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howing posts with label philosophy of science. Show all posts
Showing posts with label philosophy of science. Show all posts

Tuesday, August 30, 2022

화용론적 설명 이론 pragmatic theory of explanation

어떤 느낌이 있기는 했었다. 아픈 덕분에 바로 확인하지를 못했는데, 아직 상태도 안 좋고 치워 놓을 수 있는 책을 고르는 일을 하려다 보니 잠시 펼쳐 본다는 것이... 

결과만 가져오라고 하신다, 고 나로서는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교수님께는 이것도 말하자면 일종의 아름다움의 문제인가, 하는 의심이 처음 들었던 것은 "정도의 차이"라는 말씀의 뜻을 무려 두 달 동안 고민했던 끝. 덧붙여 철학이 아닌 '문학' 박사라는 미처 몰랐던/과중한 타이틀. "너무 급하지"와 "잡다하다"라는 힌트. 그리고 나서야, 설명항과 피설명항을 심사 후 삭제하려던 부록(원문)/본문 대비가 아니라 본문에서 구분해 주어야 하나 보다는 생각. 대조군이 있어야 하나 보다 하는 생각. 한두 가지만 선별해야 하나 보다 하는 생각. 무려 삼 년에 걸쳐서야 이해했다는 것을 이 책으로 확인하게 되었다. 사후약방문일 뿐인 현실일 수 있지만. 어쨌든 내가 처한 현실을 파악하게 되었다.  


배경지식 + 대조 집합 + '두드러진 요인'     =>     좋은 설명 


여영서(2022: 109): 두드러진 요인으로 거론되지 않는 것을 가지고서는 좋은 설명을 할 수 없다. 두드러진 요인으로 거론되지 않던 것을 새로 거론하면서 좋은 설명을 할 수 있겠지만, 그렇게 되면 그렇게 새로 거론된 요인이 두드러진 요인이 되는 새로운 설명이 제시되는 것이다. 


나에게 논문이란 학적 기여(contribution)에 대한 자기 증명/방어, 즉 [입증]의 문제일 뿐이었다. 우리나라 전공들 90% 이상이 그럴 듯. 이걸 안 하고도 학술 논문이 성립될 수 있는 길이 있다는 뜻을 이해를 못 함. 이건 절대 정도의 문제가 아님. 책도 달라요. 결국 '네가 무슨 연구를 하겠다고 그러느냐'는 뜻으로 이해함. 무엇이든 지적해 봐야 개선의 여지가 없는 학생이라서 안 하시는 줄로 믿음. (이건 여전 유효할지도.) 그래서 일반 논문을 쓰려면 필수인 정기 브리핑도 금하신다 믿음.  

하여간 '두드러진 요인' 때문에 바슐라르가 아쉽긴 한데, 이 선택을 싫어하실 것 같은 느낌이 있는데, 먼저 여쭈는 건 안 된다고 하시고, 대안은 못 찾겠어서 무지 불안한 나날을 보내고 있는데... 

한편, 내가 고민을 안 했던 것은 아니었구나. 결론의 내용이 입문 수준 교과서용 책에 나와 있는 걸 보니. 묘하게 안심되면서도 완전 허탈. 

또 한편, 난 (초/중/고 매번 문예반으로 강제 이송되고, 재미로 인소 연재까지 해 본 자이지만) 지금까지 살면서 설명하기 위한 글은 써 본 경험이 거의 없다는 사실을 깨달음. 

기력뿐 아니라 기운도 없다. 왠지 멘붕. (아웃이라고 하시면 그냥 사극로맨스물에 도전하는 걸로...)

+

여영서(2022)그럼 설명과 관련된 두드러진 요인이 무엇인지는 어떻게 밝혀낼 수 있는가? 여기에서도 맥락이 작동한다. 대개 한 사건의 원인으로 지칭될 수 있는 후보 요인은 여럿이 있다. 그 모두가 객관적으로, 그리고 과학적으로 관련이 있는 요인일 수 있다. 그중에서 두드러진 요인으로 뽑혀 그 사건의 원인으로 지칭되는 데에는 무엇이 두드러진 요인인지를 선택하고 결정하는 사람의 관심과 배경지식 등을 포함하는 맥락이 작동한다. [...] 다시 한번 설명이 맥락 의존적이라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109-110]
 

두드러진 요인들만 하도 많이 찾아서 내 재작년에 일반적인 경우라면 이미 몇 편을 썼겠다는 생각이 들곤 했었는데, 각각 정당화 가능하며(= 학문의 지형과 동원 가능한 장비 파악) 그럴 필요가 있는(= 내 목적에 부합하는) 것이 있는지 검토하는 데 또 엄청난 시간을 쓰고 있었다. 그럴 시간에 차라리 하나씩 해 봤으면 좋았겠다. 이후에 쓸거리만 십 년치는 쌓은 듯. 그리고 이제 정말 시간이 없어짐.   


