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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turday, November 13, 2021

Alain Supiot (2010) L’Esprit de Philadelphie

Alain Supiot (2019): 이처럼 자신의 전통을 현대성의 동력으로 삼으려면 자신만이 가지고 있는 고유함을 파악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산업혁명 이래 제국주의에 잘 저항했던 나라들은 스스로를 파괴하거나 예속시키지 않으면서도 서양 근대성의 일부를 제 것으로 삼을 줄 알았다. 한국은 그중 하나다. 타인을 이해하기 위해 노력할 때 자기 자신을 좀 더 잘 이해할 수 있는 기회가 생긴다. 다양한 문화 사이에 가교를 놓고 가능한 한 많은 사람에게 이방인의 관점을 이해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기 위해 애쓰는 뱃사공 역할이 소중한 까닭도 여기에 있다. 

-- 박제성 옮김(2019: 6) 


"각 분야 학자들에게는 주문서를, '시민'들에게는 초대석을, 입안자와 감독자들에게는 근거 자료를, 개발자들에게는 지침을, 기획자와 운동가들에게는 어휘를"을 묵언의 모토로 간직하고 다리만 놓으려는 내가 내용이 있는 격려를 받은 건 십 년 만에 처음이다. 이 신기한 엽기의 세계 속에 부디 적응되지 말고 일시적 동기화만 이루기를. 생존 가능할 무수한 길들로 애써 빠져 나왔다가 도로 생존할 수 없는 꼭 하나의 길로 다시 들어가는 대신 얻은 욕구 충족은 그 소원을 이미 성취한 것으로 깔끔하게 끝내길. (나의 욕구를 위해 나의 생존을 포기하다니, 난 나한테 너무 헌신적이야.) 그렇게 아직도 보내고 있는 시간의 끝자락에서. 

함부로 옮겨 놓기엔 아까울 만큼 정신의 체취가 뚝뚝 묻어난다. 존경하는 사람은 많지만 사표가 생긴 건 오랜만이다. 더구나 뜻밖이라 얼떨떨. 다 돌아가셔서 그간 가슴에 못들이 박힌 채 힘들게 지냈어. 공통점은 항상 다른 분야, 계층의 인물이었다는 것. 이제 살 것 같아져서 얼마나 외로웠는지 느끼게 되었다. 

그리고 이방인의 눈들을 갖도록 해 주는 것이 바로 문학의 힘이라고 생각한다. 우리 모두 아르고스, 아니 무한 개의 드론 카메라가 되자.  

난 불만만 많을 뿐 보수적이다. (그러니까 실제 정체는 이중스파이 지망생인 셈?) 이 책으로 확실히 노선까지 맞음을 확인하게 되어서 기쁘다. 직속 제자인 역자의 무서운 안목. 21세기에는 자기 스승 제대로 고르는 능력이야말로 비기의 시작이 아닌 완성 자체다.   

 

Alain Supiot (2010): 오늘날 세계는 경제를 인간의 필요에 일치시키고 금융을 경제의 필요에 일치시키는 대신 경제를 금융의 요구에 일치시키고 인간을 경제에 복무하는 "인적 자본"으로 취급한다. 

이 작은 책자의 목적은 1914~1945년 시기의 경험에서 얻은 사회적 교훈들을 망각한 것으로 보이는 이 거대한 반전을 분석하는 것이다. 그러나 또한 "모든 인간이 인종 · 신앙 · 성별과 상관없이 자유와 존엄과 경제적 안정 속에서 그리고 평등한 기회로써 자신의 물질적 진보와 정신적 발전을 추구할 권리"(필라델피아 선언)를 갖는 세상에 대한 이상을 포기하지 않은 모든 사람에게 필라델피아 정신은 여전히 유효하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도 이 책의 목적이다. 

