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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nday, August 29, 2021

Stephen Toulmin (1958) The Uses of Argument

Stephen Toulmin (1958/2003): 실질적 논변은 자료와 지지작용으로부터 결론으로 이행할 때 빈번하게 유형전환을 행한다. 다시 말하면 이는 바로 우리가 실질적 논변의 각각의 영역을 그 자체에 관련된 기준에 의해 판단해야 함을 의미한다. 인식론에서 근본적인 오류는 이런 유형의 비약을 논리적인 심연으로 취급하는 것이다. 모든 지식 주장이 분석적으로 정당화되어야 한다는 요구와 그렇게 정당화될 수 없는 모든 것들에 대한 거부는 이런 오류가 도달하는 첫 번째 유혹이다. 다음 단계는 상황을 치유하겠다는 희망을 갖고서, 선험론과 현상론을 거쳐서 회의론이나 혹은 실용주의로 이르는 지루한 열차에 몸을 싣는 것이다. 논변에 있어서 실질적인 단계가 논리적 심연을 나타낸다는 생각을 버리자. 그러면 논리학과 지식론 모두는 좀 더 생산적인 문제들을 다룰 수 있을 것이다. [362]   

-- 고현범/임건태 옮김(2006) 


최초의 지점으로 되돌아옴. 급기야 이럴 것 같은 강력한 느낌에 시달리지 않은 적이 없건만, 선험론, 현상론, 회의론, 실용주의란 네 협곡을 한두 번도 아니고 몇 번인지 세는 것도 진즉 잊고 갈팡질팡하는 것도 모자라, 상위의 입증론과 과학적 설명의 문제, 하위의별도의 측정과 계산가능성의 문제 들에 제대로 돌진했다기보다 접근가능한 자료 수색만 하면서 일 년을 보냈다고 여쭐 수는 없을 것 같은데, 이 문장으로 지난 일 년이 거의 잘 요약되는 이 사태를 어쩌람? 마치 나에 대한 조서를 보는 듯, 무척 잘 쓰였구먼.   

+

Stephen Toulmin: '인간 오성의 본성'에 관한 물음들은 많은 경우 심리학으로 가장한 논리학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논리학에서의 혼동은 너무 쉽게 지식론에 있어서의 잘못된 개념으로도 이어졌다. 이런 식으로 논점을 벗어난 경우에도 — 즉 실질적 논변들에 있어서도 — 분석성에 도달하려는 욕망은 회의론으로 이어지거나 회의론에 대한 공포 때문에 마찬가지로 과격하게 실제 행동을 중단해 버리는 것으로 이어졌다. 그런 논리학적인 시초의 혼동을 제거할 때만 인식론에 적합한 길은 회의론을 껴안거나 회피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야심을 조절하는 것이란 점이 분명해진다. 즉 어떤 분야에서건 논변과 지식론이 분석적 기준들에 따를 것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좀 더 현실적으로 해당 분야에서 적합하게 요구될 수 있는 그 어떤 종류의 설득력이나 훌륭한 근거를 갖추기를 요구하는 것이다. 

형식논리학에서 분석적 이상은 자신의 매력을 수학의 명성으로부터 빌려왔던 것 같다. 고대 아테네와 과학 혁명의 시기 모두 철학사는 수학사와 긴밀히 연관되었다. 그래서 그런 결과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명문 기하학 학교의 창립자이자 선생인 플라톤이 모든 학문의 가치 있는 이상을 기하학적 증명에서 발견했다는 사실에 놀랄 필요는 없다. 근대 물리학 발전에 막대한 영향을 미쳤던 '데카르트 기하학'의 창시자인 데카르트가 자연과학과 신학의 모든 근본적인 진리를 유사기하학적인 방법으로 세우려는 생각에 매료되었다는 사실 역시 마찬가지이다. 이런 식으로 우리는 근대미분법의 발명자인 라이프니츠가 어떻게 철학을 수학처럼 '실재적이고 증명할 수 있는' 것으로 만들려는 전망에 환호했는지를 이해할 수 있다.  