여영서(2022)상충하는 답변이라면 하나가 좋은 것일 때 다른 하나는 나쁜 것이어야 하겠지만, 두 과학자의 답변이 모두 좋은 설명일 수 있는 것은 각각의 맥락, 특히 서로 다른 배경지식을 전제로 평가가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설명은 맥락 독립적인 특성을 지니는 진리와 지식과 다르다. [117] 설명은 각각의 맥락 속에서 평가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118] 


일반 논문은 물론 수성전이다. 성패, 생사의 문제다. 학생과 지도교수의 관계는 축구/권투 선수와 감독과 비슷하다. 훈련도 그렇지만 적어도 정기적 연습시합(모의전투)이 없는 것은 납득하기가 어려웠다. 그런데 이건 경연 대회 같은 건가 보다는 생각이 요즘 겨우 들긴 했었다. 피겨 스케이팅의 프리 부문 예술 점수 같은. 


여영서(2022)반 프라센의 화용론적 설명 이론은 설명이 이론과 사실 그리고 맥락 사이의 삼항 관계임을 밝혔다. [...] 설명에 성공했다는 말도, 따지고 보면 맥락에 맞는 적절한 수준의 유의미한 정보를 있는 그대로 정확하게 기술할 수 있었다는 말과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과학이 설명을 추구한다고 할 때 설명이 가치를 지닐 수 있는 것은, 결국 과학이 경험적으로 적합한, 그래서 참이라고 말할 수 있는 과학 이론을 찾아내기 때문이다. 설명이 추구하는 이해를 객관적인 경험을 통해 확인하기 어려운 것은 사실이고, 그런 측면에서 설명의 맥락 의존성을 강조하며 설명 자체가 과학의 목표는 아니라는 반 프라센의 입장은 경험주의 원칙에 철저하게 충실한 것이다. [120] 
인과관계 같은 것만이 연관 관계 R의 제대로 된 후보자라고 생각하는 입장에서 보면, 설명항과 피설명항을 연결시키는 연관 관계 R이 무엇인지 정확하게 제시하지 않고 모든 것을 맥락이 결정할 것이라는 반 프라센의 이론은 미완성이다. [121]


그러니까, 이해하지 못했으면서도 따르려고 했던 교수님의 기준과 동시에 만족시키려고 했던 일반적인(과학적인) 기준이 결국 R의 문제임을 진작 느끼고는 있있던 셈. 구체적으로 최소한의 '학술적 가치'가 있는지의 문제. 그리고 그 정당화 방법. 여기까지 고민하고 있으니 힘들지. 

여기까지 제시해야 한다고 공학 교수님들로부터 교육받기도 했다. 과학의 '세계 이해'를 넘어, 공학은 '문제 해결'이니까. 문학(?)에서는 이 부분이 어떻게 되는지 모르겠다. 이건 단순히 방법론의 문제가 아니다. 


++

이영의(2022): 이해는 심리 상태라는 점에서 주관적 개념이며, 그런 주관적 개념을 논리적으로 해명할 수 없기 때문이다. [124] 


세상은 넓구나. 

그러나 이 세상에서 내가 지도받고 싶은 분을 찾았고, 온갖 우여곡절 끝에야 받아들여졌다. 도통 실감이 안 났었는데... 그랬는데 난...... 


+++ 

자동 재생으로 우연히 듣게 된 영상. 베스트셀러들도 단 한 권도 읽지 않아서 잘 모르는 학자다. 기본적인 존경심은 있지만 나와 세계관이 다르다고 느껴서 좋아하지는 않는다. (가치관이 다르지 않더라도, 말하자면 내가 강하게 문제의식을 느끼는 지점들이 이 분한테는 맹점으로 남아 있다.)  


