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게 리스트는 이 연주 전후로 완전히 다른 의미가 되었다. 나도 이 곡을 독보적 테크닉을 과시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으로 느끼며 살아왔었으니까. 3년 전 이 공연 영상을 듣기 전까지는. 예술에서 기교란 단지 기교가 미흡할 때에만 붙여지는 이름이었다는 비밀과 함께. 여름이다.
誠者,天之道也;誠之者,人之道也。 ( Chéng zhě, tiān zhī dào yě; chéngzhī zhě, rén zhī dào yě. ) ---- 子思 《禮記·中庸》22:7 _____ Der bestirnte Himmel über mir, und das moralische Gesetz in mir. ---- Immanuel Kant (KpV: AA 05: 161.33–36) ________________________ ἃ γὰρ δεῖ μαθόντας ποιεῖν, ταῦτα ποιοῦντες μανθάνομεν (What we have to learn to do we learn by doing.) ---- Ἀριστοτέλης (Nic. Eth. 1103a33)
Sunday, June 20, 2021
손열음 Yeol Eum Son의 "La campanella"
Monday, March 15, 2021
Robert Schumann (1838) Kreisleriana, Op. 16 by Yeol Eum Son
Kreisleriana has been my most beloved schumann. Son is one of the best.
Thursday, May 03, 2018
강남 1970 Gangnam Blues (Yoo Ha, 2015)
연출: 유하 (Yoo Ha) 2015
KMDb: 강남 1970
iMDb: https://www.imdb.com/title/tt3698118
e-book: 강남 1970
2018-05-02 물의 밤 @내 방
박정희의 대선 자금 마련을 위해 진행되었던 '남서울 개발 계획'에 휘말린 폭력배들의 이야기. 이것은 이명박과 박근혜 덕분에 우리에게도 아주 친숙하고 곧바로 이해가 가는 역사가 되었기도 하다. 이제 우리는 그 맥락을 볼 수 있다. 원조 격이다. 국토의 지도와 사회의 계층 구조와 시대적 가치관의 기준을 바꿀 만큼 엄청났던. (자고로 태조만한 인물이란 왕통에 없다 했던가.)
그 사이, 벼락 부자의 속물 근성이 비웃음과 타박거리에서 경외와 꿈의 대상으로 바뀌었다. 갑질의 정당화 원리와 그보다 더 무서운 동조적 침묵 기제의 탄생. 샤일록의 순진함이 아닌 김선달의 성실함. 아는 사람은 다 알아 모르면 그저 바보일 뿐 아니라 게으름뱅이가 되는 그것. 교사와 상관, 교수와 상사에게서 습득하는 생존 법칙. 학위와 승진 여부를 가르는 기준선이 그어지는 역학 공식. 성욕 자위 도구를 직장에서 제자와 후임으로 사용할 줄 알아야 확실히 안심할 수 있는 권력. 넣어 줄게는 때려 줄게는 살려 줄게인 등식. "가만히 있어라"라는 음성이 이토록 당당해져 갔던 과정. (그 중간을 나도 살아남았다. 중고등 시절 가장 많은 힘을 기울였던 것은 대입 공부가 아니라 교사들로부터 내 몸과 부모의 돈을 지키는 것이었던 현실.)
1985년 초등 1년을 마친 겨울 방학 때 종로구 계동의 단독 주택에서 송파구 방이동의 신축 아파트로 이사 와 1999년까지 성장기를 살았던 나 또한 '강남역 6번 출구 뉴욕 제과 앞' (아니면 '신천역 잠실 성당 골목 지나'도 있었다.) 시절의 일원이다. 나야 타워 레코드와 핏자집 정도에만 갔지만, 친구들은 노래방과 잘 생긴 오빠가 홀 아르바이트를 하는 카페에 드나들었다. 추억거리 하나 없이 모범생 역할로 자기 방에 틀어 박혀 양자역학과 현대 시로 성적 쾌락을 배우며 오로지 공상적으로만 일탈에 허우적댈 수밖에 없었던 학생 여자였기에, 그 시절은 내게 손으로는 결코 잡을 수 없는 단순한 정서로만 남았다. 그래 친구들에 비해서는 지극히 아련하고 미미하지만, 어쨌든 피부에 스며 있다.