다시 말하지만 이런 것들에 놀랄 필요가 없다. 하지만 이런 사실이 우리가 그와 동일한 이상에 의해서 이끌려져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사실 우리는 그보다 그런 이상을 경계해야 하며, 어느 지점에서 그 이상의 영향이 해로운지를 재빨리 알아채야 한다. 물론 일반적으로 보아서 이런 생각이 독창적인 것은 아니다. 하지만 분석적 이상을 포기하는 것의 일련의 결과들이 명백해지려고 한다면, 모든 필연적인 논리적 구별들을 분명하고도 확고하게 명심해야만 한다. [383-384] 

우리의 인식론적 문제들의 상세한 원천에 대한 조명은 오직 좀 더 복합적이고, 영역 의존적인 논리적 범주들의 체계를 구축할 때만이 가능하다. 예를 들어 데카르트 이래로 그가 제기한 감각의 오류 가능성에 관한 문제들은 철학자들을 괴롭혔다. 특히 우리의 모든 감각 경험이 교활한 악마에 의해서 감쪽같이 조작될 수 있으며, 우리를 둘러싼 대상들의 존재와 성질에 관한 기만적인 믿음들을 계속 고수하도록 설정되었을 가능성 — 물론 논리적 가능성이지만 — 이 그러하다. 

처음 봐서는 어떤 문제도 그보다 더 우리의 자존심이나 진정한 지식 주장에 심각하게 도전하지는 못할 것 같다. 하지만 사물들이 보이는 방식으로부터 존재방식으로 진행되는 논변들이 여기서 문제를 만들어 내는 바로 그 분석적 타당성을 이상적으로 성취할 수 있다는 것은 헛된 기대에 불과하다. 데카르트가 주의를 기울인 모든 것은 '논리적 가능성'이며, 이런 '논리적 가능성'(즉 자기모순의 부재)은 사태의 필연적 특성이다. 다른 한편 우리가 실제 논변에서 요구하는 것은 그에 대한 추정들이 실질적 목적에 비추어 반박할 수 없을 만큼 강력한 결론들이다. [384-385]  

플라톤처럼 데카르트에서도 분석적 이상의 기하학적 연결들은 아주 분명하다. 실질적 논변들이 — 모든 종류의 유형의 비약에 대한 의혹을 포함해서 — '논리적 심연'을 포함하고 있다는 생각은 순수수학을 위해 만들어진 척도에 비추어서 그 논변들을 측정할 때 초래되는 자연스런 결과이다. 하지만 유형의 비약과 영역의 차이들은 우리가 안고 시작할 수밖에 없는 것이며, 우리는 절대로 그것들을 없앨 수는 없다. 다시 말하면 결론과 그것을 지탱하는 정보 사이의 유형의 전이는 심연이나 결함이 아니라, 논변의 영역에 특징적인 성질이다. 실질적 논변들에는 필연적 함축이 결여되어 있다는 것, 그것들이 분석적 기준에 따르지 않는다는 사실은 유감스럽거나 변명이 필요한 것 혹은 심판하거나 변화시켜야 할 것이 아니다. 

실용적인 견지에서 분석적인 보증들이 그러한 경우들에 요구되어지는 것은 과도하다고 말할 필요조차 없다. 정당한 이유가 작동한다는 확신이 우리가 합리적으로 요구할 수 있는 모든 것이라거나 필연적 함축을 논외로 하고 이것을 수용해야 한다는 확신도 마찬가지이다. 비록 그런 말이 (우리가 지금까지 도달한 입장과 완전히 다르다고 할 수는 없고) 겸손하게 들릴지는 모르겠지만, 이런 관점조차 오해를 유발한다. 왜냐하면 지금은 '논외로 하고'와 같은 말을 쓸 장소가 아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그 말들에는 상황이 보증하지 않는 함축된 변명이 있다. 

하나의 이미지를 떠올리면서 이 논의를 마치는 것이 유익할 것 같다. '논리적 심연'이라는 말에 간직된 경쟁적 이미지가 야기하는 효과를 무마시킬 만한 이미지 말이다. 우리에겐 그런 말처럼 혼란스런 연상을 가져오지 않는 유형 전환의 추론을 그려내는 길이 필요하다. 다양한 가능성들이 제기된다. 즉 하나의 논리 유형을 가진 정보로부터 다른 유형의 결론에로의 이행은 '심연'을 건너는 걸음이라기보다는 '수위'의 변화나, '방향'의 변화, 또는 태도의 변화로 간주될 수는 없는가? 아마도 이 마지막 비유가 가장 도움이 될 것이다. 왜냐하면 태도의 변화라는 것은 적합한 기준으로 판단할 때 시기적으로 부적절하거나, 성급하거나, 시기상조일 수 있거나 그렇지 않다면, 적절하거나, 정당하거나, 시기적절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사실 태도가 — 미세하게 구별되는 신호나 동작은 차치하고 — 명확하게 언어적인 것이 되는 지점이 있다. 그래서 두 개의 발화들 간의 논리 유형의 차이는 — 바로 이런 식으로 확장된 의미에서 — 두 유형의 의사소통적 태도 간의 차이이다. 