-- 박제성 옮김(2019: 29-30)



Wednesday, November 03, 2021

Alain Supiot (2015) Governance by numbers

박제성 (2019): 그러나 강자의 지배와 약자의 굴종은 자연의 본성도 아니고 사회의 법칙도 아니다. 인간의 숙명 따위는 더더욱 아니다. 그것은 법이 있어야 할 자리에 법은 없고 힘만 있을 때 나타나는 모습이다. 왜냐하면 법은 힘과 힘의 관계를 법과 법의 관계로 전환시키는 기술이기 때문이다. 법은 권력의 도구이기는 하지만, 또한 권력 그 자체를 구속하는 도구이기도 하다. 법은 권력이 권력을 행사하기 위하여 스스로 자신의 목에 걸어 놓은 올가미이다. 법이 강자의 손을 들어 줄 때가 많지만, 그렇다고 법이 없는 상태가 약자에게 더 유리한 것은 결코 아니다. 힘이 모든 관계와 질서의 기준이 될 때 강자는 약자의 말에 귀를 기울일 이유가 전혀 없다. 강자는 자신의 힘에 근거하여 약자의 생명과 재산을 마음대로 약탈할 수 있다. 힘이 준거인 사회에서 약자는 힘이 없다는 바로 그 이유 하나만으로 어떠한 항의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법이 준거가 되는 사회에서는 강자도 자신의 힘을 법에 근거해서 사용하지 않으면 안 된다. 강자가 법을 위반하면 약자는 법에 근거해서 강자의 힘을 물리칠 수 있다. 힘이 아니라 법으로 이기는 것이 중요한 이유는, 힘으로 이기는 것은 강자의 힘보다 더 강한 힘을 갖고 있는 약자(?)에게만 유효하지만, 법으로 이기는 것은 모두에게 유효하기 때문이다. [7]

노동은 생존의 필연성과 관려되어 있기 때문에 지배와 종속의 위험이 다른 영역보다 더 크다고 할 수 있다. 수치를 모델로 삼는 오늘날의 기업이 노동을 비용으로 취급하여 노동자의 안전과 존엄성을 무시할수록 그러한 위험은 더욱 커진다. 그러므로 수치의 위험성을 경고하고 해법을 모색할 수 있는 가능성이 상대적으로 더 큰 곳도 노동의 영역일 것이다. 알랭 쉬피오에 따르면 그것은 "진정으로 인간적인 노동체제"를 실현하는 것이다. 인간적인 노동이란 고용, 임금, 안전 등 노동을 이행하는 조건들이 인간적이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할 뿐만 아니라, 나아가 노동 그 자체가 인간적인 것이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은 인간의 가장 본질적인 속성을 보장할 수 있는 노동일 것이다. 그것은 곧 말이다. 인간은 무엇보다 먼저 말하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노동자는 자신의 노동에 대해서, 자신의 노동을 통해서, 자신의 노동을 위해서 말할 수 있어야 한다. [7-8] 


공부하는 이유 나랑 똑같은 사람 처음 보네. 어떤 전공이든 어떤 전공도 아니든, 소비자이든 피고용인이든, "말할 수 있게" 해 놓기 위해서다. 오직. 소프트웨어는 가상세계가 아니다. 뚜껑 열라고. 

계산은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기계는 아무것도 '알아서' 하지 않는다. 알아서 하는 '인공지능'이란 없다. 의철학과 법철학이 우선이지만 훌륭한 전문가들에 의해 이미 잘 진행되어 온 것으로 안다. 그리고 이제 우리 보통 사람들의 생활은 생명, 생존, 평등의 문제보다 사소한 것들에, 이래도 되고 저래도 될 것 같다고 생각되는 것들에 적어도 시간상으로는 더 많이 종속되어 있다. 편리, 재미, 취향, 자극, 감동, 교제, 공유, 자기개발, 휴식 등의 이름으로. 알고리듬이 아니라 실은 특정 기술 투자자와 광고주들의 편협한 의사에 의해. 인권에 대해 고민한다면 훨씬 더 섬세해져야 한다. 비판적 문제 제기와 대안에 정당성을 제공한다는 연구 활동이 분과학문들에 갇혀 직업 사회에 머물러 있는 동안 현실에 너무 뒤처졌다. 


Alain Supiot (2015): 숫자에 의한 협치 또는 수치(數治)가 법의 지배를 전복시키는 현상은 계산을 통해서 조화를 꿈꾸는 오래된 역사의 일부로서, 그 가장 최근의 버전이라고 할 수 있는 디지털 혁명은 현대의 상상력을 지배한다. 이 사이버네틱스의 상상력은 입법이라는 용어가 아니라 프로그램이라는 용어로 규범성을 사고한다. 사이버네틱스 세계의 인간은 법이 정하는 테두리 안에서 자유롭게 행위하는 인간이 아니라, 할당된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 외부에서 주어지는 신호에 실시간으로 반응하는 인간이다. [27] 