유하 감독의 '강남 3부작 시리즈'는 그러니 십 년 전쯤으로 떨어져 있다. 한국이라면, 서울이라면, 특히 강남이라면 십 년은 너무 긴 세월인데, 뭐랄까... 강남 7학군이 "아닌" 강남 8학군, 그러니까 그 제8학군에서 초중고를 보냈다라는 일종의 애매함을 대중매체에서 건드려 주는 경우가 (김성수 감독의 [비트]를 제외하고는) 별로 없기에, 그는 나에게 좀 특별하다. 대체로 비껴가지만 살짝은 건드려 준다고나 할까? 좌우간 나도 배추 밭에 올림픽 경기장과 초고층 국제 선수촌이 지어지는 과정을 매일 등하교길에서 목격했던 것이다.
감독의 영화를 보는 이유를 꼽으라고 한다면, 고증 때문이라고 말할 것이다. 고증에 애써 그곳, 그때의 풍파를 그리면서도 늘 한사람의 신발을 벗지 않는다는 점이 마음에 들고.
Friday, October 14, 2016
음악 낭송회 <낭만적인 가을> Romantischer Herbst - Robert Schumann und Carl Reinecke @Goethe-Institut Seoul
Nächsten Freitag, den 14. Oktober gibt es wieder eine musikalische Lesung in unserer Bibliothek! Studierende der German School of Music an der Kangnam University und der Schauspieler Kyeong-Ik Kim werden Texte und Musik von und zu Robert Schumann und Carl Reinecke präsentieren. Der Eintritt ist frei - kommt einfach vorbei!
Robert Schumann
- Fantasiestücke, op. 12
(E.T.A. Hoffmann - Fantasiestücke in Callots Manier)
Carl Reineckes
- Ballade für Flöte und Klavier op. 288
- Undine op. 167
2016.10.14 늦은 06:30 @주한독일문화원 도서관: 블루
왜냐하면 ich liebe Schumann und Hoffmann.
서울 미디어아트 비엔날레 (SeMA Biennale) 2016 네리리 키르르 하라라 Neriri Kiruru Harara
네리리 키르르 하라라 Neriri Kiruru Harara
2016.10.14 @서울시립미술관: 블루
Pierre Huyghe 피에르 위그 (2014) Untitled (Human Mask)
Tuesday, March 22, 2016
사랑에 빠지는 순간 - 이지혜
왔니. 고생했다.
앞치마를 풀어헤치는 손
감기 걸린다. 방에서 자.
흔들리는 머리카락을 쓰다듬는 손
조심히 가. 건강하고.
작은 점이 될 때까지 흔드는 손
내가 사랑에 빠지는 순간은
후광이 비치지도
꽃이 날리지도 않았다
Sunday, March 20, 2016
풍경으로 보는 인상주의 Impressionist Landscapes @sac
Tuesday, January 19, 2016
행복 - 나태주
저녁 때
돌아갈 집이 있다는 것
힘들 때
마음속으로 생각할 사람 있다는 것
외로울 때
혼자서 부를 노래 있다는 것.
Friday, June 19, 2009
찰리 브라운 카페 Charlie Brown Cafe
www.charliebrowncafe.net
tae의 안내로 zmn, dejawa 등과 오늘 처음 가자마자 마이 페이버릿~ 카페로 등록.
스누피는 내가 제일 좋아하는 만화 캐릭터이다.
스누피 파일 폴더 샀다. (여기에 넣고 다니며 논문 열심히 읽어야지!)
다음에 가면 스누피 실내화를 꼭 사고 말리라...... 쿠션도.
Wednesday, April 08, 2009
네크로슈스 Eimuntas Nekrošius (2009) 파우스트 Faust
2009-04-04 흙의 낮 @LG아트센터
이성과 고뇌의 좌절. 자승자박 식의 신념과 인내를 고수하며 일상의 기쁨과 육체적 쾌락을 희생시키는 삶에 대한 회의. 두 팔을 내뻗고 "메뚜기처럼" 끊임없이 뛰어 보아도 자신의 발 아래도 보지 못하는 인간 지성의 한계. 이상을 향해 매진하는 삶의 맹목성을 자각하고 절망하는 순간, 신에게선 고달프고 어리석은 땀내를, 악마에게선 아름답고 신선한 바람을 느낀다. 그 절망에마저 의심을 거두지 못하고 괴로워할 때, 무대 위에서 책들이 묶여진 의자가 떨어진다. 고상한 품격의 상징이었던 검정은 죽음의 색으로 변하고 그 둔중한 반향과 파우스트의 나약한 충격이 뒤섞이는 동안, 자랑스럽게 펄럭이던 메피스토펠레스의 붉은 망토가 그리워진다.
