할 때이다. 도대체 근거율의 요구 속에 말을 건네는 것이 있는가? 그리고 우리는 위력적인 근거명제가 말하는 곳을 향해 귀를 기울이고 있는가? 우리는 '아니오'라고 고백해야 한다. 어떤 점에서 '아니오'인가? 우리가 명백하고 결정적으로 근거율이 본래적으로 말하고 있는 것을 충분히 듣고 숙고하지 않고 있다는 점에서 그렇다. [305-307] 


우리가 '존재는 근거로서 경험된다'고 말할 때, 사태연관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이 드러난다. 여기에서 근거는 '라치오', 즉 해명(Rechenschaft)으로 제시된다. 

이에 따르면 인간은 해명을 요구하고 해명을 부여하는 생명체, 즉 이성적 동물(animal rationale)이다. 인간은 방금 언급한 규정에 따라 계산적으로 고려하는 (rechnen) 생명체이며, 이때 계산적으로 고려함은 넓은 의미에서 이해된다. 그 의미를 로마상인의 낱말인 '라치오'라는 낱말이 물려받았다. 이 의미는 그리스의 사유가 로마의 표상작용으로 옮겨지는 시기에 있었던 키케로(Cicero)에게서도 이미 등장한다. 

존재는 근거로서 경험된다. 근거는 '라치오', 해명으로 제시된다. 인간은 계산적으로 고려하는 생명체이다. 이 모든 것은 아주 상이한 변천 속에서도 서양 사유의 전체 역사를 통해 일치되는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이러한 사유는 근대적이고 유럽적인 사유로서 오늘날의 세계시대, 즉 원자시대로 세계를 옮겨놓았다. 유럽에서 일어나고 있는 이러한 단순하면서도 섬뜩한 사태연관에 직면하여 우리는 다음과 같이 묻는다. 

위에서 언급한 규정, 즉 인간이 이성적 동물이라는 규정이 인간의 본질을 다 드러내고 있는가? '존재는 근거를 뜻한다'는 말이 존재에 대해 말할 수 있는 최종적인 말인가? 그렇다고 한다면 인간의 본질, 존재에 대한 인간의 귀속성, 존재의 본질은 여전히 계속해서 놀라움을 일으킬 만큼 사유할 가치가 있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그렇다고 한다면 오로지 계산적으로 고려하는 사유의 질주와 그것의 엄청난 성과를 위해 사유할 가치가 있는 것을 포기해도 되지 않은가? 그렇지 않다면 계산적으로 고려하는 사유에 현혹되어 사유할 가치가 있는 것을 지나치는 대신에 사유가 그것에 응답할 수 있는 길을 찾으려고 우리는 애쓰고 있는가? 

물어야 할 것은 바로 이것이다. 그것은 사유가 물어야 할 세계 물음(Weltfrage)이다. 이 물음에 대한 대답에서 이 땅과 이 땅 위의 인간 현존재에서 무엇이 일어날 것인지가 결정된다. [316-318] 

-- 김재철 옮김(2020)  


프레게를 읽은 직후 [동일성과 차이]를 읽었으니 어설피 의분에 빠지지 않을 수 있었겠나. 이만큼 술술 읽히는 건 그토록 열받은 상태로 보낸 세월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부끄럽다고요. 그래도 지금 이런 촉박한 시점에 이 책을 제목만 보고 펼칠 줄 아는 능력이 생긴 게 다 그 덕이라 후횐 없다네. Danke für Ihre Hilfe!  


Secret Garden (2002) You Raise Me Up 
ft. Johnny Logan

Monday, May 14, 2018

Simon Stephens/김민정 (2018) 하이젠버그 Heisenberg

하이젠버그

하이젠버그 (Heisenberg)
희곡: Simon Stephens
연출: 김민정
출연: 정동환, 방진의
공연: 두산아트센터


2018-05-13 해의 낮 @두산아트센터: 뮤젠, 야생

'불확정성의 원리' 자체와는 직접적인 관계가 없지만(있을 리가 없다는 것을 알므로...) 영감을 받아 쓴 대본이라는 소개에 호기심이 동한 주변인들에 딸려 "예정에 없이" 갔다.

'번안'을 완전히 포기한 '번역'이 훌륭했다. 캐스팅이 참 잘 되었다는 것은 나뿐만 아니라 일반적인 소감일 듯.

대사의 맛을 즐기는 공연이었기에 ' ∆x ∙ ∆v ≧ h '이라는 식으로 '대강' 표현되는 원리를 인생에 대입한 원작자의 해석의 변주들이 화려하게 펼쳐진다. 다만 그는 너무나 소박하게도 인간 관계에 집중한다. 막연한 사회가 아닌 특정한 남녀간의 춤같은 로맨스를. (여기에 엄청 실망한 야생은 제목에 낚였다며 불평했지만, 그것은 공연이 아니라 원작에 대한 취향의 문제이니까.) 그 점에 관해서 나는 묘하게 베르히트의 향수(휴머니즘, 또는 신이 아닌 인간에 대한 믿음)를 맡은 듯했지만. 


미국 공연

초컬릿 대 바흐 :)


독일 공연

오, 역시 무대가 눈에 확! (좀 너무 모던하기는 한가... 작품에 비해.)



cf.
https://en.wikipedia.org/wiki/Heisenberg_(play)
원작 미국 공연 공식 홈: http://heisenbergbroadwa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