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nday, April 05, 2021

meritocracy

"노력주의로 변신한 능력주의"(김만권, 2021: 269)란 구절에 극렬히 동감하던 중 근본적인 시각차를 절감하였다.    

능력주의(meritocracy): '지능(I.Q) + 노력(effort) = 능력(merit)'이라는 등식 아래, '개인이 지닌 능력' 외에는 그 어떤 것도 개인의 성취를 좌우하는 요소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발상 (Michael Young, 1958

이라는데, 공식의 "지능" 항이 출생이라는 운에 달려 있다는 것. 정의상의 "IQ"가 유전에 의해 결정된다는 주장을 인지 심리학이 보증하고 있음을 알지만, 존중하여 "선천적 재능"으로 말을 바꾼다면 무슨 딴지인지 전달될까? 

김만권(2021: 273): 사랑하는 이들에게 능력이란 덕목을 요구하는 대신, 보호라는 제도의 우산을 씌워 주세요. 

또한 같은 내용이라도 이렇게 표현이 다르면 의미도 다르게 느껴지니 맘에 걸리는 데가 있다. 다양한 것들을 일렬의 순서로 세울 수 없기 때문에 하나의 공통의 것(그것이 공정한 복지이든 평등한 권리이든 다른 무엇이든)의 기준이 될 수 없고, 이것은 불평등이나 민주주의와 앞서거니 뒤서거니 야기하는지 침해하는지를 따질 계제 이전에 기본적으로 인권 자체의 문제이다. 결과적으로 인간 존엄의 문제가 될 수밖에 없는 과정을 분석할 사회학이나 성찰할 철학의 대상이라기보다는. 

그러니까, 질적인 것을 서열화할 수 있다는 발상을 전제로 한 모든 다방면의 시도 자체에 생리적으로, 거의 천성적으로, 전폭적으로, 과민하게 반발하는 성질을 가지고서 AM을 비판이 아닌 설명을 어떻게 하겠느냐고요... 그런 이유로 유치원도 다니기 힘들었는데. 친절했던 교사가 우리들을 하나, 둘, 셋... 세는 걸 보고 충격 받았던 순간이 지금도 생생하다. 왜냐하면, 그런 내가 얼마나 이상한 건지 아니면 설마 아닌지 어른이 되면 알겠거니 해서 그때까지 이 사태를 잊지 말자고 다짐했었기 때문에. 학습지에 네 개의 사과와 세 개의 귤 그림 옆에 4+3=7이라고 써야 한다는 것은 알겠는데, 7까지 가기 전에 4부터 문제였다. 아니, 맨 왼쪽 사과와 두 번째 사과가 왜 같다는 것인지 끔찍스러워서 오랜 세월 고민이었다. 사과와 귤 들한테 너무 미안하고 슬펐다. 숙제를 안 할 수는 없고, 아쉬운 대로 서로 다른 색깔 색연필로 칠해 줬다. 아래로 비슷한 문제가 여러 개인데 색연필 개수가 열두 개밖에 안 되어서 애가 탔다. 최대한 다른 색으로 칠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궁리했다. 그렇게 하고 싶었던 것이 아니라 그렇게 해야만 한다고 느꼈다. 그래서 검은색 사과와 보라색 귤이 생겼다. 그것이 조합론의 문제인 줄은 십 년도 넘게 지나서야 배웠지만.    

나 참 살기 힘들었구나. 확실히 지금이 더 편한 것 같지?  

어쨌든 모든 인간은 서로 다른 면에서 탁월하다. 덧붙여 한 사람이 탁월한 분야는 늘 둘 이상이다. 물론 능력보다 성공이 더 운에 좌우된다. 상황이 바뀌면 강점이 약점 되고 약점이 강점 된다. 어쩔 텐가? 복지가 아니라도 공정성이 아니라도 민주주의가 아니라도 사랑이 아니라도 예의가 아니라도, 신자유주의라도, 다른 어떤 경우라도 일렬로 세우면 안 된다. 사람한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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