2006년 <햄릿>으로 나를 사로잡았던 네크로슈스가 괴테를 들고 온다는 소식을 듣고 겨우내 기다렸던 공연. 효과를 위한 장치가 아니라, 그 자체로 배우보다 더 명확하고 풍부한 의미를 전달해 주던 시각적, 촉각적 은유들이 여전했다.
몰입을 방해하는 대사가 많았고, 배경음악의 선곡과 원작에 대한 해석이 아쉽기는 했다. 일차적으로 독해하고 말기에는 너무나 고전이었으니까... 가시를 세우자면, 네크로슈스에게 네크로슈스의 어법만이 "뼈다귀처럼" 남았다고나 할까. 숙성과 초월에 이르지 못한 열정에 쉬이 만족하기에는 그를 이미 거장으로 보았던 나의 기대가 아깝다. 괴테를 뛰어넘은 뒤라야 괴테를 보여 줄 수 있을 텐데 말이다. 그가 셰익스피어를 분해시키고서 네트로슈스가 되었듯이. (나는 왜인지 연극에 대해서 유독 신랄해진다.)
Tuesday, September 11, 2007
로베르 르빠주 Robert Lepage (2007) 안데르센 프로젝트 The Andersen Project : A Modern Fairy Tale
2007-09-09 해의 낮 @LG아트센터
좌절에 관한 이야기.
르빠주는 안데르센의 일기를 통해 그의 사회적, 개인적 좌절을 발견했다. 아이들을 싫어했던 안데르센은 자신을 동화작가라 여기는 덴마크를 떠나 파리 등지의 인사들과 교류하기 위해 여행을 다녔고, 양성애적 성향을 가지고 있었으나 이성과 동성 모두로부터 거절당했다. 르빠주의 분신인 등장인물 프레드릭은 캐나다 출신 작사가로 일 때문에 파리에 오지만 직업적 성취를 얻지 못한 채 연인과 결별에 이른다. 안데르센과 프레드릭을 통해 르빠주는 문예 분야에서 지난 수백 년간 존속되고 있는 일종의 '파리 컴플렉스'(?)를 소재로 삼았다.
19세기와 21세기를 관통하는 화려한 문화의 도시 파리는 예술과 지성의 중심이면서 동시에 성 상품과 차별이 범람하는 퇴폐적이고 폭력적인 공간이기도 하다. 픽샵과 파업으로 대변되는 현재의 파리의 모습에는 자유라는 표상 아래 자리한 파리지엥의 고독과 선진적인 사회제도와는 동떨어진 이민자들의 비참한 생활이 교차한다. 오페라 극장 디렉터 아르노의 아내는 그의 가장 친한 친구와 바람이 나 딸을 데리고 떠나 버리고, 모로코계 청소부 라시드는 타인의 체액을 닦는 일을 한다.
네 명의 등장인물들의 소망과 목표가 좌절되어 가는 과정이 마치 영화처럼 빠르게 전환되는 장면들 속에서 밀도 높게 그려졌다. 이브 자끄는 변검에 버금가는 묘기로 영어와 프랑스어, 왈츠와 테크노를 오가며 일인극을 무색케 하는 연기를 펼쳤다. 체구와 두상까지 완전히 달라 보여서 신기했다.
거품처럼 발화하는 존재. 꺾이기보다는 증발해 버리는, 갇히기보다는 죽어 버리는.
절실하면서도 집착하지 않는 결벽증.
변신과 여행에 대한 갈망. 낯설음와 위험에 대한 공포증.
