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誠者,天之道也;誠之者,人之道也。 ( Chéng zhě, tiān zhī dào yě; chéngzhī zhě, rén zhī dào yě. ) ---- 子思 《禮記·中庸》22:7 _____ Der bestirnte Himmel über mir, und das moralische Gesetz in mir. ---- Immanuel Kant (KpV: AA 05: 161.33–36) ________________________ ἃ γὰρ δεῖ μαθόντας ποιεῖν, ταῦτα ποιοῦντες μανθάνομεν (What we have to learn to do we learn by doing.) ---- Ἀριστοτέλης (Nic. Eth. 1103a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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白露. 이슬 총총한 날.
[簡單百科] 白露時節承載了多少古代的好詩詞,這個冬天,世界會怎麼樣?
시를 다 모아 놨어~ 💘 이게 바로 내가 원하던 것!
白露不僅僅是節氣,還承載了中國人的愛情、思念及豐收的喜悅
大家好,這裡是簡單生活頻道,今天,和大家聊聊二十四節氣中的,白露。白露是一年中的第十五個節氣,也是反應天氣變化的一個重要節氣,《月令七十二候集解》對“白露”的詮釋是這樣的:
水土濕氣凝而為露
Shuǐtǔ shī qì níng ér wéi lù.
秋屬金 金色白
Qiū shǔ jīn, jīnsè bái.
白者露之色 而氣始寒也
Bái zhě lù zhī sè, ér qì shǐ hán yě.
天氣的變化,讓世界寒生露凝,也就給白露這個節氣帶來了詩意,帶來了靈性,中國古代以白露為詩詞的很多,
一、白露是愛情的畫卷
春秋戰國時期的人們已經感受到了白露這個節氣的美,雖然此時還沒有白露這個名稱的節氣,但這首詩百分之九十的人都聽過:
蒹葭蒼蒼
Jiānjiā cāngcāng,白露為霜
báilù wèi shuāng.
所謂伊人suǒwèi yīrén,
在水一方
zài shuǐ yīfāng
這句詩出自於《詩經·國風·秦風》,想像一下在河邊生長著茂盛的蘆葦,顏色蒼青, 而在那蘆葦葉上凝結了一層露水,遠遠望去就像白霜,那微微的秋風送著襲人的涼意,而朝思暮想的佳人正佇立在河岸邊。這充分錶現了一個年輕人看到自己喜愛的佳人時候那種緊張、激動而又興奮的情緒。
二、白露是秋天的畫卷
漢武帝時期,公元前一百零四年,由鄧平等製定的《太初歷》(태초력)把二十四節氣定於曆法,中國正式有了二十四節氣,而白露節氣所代表的由熱轉涼的秋意也被詩人利用起來。唐朝時期,時任丞相的元稹向全國頒布了二十四節氣詩,其中《詠廿四氣詩 白露八月節》說的就是白露節氣:
露霑蔬草白 天氣轉青高
Lù zhān shū cǎo bái tiānqì zhuǎn qīng gāo
葉下和秋吹 驚看兩鬢毛
yè xià hé qiū chuī jīng kàn liǎng bìn máo
養羞因野鳥 為客訝蓬蒿yǎng xiū yīn yěniǎo wèi kè yà pénghāo
火急收田種 晨昏莫辭勞
huǒjí shōu tián zhǒng chénhūn mò cí láo
元稹通過節氣詩描述了一個白露時節美秋的畫卷,白露到了,晶瑩的露水凝聚在草木和蔬菜上,天氣也慢慢變的秋高氣爽,高大的樹木開始落葉,意味著深秋即將來臨,而當你照鏡子的時候會發現,兩鬢的頭髮又白了一些,不知不覺又要老一歲了。大自然的野鳥開始活躍起來,在戶外捕捉蟲子,儲存食物,為了即將到來的寒冬做好準備,人類也開始忙碌起來了,開始收割豐收的糧食,早出晚歸也不覺得辛勞,這是豐收的季節。元稹的寥寥幾句詩,就把白露時節秋天的畫卷徐徐展開,一方面感嘆時光過得飛快,另外一方面也展示了豐收的喜悅。