운전자는 전방도로에 차가 없는 것을 보고서, 뒤차에 추월신호를 보낼 수 있다. 도로가 비었다는 것을 보는 것은 이런 식으로 신호를 보내는 하나의 이유를 제공한다. 다시 말하면 전자는 후자를 정당화한다. 하지만 비록 보는 것과 신호하는 것이 별개의 것이라 해도, 보는 것과 그렇게 하는 것 간에 '심연'은 없다. 다만 차이가 존재할 뿐이다. 신호하는 것을 정당화하기 위해서 우리는 다만 전방 도로 상태를 지적하기만 하면 된다. 여기에서 우리는 시각과 행위 간의 간격을 메워줄 더 나아간 원칙들을 제공할 필요가 없다. 이제 실질적인 물음은 '신호하기 자체가 보는 것에 필적할 수 있는가, 또는 보는 것이 신호하기에 필적하는가?'가 아니라 '어떤 경우에 보는 것이 신호하기와 같은 (전적으로 구별되는) 활동을 정당화하는가?'이다. [385-387] 

-- 고현범/임건태 옮김(2006)  


툴민으로부터 배운 건 전혀 아니었지만, 그에겐 지적의 대상이었던 것이 나에겐 폭력의 두 원천으로 여겨졌고, 그의 결론이 나에겐 신조로 이미 구축되어 있었다. 구별하지 못했던 고통들도 아니었고, 인식하지 못했던 목표들도 아니었다. 일단은, 이라며 비켜 가려 했던 마음의 수법에 자꾸만 발목을 잡혔는지, 아니면, 사안의 내부 관계적 순서와 진행의 실천 절차를 달리하지 못하는 우둔함인지 모르겠네. 현실적으로 후자에 무게가... 執迷. 

전략에 허점과 기복이 있을 수 있다. 전술을 철회해야만 할 수 있다. 전투에서 패배할 수 있다. 총알에 불량품이 있을 수도 있으면 안 된다. 자기가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는 글이 있다. 그 말이 알차고 훌륭해서 이해하려고 노력할 가치가 충분하더라도. 


Saturday, May 08, 2021

Martin Heidegger (1957) Der Satz vom Grund 근거율

Martin Heidegger (1957): '인포메이션'은 실제로 현대인에게 가능한 한 빠르고 포괄적이며 명료하게 필요, 욕구, 그에 대한 만족의 확보를 성과 있게 전달하는 보고를 의미한다. 이에 따라 인간의 언어를 정보 도구로 여기는 생각이 점차 우위를 차지하고 있다. 왜냐하면 언어를 정보로 규정하는 것은 사고하는 기계와 거대한 계산기의 설치를 위해 충족되어야 할 근거를 가장 먼저 제공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보는 형식 속에 넣음(in-formieren), 즉 [형식 속에 넣어] 전달하는 것(benachrichtigen, 뒤쪽으로 향함)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정보는 조직하는 일을 한다. 다시 말해 정보는 설치하고 정렬한다(richten ein und aus). 전달로서 '인포메이션'은 이미 인간, 모든 대상, 부속물을 하나의 형식 안으로 들여놓는 장치(Einrichtung)이다. 이 형식은 지구 전체, 나아가 지구 밖의 것에 대한 인간의 지배를 확보하기에 충분한 것이어야 한다. 

'인포메이션'의 형태에는 모든 표상작용을 위해 송달되고 충족되어야 할 근거의 위력적인 원리가 지배하며, 현대라는 세계사적 시대(Weltepoche)를 모든 것이 원자 에너지의 송달에 매달려 있는 시대로 규정한다. 