첨단기술을 사용한 멀티미디어 무대 연출로 유명한 르빠주의 2003년 내한 공연 <달의 저편>을 놓쳤던 아쉬움에 더욱 기대감을 가지고 찾았던 작품이다. 일반적인 정극과 비교하면 신선하고 파격적인 형식임에는 분명했지만, 나로서는 무슨 기술들을 적용했는지 대체로 읽을 수가 있었기에 전혀 낯설지 않았다. (기술면에서는 오히려 내가 하고 있는 작업들이 더 앞서 있다.) 깊은 인상을 받았던 것은 기술 자체가 아니라 그것이 작품 내에서 어떤 식으로 발현되는가에 관한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극에 대한 내적인 이해를 배제하고는 아무런 의미도 찾을 수 없을 만큼 르빠주의 <안데르센 프로젝트> 그리고 안데르센의 두 소설과 유기적인 관계를 가지고 있다. 단적으로 말해서, 그는 형식적인 실험을 위해 기술을 적용하지 않는다. 그러한 태도는 전혀 찾아볼 수가 없었다. 그는 오로지 메시지, 내용에 집중하며, 전달하고자 하는 것들을 가장 효과적으로 재현하기 위해 적합한 수단을 개발하여 취할 뿐이다. 그는 아무 것에도 사로잡혀 있지 않다. 그 점이 가장 훌륭하다. 그러한 순수하고 엄격한 접근이야말로 미디어 아트를 둘러싼 모든 표피적인 논쟁들, 진정성에 대한 회의, 방법적인 다양성에 의한 무의미한 선별 작업들을 종식시킬 명쾌한 판정이 아닌가 싶다.
자, 그의 말을 따라서, 드라이아드의 파멸과 그림자의 승리라는 결말로 나를 이끌 내 안의 순결하고 불결한 욕망들, 그것을 실현시키려는 의지와 억압하려는 의지 사이의 갈등들, 원하지 않아도 필연적인 외부로부터의 오해들, 무고한 타자에 대한 나의 이기심과 뜻하지 않았던 사악함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든 나쁜 것들을 천상으로 승화시킬 수 있는 인간의 능력, 그리고 불확실한 힘들의 충돌 사이에서 우연히 발생되는 희망이라는 이름의 가능성들... 이 모든 열린 구조로의 자유로운 개입을 감행하자.
cf.
The Hans Christian Andersen Center
김영욱@채널예스: '미운 오리 새끼'의 아버지, 안데르센을 찾아서
Wednesday, December 27, 2006
Empire of Dreams - Rene Magritte exhibition @SeMA
2006-12-27 물 @서울시립미술관: 뮤젠
어머니가 르네 마그리트 애호가이시라 전시 기획단계에서부터 우리 가족 모두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곧 벨기에 왕립 미술관에 르네 마그리트 미술관이 완공되는데 이번에 전시된 대부분의 작품들이 거기에 들어가게 된다고 하니, 앞으로 브뤼셀에 방문하지 않는 한 다시 보기 어려울 것이다.
어릴 적부터 친근하게 접해왔던 그의 대표작들을 직접 보는 즐거움이 남달랐다. 그런데 의외로, 유명한 작품들 중 상당수가 빠져 있어서 아쉽기도 했다. 그런 것들은 대부분 지금 유럽 등 다른 곳에서 전시 중이라고 한다.
"나는 고대 혹은 현대 미술과의 단절을 선언한다."
초현실주의를 대표하는 작가이면서도 다른 초현실주의 화가들과는 두드러진 차이를 보이는 그의 작품은 '가장 현실적인 초현실'을 담고 있지 않나 싶다. 낯설지 않은 그의 상상의 세계는 순식간에 관객의 이성을 뒤흔들어 놓지만 결코 어렵지 않게 느껴진다.
"초현실주의는 우리가 꿈을 꾸면서 가졌던 것과 유사한 자유를 실제 삶에서도 요구한다."
2층을 반이상 둘러본 이후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1시부터 시작된 도슨트의 가이드를 따랐다. 근간에 급격히 충실해지고 있는 국내의 전시 기획/진행의 일면을 느낄 수 있을 만큼 유익하고 재밌는 설명이었다. 마그리트는 지적이고 자유로우면서도 동시에 현실성과 적응력을 겸비한 사람 같다. 그는 본래 문학에서 출발했다고 한다. 그 사실은 대학 전공을 떠나서도 장르가 극심하게 혼합되는 양상을 보이고 있는 미디어 분야를 맴돌고 있는 내게는 여러가지 생각을 하게 만들었다. 이방인의 눈이야말로 정확하고 심오한 것이다. 그의 타협하지 않은 개성과 형식적인 유미주의의 매혹을 털어낸 단순성이야말로 단지 초현실주의란 하나의 사조로부터 르네 마그리트라는 이름을 부각시킨 원인이 아니었을까 생각한다.