三、白露是思念的畫卷
杜甫是詩聖,他所處的時代是開元盛世後期,又趕上了安史之亂,所以杜甫的詩中總是表達對老百姓的關心,對國家的擔憂。
戍鼓斷人行 邊秋一雁聲
Shù gǔ duàn rénxíng biān qiū yī yàn shēng
露從今夜白 月是故鄉明
lù cóng jīnyè bái yuè shì gùxiāng míng
有弟皆分散 無家問死生yǒu dì jiē fēnsàn wú jiā wèn sǐshēng
寄書長不達 況乃未休兵
jìshū cháng bù dá kuàng nǎi wèi xiū bīng
這是在安史之亂期間,杜甫寫下的《月夜懷舍弟》,表達了杜甫在白露時節對自己兄弟的思念。白露節氣的到來,意味著豐收時節的到來,天氣逐漸轉涼,越是這個時節越容易勾起人們的相思慾望,因為安史之亂的爆發,導致杜甫和自己的弟弟分散兩地,白露時節到了,露水從今夜開始掛滿草木,月亮掛在了天空,但怎麼看都感覺還是家鄉的月亮更加明亮,這分明是在表達思念之情。杜甫和弟弟想通過書信進行聯繫,但總是送不到弟弟手上,只因為戰亂沒有結束,阻塞了送信的道路。或許只有經歷過分離和戰亂,才懂得團聚和和平的彌足珍貴,中國古老的家國深情,在這首詩中得到最大的展現和昇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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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숨을 못 쉬겠... 영어/간체자 자막까지! 복배하는 아이콘은 없나? o2 (오~ 괜찮)
cJ2 (이게 더 나은 듯?) cJㄹ (매사 발전)
사극 팬으로 보건대 왼쪽은 중국풍(팔을 올리고 배를 당기고 머리를 숙여 이마를 댄다. 오래 유지하기 힘드니 보통 곧 해제 허가가 떨어진다. 때로 직접 일으켜 주는 후덕한 반응이 나온다.) 오른쪽은 일본풍(손을 옆으로 짚고 목을 늘이고 등을 편다. 어깨로 버티는 방어 불가 상태.)에 가깝다. (한국은 중국풍에 더 가깝지만, 차이는 상체보다 하체에 치중한다는 점. 결국 안정적인 자세로 내려앉는 식. 하여 대기하기엔 용이하지만 바로 일어나기 어렵다. 자세라기보다는 동작. 안 살벌하다.) 혼놀의 경지.
Martin Heidegger (1957): '인포메이션'은 실제로 현대인에게 가능한 한 빠르고 포괄적이며 명료하게 필요, 욕구, 그에 대한 만족의 확보를 성과 있게 전달하는 보고를 의미한다. 이에 따라 인간의 언어를 정보 도구로 여기는 생각이 점차 우위를 차지하고 있다. 왜냐하면 언어를 정보로 규정하는 것은 사고하는 기계와 거대한 계산기의 설치를 위해 충족되어야 할 근거를 가장 먼저 제공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보는 형식 속에 넣음(in-formieren), 즉 [형식 속에 넣어] 전달하는 것(benachrichtigen, 뒤쪽으로 향함)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정보는 조직하는 일을 한다. 다시 말해 정보는 설치하고 정렬한다(richten ein und aus). 전달로서 '인포메이션'은 이미 인간, 모든 대상, 부속물을 하나의 형식 안으로 들여놓는 장치(Einrichtung)이다. 이 형식은 지구 전체, 나아가 지구 밖의 것에 대한 인간의 지배를 확보하기에 충분한 것이어야 한다.
'인포메이션'의 형태에는 모든 표상작용을 위해 송달되고 충족되어야 할 근거의 위력적인 원리가 지배하며, 현대라는 세계사적 시대(Weltepoche)를 모든 것이 원자 에너지의 송달에 매달려 있는 시대로 규정한다.