우리는 성찰적 사유를 준비하기 위해 근대적 인간과 오늘날 인간이 모든 표상작용을 위한 위력적인 근거명제에서 표명되는 요구를 듣고 있는지에 대해 물었다. 이에 대해 우리는 '예'로 대답하고 '어떻게'를 제시하였다. 오늘날 인간은 근거명제에 점차 예속되면서 근거의 근거명제에 대해 지속적으로 귀를 기울이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예속이 들음의 유일한 방식도 아니며, 본래적인 방식도 아니라고 한다면, 우리는 다음과 같이 한 번 더 물어야 한다. 우리는 근거율의 요구를 듣는가? 그러나 지금 우리가 주목하고 있는 것은 언제 비로소 우리가 그 요구를 참으로 듣는다고 할 수 있는가에 대한 것이다. 그것은 우리에게 본래적으로 말을 건네는 것에 대해 우리가 응답할 때이다. 도대체 근거율의 요구 속에 말을 건네는 것이 있는가? 그리고 우리는 위력적인 근거명제가 말하는 곳을 향해 귀를 기울이고 있는가? 우리는 '아니오'라고 고백해야 한다. 어떤 점에서 '아니오'인가? 우리가 명백하고 결정적으로 근거율이 본래적으로 말하고 있는 것을 충분히 듣고 숙고하지 않고 있다는 점에서 그렇다. [305-307] 


우리가 '존재는 근거로서 경험된다'고 말할 때, 사태연관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이 드러난다. 여기에서 근거는 '라치오', 즉 해명(Rechenschaft)으로 제시된다. 

이에 따르면 인간은 해명을 요구하고 해명을 부여하는 생명체, 즉 이성적 동물(animal rationale)이다. 인간은 방금 언급한 규정에 따라 계산적으로 고려하는 (rechnen) 생명체이며, 이때 계산적으로 고려함은 넓은 의미에서 이해된다. 그 의미를 로마상인의 낱말인 '라치오'라는 낱말이 물려받았다. 이 의미는 그리스의 사유가 로마의 표상작용으로 옮겨지는 시기에 있었던 키케로(Cicero)에게서도 이미 등장한다. 

존재는 근거로서 경험된다. 근거는 '라치오', 해명으로 제시된다. 인간은 계산적으로 고려하는 생명체이다. 이 모든 것은 아주 상이한 변천 속에서도 서양 사유의 전체 역사를 통해 일치되는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이러한 사유는 근대적이고 유럽적인 사유로서 오늘날의 세계시대, 즉 원자시대로 세계를 옮겨놓았다. 유럽에서 일어나고 있는 이러한 단순하면서도 섬뜩한 사태연관에 직면하여 우리는 다음과 같이 묻는다. 

위에서 언급한 규정, 즉 인간이 이성적 동물이라는 규정이 인간의 본질을 다 드러내고 있는가? '존재는 근거를 뜻한다'는 말이 존재에 대해 말할 수 있는 최종적인 말인가? 그렇다고 한다면 인간의 본질, 존재에 대한 인간의 귀속성, 존재의 본질은 여전히 계속해서 놀라움을 일으킬 만큼 사유할 가치가 있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그렇다고 한다면 오로지 계산적으로 고려하는 사유의 질주와 그것의 엄청난 성과를 위해 사유할 가치가 있는 것을 포기해도 되지 않은가? 그렇지 않다면 계산적으로 고려하는 사유에 현혹되어 사유할 가치가 있는 것을 지나치는 대신에 사유가 그것에 응답할 수 있는 길을 찾으려고 우리는 애쓰고 있는가? 

물어야 할 것은 바로 이것이다. 그것은 사유가 물어야 할 세계 물음(Weltfrage)이다. 이 물음에 대한 대답에서 이 땅과 이 땅 위의 인간 현존재에서 무엇이 일어날 것인지가 결정된다. [316-318] 

-- 김재철 옮김(2020)  


프레게를 읽은 직후 [동일성과 차이]를 읽었으니 어설피 의분에 빠지지 않을 수 있었겠나. 이만큼 술술 읽히는 건 그토록 열받은 상태로 보낸 세월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부끄럽다고요. 그래도 지금 이런 촉박한 시점에 이 책을 제목만 보고 펼칠 줄 아는 능력이 생긴 게 다 그 덕이라 후횐 없다네. Danke für Ihre Hilfe!  


Secret Garden (2002) You Raise Me Up 
ft. Johnny Logan

Monday, January 08, 2018

Thupten Jinpa (2017) Science and Philosophy in the Indian Buddhist Classics - Volume 1: The Physical World


어젯밤 달라이 라마의 트윗에 담긴 영상을 스크랩해 두었다가,


오늘 보고 감이 와서 바로 샀다. 그 이유는 정확히 아래와 같다. (이 프랑스인이 남아시아라고 부른 곳에 국한되는 상황은 아니라는 것을 지적해야겠지만.)
“The genesis of science that took place in South Asia was just as demanding in terms of empirical accuracy, explanatory standards, and theoretical ingenuity as science in the West. Unlike modern science, however, it included the experience of meditation among its basic sources of knowledge. This broadening of the empirical horizon promises to trigger a new Renaissance. We are fortunate that the editors here have offered us such a clear presentation of this exceptional resource."
--- Michel Bitbol, CNRS (The National Center for Scientific Research(Research), Paris
달라이 라마가 서문에서 인용한 문구:
Monks and scholars, just as you test gold
by burning, cutting, and polishing it,
so too well examine my speech.
Do not accept it merely out of respect.
--- Buddha