"나의 회화에는 상징이 존재하지 않는다. 상징은 시의 신비한 현실에 집착하기 위한 것이며 전통에 매우 충실한 생각에 속한다."
전시된 작품 중 가장 좋았던 것은 <대화의 기술>이다. 도슨트의 설명으로 'REVE'가 프랑스어로 '꿈'이라는 사실을 알았다. 어머니는 이 작품이 좀더 대작이었으면 좋았을 것 같다고 하셨는데 나 역시 같은 아쉬움을 느꼈던 참이었다. 하지만 그는 캔버스의 사이즈에 의해 압도하기보다는 전체적인 위상을 관조하게 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어쩐지 바벨 탑을 연상시키는 작품의 메시지가 너무나 모호하면서도 극명하다. 해석을 거부했다는 그의 작품들은 오히려 끊임없는 해석의 실마리를 던지고 있다.
"나는 보이는 것이 보이지 않는 것보다 우월하다고 생각하지 않고 그 역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한다. 보이지 않는 것의 형체를 그리려 하는 것은 너무 순진하고 어리석은 것이기 때문에 나는 보이는 것만을 그린다."
작품제목 중 '흑마술'을 '검은 마술'이라 오역(?)한 것이 눈에 띄었다. 오컬트란 전문 미술사가의 영역은 아닌 모양이다. :p 마그리트가 에드거 앨런 포 등을 원작으로 하는 판타지 영화를 좋아했었다는 사실을 홈페이지에서 읽고 순간 놀랐으나 다시 생각해 보니 절로 고개가 끄덕여진다.
'아마추어 영화감독으로서의 마그리트'라는 부제를 단 3층의 비디오 전시장에서는 최근에 들었던 실험 애니메이션 강의와 맞물려 소위 디지털 혁명 이래의 대중문화/대안예술의 핵심을 꿰뚫고 있는 마그리트의 선견에 충격을 받았다. 요즘에야 나를 비롯하여 이미 미디어가 크게 변했기 때문에 또는 계속해서 빠르게 변하고 있기 때문에 미디어에 주목하는 것이다. 새로운 형식은 새로운 내용을 만들어 낼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현재의 미디어 아티스트/디자이너들은 이끄는 자이기보다는 따르는 자에 그친다고도 볼 수 있다. 우리는 아직 미디어를 온전하게 도구화하지 못했다고 본다. 오히려 미디어에 압도되어 있다고나 할까. 다시 지적하자면, 엄격한 의미에서, 현대의 미디어 아티스트들 다수가 예술가라 지칭되기에는 무리가 있다. 근간에야 겨우 그러한 사실을 인정하고 다음 단계로 가려는 시도를 하고 있을 뿐이다. 그러나 아직 등장하지 않은 방법과 형식을 초월하여 의미론적인 실험과 실험정신을 넘어서는 유희를 즐겼던 그는 정녕 천재였다.
"말은 이미지가 보여줄 수 있는 것, 그것을 표현할 수 있다. 언어가 말할 수 있는 것, 그것은 이미지가 보여줄 수 없다. 그러나 그려진 이미지가 보여주는 것과 말로써 표현되어지는 것은 같은 것이다."
우리가 지금 아는 것을 그는 먼저 알았다. 아니, 우리가 지금 좋아하는 것을 그는 먼저 좋아했다. cut & paste, 중첩, 자기복제, 배치, 오브제 중심, 왜곡.
말을 배우기 전부터 달리를 알았고 그를 모방했지만 그를 좋아했던 적이 없었다. 데 키리코의 작품들을 광적으로 좋아하지만, 그의 작품 중에는 내가 혐오감 이외의 관심을 갖기 어려운 것들도 있었다. 르네 마그리트는 늘 쉽고 친밀감을 느꼈던 만큼 만만하게(?) 여겼던 것도 사실이었다. 그러나 그는 가장 지적이고 철학적인 화가였음을 알게 되었다. 이제 나이가 들어, 나는 달리를 존경하고 데 키리코를 해석하며 마그리트를 사랑하게 되었다.
Sunday, November 12, 2006
제4회 서울 국제 미디어 아트 비엔날레 [두 개의 현실] Media-City Seoul 2006: Dual Realities
2006-11-11 흙의 낮 @서울시립미술관
2004년 3회 전시 때보다 전반적으로 작품성이 훨씬 뛰어났다. 기술은 오히려 적게 적용된 반면 - 영상물의 단순한 재생이나 심지어 이제는 누구에게나 익숙한 디지털 편집만을 가한 한 컷의 스틸 사진 등. 역시, 미디어 아트는 '미디어'라는 장르 특성보다 '아트'로서의 예술성이 관건임을 느꼈다.