경제학의 관점에서 볼 때 고문 금지는 다른 가치들과 비교해 그 경중을 가늠해야 한다. 리처드 포스너는 "판돈이 충분히 크다면, 고문도 허용될 수 있다"는 생각을 옹호하는 많은 미국 법률가의 목록에서 첫줄에 있던 사람이다. 여기에서 사회적 효용 계산은, 저울의 한쪽에는 고문 금지를 정당화하는 테러 용의자의 존엄성을 올려놓고, 다른 쪽에는 테러로 인해 희생당할지도 모르는 수많은 사람들의 피해 가능성을 올려놓은 다음 양쪽의 무게를 재는 식이다. '핸드의 공식'을 여기에 적용할 수 있다. 만약 수감자의 존엄성에 대한 침해 비용이 100이고, 테러가 발생할 가능성이 0.1 그리고 이로 인해 피해의 예상 금액이 100만이라면, 계산서는 금방 나온다. 수감자를 고문하는 것이 사회적 효용이 더 크다. 사르트르의 [닫힌 방]에 나오는 주인공처럼, 이제 이것만 물어보면 된다. "말뚝, 철망, 가죽깔때기는 어디 있는가?" 

이처럼 존엄성을 계량할 수 있는 가치로 환원하고 다른 가치들과 비교해 경중을 재는 방법론은 유럽사법재판소에 의해 채택되었다. 우리의 탈근대주의 법학자들과 달리, 판사는 존엄성 원칙을 법의 무대에서 배제할 수 있는 권리를 당당하게 천명할 수 없다. 판사는 실정법이 인정하는 법적 가치를 고려해야만 한다. 하지만 판사는 리처드 포스너와 같은 잣대로 법적 가치를 계량할 수 있다. 즉, 모든 것은 판돈의 크기에 달렸다. 바꿔 말하면, "이제 등가성이 물신화된다". 유럽사법재판소는 바이킹(Viking) 판결에서, 인간의 존엄성에 대한 존중은 비례성의 원칙에 따라 경쟁의 자유, 상품과 자본 유통의 자유 및 서비스 제공의 자유와 "조정"되어야 한다고 판시했다. [210-211] 

확실히 여기에서 비례성의 원칙을 적용한다는 것은 모든 종류의 규칙을 효용 계산으로 환원하고, 불가침의 법이라는 관념을 논증 과정에서 제거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이 불가침성은 독일 기본법에서 인간의 존엄성이 갖는 특징으로 규정하고 있는 것이다. 모든 종류의 원칙을 상대화하는 경향에 맞서는 몇 안 되는 법원들 가운데 하나가 독일 연방헌법재판소라는 사실은 그러므로 놀라운 일이 아니다. 독일 연방헌법재판소에 따르면, "공권력에 자유롭고 평등하게 참여할 수 있는 권리는 인간의 존엄성에 닻을 내리고 있기 때문에 ...... 민주주의의 원칙을 다른 가치들과 비교, 계량할 수 없다. 그것은 불가침의 원칙이다." [독일 연방헌법재판소, 2009.6.30., 2 BvE 2/08 결정, 리스본 조약, §211 및 216.] 

존엄성에 관한 법적 논쟁에 잠시 끼어든 것은, 법경제학이 "모든 가격을 초월하는 것"을 계산할 수 없기 때문에 이 문제를 처리하기 위해서는 어쨌든 그것에 가격을 부여하는 쪽으로 이끌려 간다는 점을 보여주기 위해서 필요했다. 전체주의적 시장에서는 가격이 없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 것과 같다. [211-212] 

-- 박제성 옮김(2019) 

 

내 동기를 알아볼 수 있는 분이 필요했다. 답을 줄 사람이 아니라. 그리고 내 수행이 목표에 얼마나 모자라는지, 어긋나지는 않는지 나보다 몇 층 아래에서 그리고 몇 층 위에서 다시 봐주실 수 있는 분. 그러니까 학위 다음부터가 더 중요했다. 닫힌 방, 이제야 책장에는 있지만 읽지 못했다. 독일법, 자세히는 몰라도 토양을 선택할 수 있다면 그 나라였다. 난 내가 선택할 수 없는 것에는 별로 관심이 없다. 내가 선택하는 것들에 집중하느라. 다만, 그러다 보니, 다른 사람의 선택도 내 것처럼 중시할 뿐. 

그렇게만으로는 안 된다는 것은 알겠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