우리는 성찰적 사유를 준비하기 위해 근대적 인간과 오늘날 인간이 모든 표상작용을 위한 위력적인 근거명제에서 표명되는 요구를 듣고 있는지에 대해 물었다. 이에 대해 우리는 '예'로 대답하고 '어떻게'를 제시하였다. 오늘날 인간은 근거명제에 점차 예속되면서 근거의 근거명제에 대해 지속적으로 귀를 기울이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예속이 들음의 유일한 방식도 아니며, 본래적인 방식도 아니라고 한다면, 우리는 다음과 같이 한 번 더 물어야 한다. 우리는 근거율의 요구를 듣는가? 그러나 지금 우리가 주목하고 있는 것은 언제 비로소 우리가 그 요구를 참으로 듣는다고 할 수 있는가에 대한 것이다. 그것은 우리에게 본래적으로 말을 건네는 것에 대해 우리가 응답할 때이다. 도대체 근거율의 요구 속에 말을 건네는 것이 있는가? 그리고 우리는 위력적인 근거명제가 말하는 곳을 향해 귀를 기울이고 있는가? 우리는 '아니오'라고 고백해야 한다. 어떤 점에서 '아니오'인가? 우리가 명백하고 결정적으로 근거율이 본래적으로 말하고 있는 것을 충분히 듣고 숙고하지 않고 있다는 점에서 그렇다. [305-307]
우리가 '존재는 근거로서 경험된다'고 말할 때, 사태연관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이 드러난다. 여기에서 근거는 '라치오', 즉 해명(Rechenschaft)으로 제시된다.
이에 따르면 인간은 해명을 요구하고 해명을 부여하는 생명체, 즉 이성적 동물(animal rationale)이다. 인간은 방금 언급한 규정에 따라 계산적으로 고려하는 (rechnen) 생명체이며, 이때 계산적으로 고려함은 넓은 의미에서 이해된다. 그 의미를 로마상인의 낱말인 '라치오'라는 낱말이 물려받았다. 이 의미는 그리스의 사유가 로마의 표상작용으로 옮겨지는 시기에 있었던 키케로(Cicero)에게서도 이미 등장한다.
존재는 근거로서 경험된다. 근거는 '라치오', 해명으로 제시된다. 인간은 계산적으로 고려하는 생명체이다. 이 모든 것은 아주 상이한 변천 속에서도 서양 사유의 전체 역사를 통해 일치되는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이러한 사유는 근대적이고 유럽적인 사유로서 오늘날의 세계시대, 즉 원자시대로 세계를 옮겨놓았다. 유럽에서 일어나고 있는 이러한 단순하면서도 섬뜩한 사태연관에 직면하여 우리는 다음과 같이 묻는다.
위에서 언급한 규정, 즉 인간이 이성적 동물이라는 규정이 인간의 본질을 다 드러내고 있는가? '존재는 근거를 뜻한다'는 말이 존재에 대해 말할 수 있는 최종적인 말인가? 그렇다고 한다면 인간의 본질, 존재에 대한 인간의 귀속성, 존재의 본질은 여전히 계속해서 놀라움을 일으킬 만큼 사유할 가치가 있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그렇다고 한다면 오로지 계산적으로 고려하는 사유의 질주와 그것의 엄청난 성과를 위해 사유할 가치가 있는 것을 포기해도 되지 않은가? 그렇지 않다면 계산적으로 고려하는 사유에 현혹되어 사유할 가치가 있는 것을 지나치는 대신에 사유가 그것에 응답할 수 있는 길을 찾으려고 우리는 애쓰고 있는가?
물어야 할 것은 바로 이것이다. 그것은 사유가 물어야 할 세계 물음(Weltfrage)이다. 이 물음에 대한 대답에서 이 땅과 이 땅 위의 인간 현존재에서 무엇이 일어날 것인지가 결정된다. [316-318]
-- 김재철 옮김(2020)
프레게를 읽은 직후 [동일성과 차이]를 읽었으니 어설피 의분에 빠지지 않을 수 있었겠나. 이만큼 술술 읽히는 건 그토록 열받은 상태로 보낸 세월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부끄럽다고요. 그래도 지금 이런 촉박한 시점에 이 책을 제목만 보고 펼칠 줄 아는 능력이 생긴 게 다 그 덕이라 후횐 없다네. Danke für Ihre Hilf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