3회 때는 [디지털 호모 루덴스]라는 모토로 소위 '놀아 보자'는 취지와 어울리는 각종 비디오/뉴미디어/게임 작업들이 뒤섞여 있어, 일반인의 호기심을 끌기에는 충분했지만 어떠한 감동이 느껴지지 않아 회의감마저 들었었다. 반드시 아이들만을 감상자/이용자로 상정했다고는 볼 수 없는 다수의 실험적인 작업들이, 신기술과 그에 따른 생활문화의 변화에 너무나 익숙해져 있는 한국의 '어른들'로부터 쉽사리 관심을 받기에는 어려운 현실 탓인지는 몰라도 지나치게 '이것은 유아용입니다' 라는 조금 과장하면 자기비하에 가까운 명목 아래 정당히 평가받지 못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씁쓸함도 컸었다. 물론 원래부터 아이들을 대상으로 제작된 작업들을 무시하는 것은 아니지만.
이중 현실. 보다 내적인 시각에 기반한 기획의도를 반영하는 제목이다. 그리고 전시 내용은 그러한 기획의도가 단지 시대 현실에 대한 날카로운 또는 진부한 해석에 의해 짜맞추어진 것이 아님을 확실히 느끼게 해 주었다. 국제 비엔날레라는 규모와 위치를 고려했을 때, 그 타협하지 않은 충실함을 위해 어떠한 고민과 얼만큼의 희생이 따랐는지 내가 알 수는 없지만 얼핏 짐작할 수 있을 것도 같은 기분이다. 희망을 가질 수 있게 한 전시였다. 한심하지만 뒤늦게, 알고보니 큐레이터 군에 레프 마노비치가 있다!
히라키 사와의 <Trail>을 최고로 꼽겠다. 일상의 공간과 낯익은 환상을 세련되지는 않지만 매혹적으로, 충격적이지는 않지만 인상 깊게 연출한 작가의 미적 감각과 발상에 찬사를 금할 수 없다. 작품을 사고 싶을 정도다. 여러 사람들에게 보여 주고 싶은. 모든 사람들이 좋아하리라 확신하는. 너무나 마음에 드는 작품을 발견했을 때 흔히 '내가 작가였다면 했을 것 같은 작품이다', '하고 싶었던 작업이다', '나도 이런 생각 자주 하는데', '이 작가는 나와 같은 류로군' 등의 생각이 든다. 이 작품이 그랬다. 때로는 늦게라도 모방 충동이 들기도 하고, 딴에는 '오마주'로 바치고 싶다는 허영에 사로잡히기도 한다. 물론, 약간의 질투심과 모종의 투지가 따르기도 한다. 좌우간 짜릿하고 황홀한 경험이 아닐 수 없었다.
<마우어 공원>은 작가의 의도나 작품의 의미를 따지기 전에, 일단 영상미가 내 취향이었기에 첫눈에 들어왔던 작품이다. 따져 보면 너무 하다 싶을 정도로 카메라의 초점을 이용한 거의 유물에 가까운 작업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2006년에도 캔버스 위에서 정물화가 그려지고 있다. 지적인 유희만이 예술적 가치를 가지는 것이 아님을 새삼스럽게 느끼게 하는 작품이었다. 때로는 위기감으로 때로는 그리움으로, 위험스럽거나 포근하게, 우울하거나 상쾌하게. 단조로운 풍경 안에 거대한 서정시를 품게 한 연출력이 훌륭하다. 시점의 변화를 노골적으로 유도함으로써 감상자를 단지 관찰자가 아닌 주인공으로 만들어 버리는 결과가 신선하게 다가왔다. 심정적인 착시를 불러일으킨다고나 할까.
