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riday, January 29, 2021

postModernism

노선을 정할 수준도 못 되고, 지금 그럴 필요가 꼭 있어야만 하는지 의심스럽기도 하지만, 이 세계에 어떤 갈래들이 이미 있는지는 알아 두고 싶다. 나에게는 과거의 개인적인 고민들을 하나씩 해결하려는 희망과 미완성의 지도를 채워 나가려는 내적 동기 말고 남아 있는 것이 이제 없기 때문이다. 자기모순을 감내할 수 있는 여력을 가지고 있지 못하다. 그만큼 절박하다. 그런데 이것은 한국에서 공부한 사람은 몰라야만 어떤 것들을 유지할 수 있는 어떤 것들 중 하나인 것 같다. 그런데 독일 학위자가 그것을 출판될 책에서 보란 듯이 꺼내 놓았다. 

 

이순예(2015): 그런데 이 '몸짓'으로서의 포스트모더니즘은 자기 토대를 망각한 운동이었다. 자유를 보편이념으로 추대할 수 있게 해준 토대가 다름 아닌 산업혁명을 촉발하고 성공시킨 과학주의였다는 사실을 간과하고 그 과학적 해명방식을 못마땅해 하면서 자유자재로 해명하고 싶어 했던 것이다. 더 풍요로운 세상을 위해서라는 깃발도 내걸었다. 누구에게나 모든 것이 가능한 세상이 되었으므로 세상을 '제대로' 해명하겠다는 의도를 가지고 계몽에 임하는 자는 타인의 가능성을 제한하는 사람으로 치부되었다. 사안에 맞는 해석을 하겠다는 노력은 해석의 중심을 계속 거머쥐려는 권력의 속성으로 분류되었다. 모든 것이 가능하므로 더 큰 가능성을 위해 모든 제한이 철폐되어야 한다는 주장(anything goes)은 실제로 결실을 거두었다. 자본이 모든 경계를 넘어서 자신의 논리를 관철하는 신자유주의 세상이 도래한 것이다. (p. 31)


이 분은 그 어떤 것들 중 하나를 터트릴 셈이셨던 걸까? 그 어떤 것들 중 하나보다 그 셈이 잠시 더 궁금해졌다. 지금의 내가 밑줄 쳐야 했던 부분은 이 다음부터였지만, 파생한 상황들이 아닌 핵심적인 사실로부터 모두의 현실을 연결짓기로 이만큼 깊이 찌른 것을 처음 보았다. 

자신이 규약주의의 정합론에 근거한 경기에 임하고 있음을 모르는 과학자/공학자/기술자는 20세기 이후로 없다. (없는 것이 정상인데, 가끔 있는 것 같기는 하다. 문제는 그 소수의 예외 경우 중 대중에게 말을 하는 비율이 높다는 것이다.) 이곳에서는 규칙에 따라 당락과 점수가 매겨진다. 그 규칙에는 종류들과 변종들이 있고, 세칙과 예외규칙 들로 이루어진 위계가 공개되고 끊임없이 개정된다. 모든 참가자는 개정안을 낼 수 있다. 그래서 자신의 전공을 벗어나 무언가를 이해하고자 할 때에도 또한 규칙을 먼저 묻게 된다. 내용이나 심지어 권한보다 방식이 절차상으로도 우선될 수밖에 없다. 풍부함 또는 열린 문들, 그리고 모호함이란 탈을 쓴 직무유기의 게으름 또는 접근금지 푯말로 위협하는 폐쇄구역 지정권의 남발 사이에 무슨 은밀한 연락망이나마 있다는 듯한 뉘앙스를 받아 주기 어렵다. 언어의 문제로 치부해 줄 수 없는 꿍꿍이가 있는 것으로 느껴진다. 그곳에서는 질문을 듣지 않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대답을 기다리지도 않는다. 자리는 이미 꽉 차 있고, 해가 지지 않는다. 일종의 유토피아는 실제로는 볼 때마다 공포스럽다. 나는 들어가지 못하는 곳이지만, 들어가고 싶지도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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