Dalai Lama: The Buddha says, we must test its validity for ourselves through experimentation and the use of reason. The testimony of scriptures alone is not sufficient. This profound advice demonstrates the centrality of sound reasoning when it comes to exploring the question of reality.

정신분석학의 임상조사, 인지심리학의 실험분석, 현대물리학의 발견들, 현대형이상학과 논리적 모순을 일으키지 않으면서도 그 결과들을 해석적으로 포괄가능한 사유체계로 불교의 존재는 독보적이다. (와이트헤드도 있지만.) 이 사실이 확인되는 순간들의 개인적이고 지극히 내면적인 경험은 잊혀질 수가 없다. '불교논리학'의 선도지가 놀랍게도 '아직' 오스트리아임을 최근 알게 되었다. 아직인 이유가 대충 짐작이 간다.


+
유교 연구의 중심은 이제는 무슨 쐐기라도 박듯이 이론의 여지없이 하버드-옌칭 연구소이다. 재작년에 마지막으로 확인한 결과 [논어]의 영역이 이제는 여러 대학에서 강의마다(대학원도 학부 전공도 아닌 학부 교양 강의에서까지) 새로 이루어지고 초벌 원고가 공개되어 학계를 넘어선 토론을 유도한다. (즉 3세대 연구자들이 활발히 독립해 나가고 있는 상황이고, 자연히 이들은 수도 많다. 더 이상 동경대와 국립대만대에서 교수와 박사들을 수입해 가지 않아도 되게 된 것이다.) '군자'가 noble men이나 gentleman이 아니라 junzi로 번역되는 경우가 더 많아졌고, 그 주석을 보면 고대 그리스 철학의 유사 개념들과의 차이를 상술하는 것은 물론이고 한국에서도 불과 십여 년 전에야 책의 형태로 출간된 최신의 고고학, 문헌학, 문자학의 공동 연구 성과를 반영하고 있다. 그러니까, 미국에서 (세계초특급이 아닌 대학의) 경영학을 전공하는 스무 살의 학생이 선택교양 강의에서 배워 알고 있는 내용이 이 정도 수준이다. (솔직히 내가 논어를 본문만이라도 당장 외워야겠다고 결심하게 된 것은 이것을 알게 된 순간이었는데, 여태 반도 못 외우고 있지만.) 일례로 仁의 어원 전개 과정에 대한 학계의 최신의 합의 내용을 살펴보려면 영어 텍스트를 배제하고서는 너무나 불완전할 수밖에 없는 형편이다. (일면이겠으나, 한국에 갑골문 학자는 지금까지도 몇 되지 않는다고 알고 있는데.) 중국의 유교와 일본의 유교와 한국의 유교의 사상사적 차이와 문화적 차이를 이론적으로 가장 엄밀하게 분석하고 있는 것은 현재 미국인들이고, 그들은 이것이 조선 전기와 후기의 여성의 지위 변화에 어떠한 영향을 미쳤는지에 대한(그러한 미시사적 응용분야의) 학술서 등등을 이미 일반 서점에 단행본으로 출간했을 만큼 성숙한 단계를 지났다. (단행본 출간이란 의미가 대충, 학계에서는 숱한 논문과 토론이 집적되어 수준 이상의 완성도를 가지는 동의에 이르러 십 년 전에 정리된 것이라고 봤을 때, 자연계에서는 이쯤 되면 나머지 연구자들은 이제 다른 영역을 알아봐야 하는데, 인문학계는 좀 다르려나?) 고전번역원이 생긴 지 얼마 안 된 것 같았는데 요즘 출간 목록이 폭발하고 있는 것을 보고 '한강의 기적'급 속도감이 느껴지긴 했다. 그 내실을 알아볼 역량이 내게 없으니 따질 일도 아니고 일단 희망이 생기긴 하는데, 지고한 시간을 바쳐야만 하고 대를 이어 가야만 되고 평생을 바쳐 봐야 고작 일원으로 사라져도 간신히 이루어지는 종류의 작업들도 진행되고 있는지 궁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