후세인 살라얀의 <공감 피로>는 매우 이지적인 작품이다. 일단 제목부터가 그렇지 않은가? 물론 감상하고 나오면서 제목을 다시 상기했을 때에야 의미가 완전히 이해되기는 했지만. '자기 서술'을 하는 작품이 작가 이외의 타인에게서 이해나 (때로 매우 열정적인 감상자의 경우) 공감을 얻는 것까지는 몰라도 감동을 주는 경우란 극히 드물다. 그러나, 작가가 서술의 대상인 자신을 타자화하는 능력을 가졌다면, 얘기는 달라진다. 내면으로부터의 비명을 세상을 향해 지르는 용기를 감수성으로 착각한 나머지 스스로가 무대의 주인공이 되고자 하는 욕구를 창작욕이라 주장하는 작가들이 있다. 특히, 미디어 아티스트들 중에 많은 것은 것 같다. 그러나, 개인적으로, 관조하지 않는 예술, 은유나 함축이 결여된 예술은 예술이라 부르지 않는다. (대신, 모든 작업이 예술이어야 한다는 법은 없다고 생각한다. 실험 예술에는 두 가지 종류가 있다고 생각한다. 실험적 예술. 예술적 실험. 일단 생략.) 자신에 대한 공감, 그 공감에 반응하는 자신, 그러한 반응에 대한 관찰. 자신을 예술로 채우려 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를 순수하게 예술의 대상으로 하는 냉철하고 객관적인 시선을 가지면서도 여전히 예술적인 태도를 견지하는, 모순에 가까운 상태를 유지할 수 있는 작가의 정신력을 존경한다.
my most favorites:
히라키 사와 Hiraki Sawa <흔적 Trail> (2005, video with sound)
디에트마 오펜후버 Dietmar Offenhuber +샘 오인거 Sam Auinger +한스 스트로블 Hannes Strobl <마우어 공원 Mauerpark> (2005, DVD video)
후세인 살라얀 Hussein Chalayan <공감 피로 Compassion Fatigue> (2005, digital video)
최병일 Choi, Byoung-Il <시각장치 01_버전 1.5 Visual Device01_version 1.5> (2005, mixed media installation)
루시아 코치 Lucia Koch + 가브리엘 아체베도 벨라르데 GabrielAcevedo Velarde <올린다 하늘빛 Olinda Celeste> (2005, animation on DVD)
류호열 Ryu, Ho-Yeol <기차역 1 Hauptbahnhof 1>, <기차역 2 Hauptbahnhof 2>
박성훈 Park, Seong-Hoon <저 끝의 시작 안에... in the prologue of end> (2006, paper animation)
my favorite:
존 제라드 Jogn Gerad <일 년에 한 번 미소짓는 초상화 - 메리 Portrait to Smile Once a Year (Mary)> (2006, realtime 3D)
3D Production in collaboration with Werner Potzelberger-Yama Vienna/ Display production_Jakob Illera-Inseq PD, Vienna
미아오 시아오천 Miao Xiaochun <사이버 공간에서의 최후의 심판 - 나는 어디로 가는가? The Last Judgement in Cyberspace - Where Will I go?> (2006, 3D computer animation)
프리드리히 키르쉬너 Friedrich Kirschner <2184년의 사람 Person 2184> (real-time 3D computer animation animation)
크랙 월쉬 Craig Walsh <상호참조 Cross-Reference> (2004, single channel video installation) Craig Walsh
빅빅보스 Bbboss (천 시아오윈 Chen Xiaoyun + 찐 샨 Jin Shan + 천 웨이 Chen Wei) <다섯 개의 문 Five Doors> (2006, interactive sound installation)
코헤이 아사노 Kohei ASANO + 코스케 마츠우라 Kosuke MATSUURA <뜰 Garden> (2005, interactive installation)
자카리 리버만 Zachary Lieberman <제스처 장치 Gesture Machine> (2006, interactive installation)
미 첼 테란 Michelle Teran + 제프 만 Jeff Mann <살아있는 형상: 원격키네틱스 LiveForm: Telekinetics> (2004, live art event with custom electornics, robotics, and software; network, found materials, food)
and:
카타리나 뢰프스프롬 Katarina Lofstrom
린 허쉬만 Lynn Hershman Leeson
이이남 Lee, Yi-Nam
소프트패드 Softpad
악셀 로흐 Axel Roc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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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riday, November 03, 2006
Eimuntas Nekrosius 네크로슈스 (2006) Hamlet 햄릿
2002년의 내한 공연을 놓치고 얼마나 아쉬웠었는지 모른다. 예상보다 더... 독특한 장치들이 만들어 내는 효과들이 내가 해 보고 싶어서 오랫동안 안달하고 있는 시각적 이미지들과 비슷했다. 재료들이 완전히 동일한 것들도 많았다. 그래서 기분이 좋기도 안타깝기도 했다.
