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09-09 해의 낮 @LG아트센터
좌절에 관한 이야기.
르빠주는 안데르센의 일기를 통해 그의 사회적, 개인적 좌절을 발견했다. 아이들을 싫어했던 안데르센은 자신을 동화작가라 여기는 덴마크를 떠나 파리 등지의 인사들과 교류하기 위해 여행을 다녔고, 양성애적 성향을 가지고 있었으나 이성과 동성 모두로부터 거절당했다. 르빠주의 분신인 등장인물 프레드릭은 캐나다 출신 작사가로 일 때문에 파리에 오지만 직업적 성취를 얻지 못한 채 연인과 결별에 이른다. 안데르센과 프레드릭을 통해 르빠주는 문예 분야에서 지난 수백 년간 존속되고 있는 일종의 '파리 컴플렉스'(?)를 소재로 삼았다.
19세기와 21세기를 관통하는 화려한 문화의 도시 파리는 예술과 지성의 중심이면서 동시에 성 상품과 차별이 범람하는 퇴폐적이고 폭력적인 공간이기도 하다. 픽샵과 파업으로 대변되는 현재의 파리의 모습에는 자유라는 표상 아래 자리한 파리지엥의 고독과 선진적인 사회제도와는 동떨어진 이민자들의 비참한 생활이 교차한다. 오페라 극장 디렉터 아르노의 아내는 그의 가장 친한 친구와 바람이 나 딸을 데리고 떠나 버리고, 모로코계 청소부 라시드는 타인의 체액을 닦는 일을 한다.
네 명의 등장인물들의 소망과 목표가 좌절되어 가는 과정이 마치 영화처럼 빠르게 전환되는 장면들 속에서 밀도 높게 그려졌다. 이브 자끄는 변검에 버금가는 묘기로 영어와 프랑스어, 왈츠와 테크노를 오가며 일인극을 무색케 하는 연기를 펼쳤다. 체구와 두상까지 완전히 달라 보여서 신기했다.
거품처럼 발화하는 존재. 꺾이기보다는 증발해 버리는, 갇히기보다는 죽어 버리는.
절실하면서도 집착하지 않는 결벽증.
변신과 여행에 대한 갈망. 낯설음와 위험에 대한 공포증.
첨단기술을 사용한 멀티미디어 무대 연출로 유명한 르빠주의 2003년 내한 공연 <달의 저편>을 놓쳤던 아쉬움에 더욱 기대감을 가지고 찾았던 작품이다. 일반적인 정극과 비교하면 신선하고 파격적인 형식임에는 분명했지만, 나로서는 무슨 기술들을 적용했는지 대체로 읽을 수가 있었기에 전혀 낯설지 않았다. (기술면에서는 오히려 내가 하고 있는 작업들이 더 앞서 있다.) 깊은 인상을 받았던 것은 기술 자체가 아니라 그것이 작품 내에서 어떤 식으로 발현되는가에 관한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극에 대한 내적인 이해를 배제하고는 아무런 의미도 찾을 수 없을 만큼 르빠주의 <안데르센 프로젝트> 그리고 안데르센의 두 소설과 유기적인 관계를 가지고 있다. 단적으로 말해서, 그는 형식적인 실험을 위해 기술을 적용하지 않는다. 그러한 태도는 전혀 찾아볼 수가 없었다. 그는 오로지 메시지, 내용에 집중하며, 전달하고자 하는 것들을 가장 효과적으로 재현하기 위해 적합한 수단을 개발하여 취할 뿐이다. 그는 아무 것에도 사로잡혀 있지 않다. 그 점이 가장 훌륭하다. 그러한 순수하고 엄격한 접근이야말로 미디어 아트를 둘러싼 모든 표피적인 논쟁들, 진정성에 대한 회의, 방법적인 다양성에 의한 무의미한 선별 작업들을 종식시킬 명쾌한 판정이 아닌가 싶다.
자, 그의 말을 따라서, 드라이아드의 파멸과 그림자의 승리라는 결말로 나를 이끌 내 안의 순결하고 불결한 욕망들, 그것을 실현시키려는 의지와 억압하려는 의지 사이의 갈등들, 원하지 않아도 필연적인 외부로부터의 오해들, 무고한 타자에 대한 나의 이기심과 뜻하지 않았던 사악함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든 나쁜 것들을 천상으로 승화시킬 수 있는 인간의 능력, 그리고 불확실한 힘들의 충돌 사이에서 우연히 발생되는 희망이라는 이름의 가능성들... 이 모든 열린 구조로의 자유로운 개입을 감행하자.
cf.
The Hans Christian Andersen Center
김영욱@채널예스: '미운 오리 새끼'의 아버지, 안데르센을 찾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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