네크로슈스의 햄릿은 어린아이이다. 그는 어머니가 바지를 입혀 주어야 할 정도로 어리다. 또는, 여린 영혼의 햄릿에게 일국의 왕세자라는, 강한 자들 중에서도 강한 자의 역할이 강요된다. 고민을 한다는 것은 모른다는 뜻이다. 햄릿은 현실은 물론 자신에 대해서도 알지 못하여 헤매고 무섭고 불쌍한 영혼이다. 그는 편지를 물에 녹여 없애고 얼음을 깨뜨린다. 폭력이다. 그의 계략과 투쟁에는 전략이 없다. 폭력은 불안정하다. 폭력은 미숙함의 발현이다. 순수와 공포가 만나면 광기가 된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이익을 추구해서가 아니라 망령의 원한을 위해 대신 복수하려다가 죽는다. 희생이다. (희생은 남성미의 극치이다.)
네크로슈스의 오필리어는 자연이다. 자연은 의지가 없기에 정복가능하지만, 존재하는 모든 것을 품기에 무한하다. 괴로운 햄릿이 그녀를 찾아왔을 때 그녀는 검은 천으로 물이 엎질러진 마루바닥을 닦고 있다. 내게는 천의 색이 심상치 않아 보였다. 검은 색은 모든 빛을 흡수하는 색이다. 천은 물을 흡수한다. 포용이다. (포용은 여성미의 극치이다.) 레어티스가 햄릿과 화해할 때 그는 검은 천을 뒤집어 쓴다. 검은 천은 역시 용서인 것이다.
바람이 불면 흔들리는 잎새처럼, 밟으면 밟힐 수밖에 없는 들풀처럼, 휘저으면 물결이 일어나는 시내처럼. 오로지 의존적이기만한 그녀가 사실은 모든 것을 품는다. 자연이다. 어디에도 얽매이지 않고 이리저리 흔들리고 흘러가는 자연이다. 그래서 그녀는 연약하고 동시에 강인하다. 그래서 항상 의존적이면서도 동시에 누구보다 자유롭다. 오필리어가 죽음에 이르는 순간의 장면은 이 모든 것을 보여준다. 그녀는 쉼없는 에너지로 모든 것에 이끌려 모든 것을 좇다가 모든 것을 품는다. 순수와 고통이 만나면 파멸이다. 그러나 파멸도 생명 활동이다.
클로디어스는 잔에 담긴 물(현실 또는 가능성)을 마시고 잔(여건 또는 결과)을 깨뜨리고 별짓 다한다. 그는 행동이다. 과거의 행동을 후회하고 현실의 행동에 죄책감을 느끼고 미래의 행동을 치밀하게 계획한다. 그는 확신에 차 있기 때문에 불안하다. 반면, 햄릿은 의심에 차 있기 때문에 불안하다. 그는 알기 때문에 괴롭다. 햄릿은 모르기 때문에 괴롭다.
거트루드는 의지이다. 그는 죽은 남편을 그리워하고, 아들을 사랑하나, 지금의 왕을 필요로 한다. 그녀는 단지 반응한다. 그러나 그녀는 모두에게 중요한 관심의 대상이다. 모두가 그녀의 진심을 알고자 하지만, 사실 그녀의 진심은 현실에 아무런 영향력이 없다. 동기가 없는 그녀는 어떠한 동기부여도 견디지 못한다. 그리하여 의심하거나 주의하거나 방지할 능력이 없다. 반응으로서의 의지는 무능일 뿐이다.
폴로니어스는 걱정이다. 그는 불행을 방지하기 위해 관찰하고 예견하고 경계하고 방어한다. 그러나 그의 모든 노력은 그 자체로 커다란 요인으로 작용하여 결정적인 영향력을 미친다. 그가 오필리어를 단속하지 않았더라면 햄릿과의 관계가 달라졌을지도 모른다. 그가 왕비의 방에 숨어들지 않았더라면 그는 죽지 않았다.
망령은 물론 불안이다. "불안이 영혼을 잠식한다." 햄릿이 죽자, 망령이 아무리 애써 보아도 드럼은 더 이상 울리지 않는다. 불안이 잠식할 영혼이 사라지면, 불안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