[최재천의 아마존] 살인의 진화심리학


교수님께 좀 보여 드리고 싶다. 세계적인 과학자가 뚜렷한 학술적인 목적을 가지고 이미 확립된 선행 연구를 준거로 연구를 수행하고 국제 학술대회에서 발표하여 큰 호응을 얻은 성과가 나왔어도 '논문'으로 성립시키지 못하는 경우란 이것 말고도 무수히 많이 일어난다. 자료 수집과 분석에 동원된 학생은 정황상 아마 석사 과정 신입생일 확률이 높을텐데 일 년의 수고가 수포로 돌아간다는 것이 가장 치명적인 시기이다. 하지만 흔히 일어나는 일이다. (국내 논문을 썼더라도 자연계에서 국내 논문의 학술적 가치는 0이다. 산업계에서는 국내 실적을 선호하지만.) 하루하루 생활은 물론 강의 진행과 핵심인 세미나/정기 미팅, 교수님과의 관계부터 모든 것이 너무 다르다. 하나하나 모든 성공 가능성과 실패 가능성과 발전 가능성과 위험 가능성을 상시 검토한다. 교차 검증/비판해 준다. 그래도 얼마든지 실패할 수 있다. 교수 연구실이 늘 열려 있는 이유다. 예전 드라마 [카이스트]에서 8년을 바친 박사과정생 연구가 논문심사 당일 심사 시작 불과 몇 시간 전에 다른 나라에서 동일한 결과가 먼저 나왔다는 이유로 심사 자체가 취소된 일화. 나도 석사과정 심사 당일 새벽 지도교수님으로부터 내 주제는 그 교수님 전문 분야였음에도 불구하고 다시 불과 이틀 사이에 새로 발표된 해외 연구로 겹치는 것이 없는지 재차 확인하라는 연락을 받았었다. 박사과정 말년차라면 이미 자기 분야에서 피어-리뷰어로 요청을 받는 정도가 되기에 그때까지 훈련을 위해서라도 지도교수와 연구교수들로부터 끊임없이 리뷰를 받게 되고 물론 일상적인 페이퍼 리딩을 통해 관심 분야를 위주로 집중적인 리뷰를 하는 것은 더욱 기본으로 대학원 과정 내내 진행된다. 이곳에서는 줄곧 마치 퇴역 군인 또는 다시 고등학생이 된 듯한 기분이 들 수밖에 없었다. 어쨌든... 알을 깨기가 너무 힘들었다. 


Tuesday, September 14, 2021

Peter Janich (1994) Die konstruktive Wissenschaftstheorie 구성주의 과학철학

이기흥(2004) : 인간의 기술적(技術的) 활동들이 과학의 방법적 근간이 된다는 주장을 통해 과학은 인간의 활동과 떼어놓을 수 없다는 테제를 내세우는 방법적 구성주의는 반객관주의 혹은 반실증주의를 추구하는 현상학과 해석학 혹은 생철학 전통(그리고 더 나아가 실존주의 전통)에 가까이 서 있는 것으로 보인다. 사실 현상학이나 해석학적 입장들은 공히 (위에서 기술한) 실증주의 경향의 과학철학들에 반대해 과학 문제의 해명에서 인간 주체를 배제해서는 안 된다는 입장을 고수한다. 그러는 가운데 그들은 모든 이론적 견해들이나 지식 구성의 시원(始原)을 의식 현상이나 문화 혹은 삶 현상에서 찾고자 할 뿐 아니라 이 영역들은 그 자체로 또한 그들의 철학적 이론화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논리실증주의에서의 감각 기관에 의해 포착되는 관찰 명제도 실은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는 사항이기도 하다. 하지만 논리실증주의자들은 이를 단순히 일종의 자연 과정으로 치부한다. 다른 한편, 해석학에서 말하는 전이해의 영역은 위에서 포퍼의 비판적 합리주의 및 그 이후의 과학철학적 발전들과 관계해 논해졌던 이론 의존적 관찰 혹은 패러다임 내지 연구 프로그램 혹은 과학 연구 전통 개념들과 비교될 수도 있을 것이다.) 현상학과 해석학의 이러한 입장은 분명 방법적 구성주의자들의 논의 맥락과 상통하는 부분이 있다. 하지만 이러한 철학적 입장들은 자신들이 이론화하겠다는 연구 영역을 종종, 방법적 구성주의와는 달리, 그 자체로 연구하는 경향을 보이기도 했으며, 그리고 그러한 작업들이 과학의 근원을 연구하는 이론이라 손치더라도 그들의 작업이 갖는 과학과의 관계는 내적 성격의 것이라기보다는 외적 성격의 것이었다. 사실 그들의 "과학철학적" 작업은 실제의 과학 이론들이 어떻게 해서 성공적 이론이 될 수 있었는지에 대해서는 그 어떤 유효한 설명을 제공하지도 않으며 또한 그 부분에 대한 논의는 그들의 논의에서 찾아보기 힘들다. 그 이유는 종종 그들 내부의 문제에서 기인하기도 한다. 왜냐하면, 과학에 근거를 마련해주는 작업은 고사하고 그 철학들 스스로의 토대 자체가 종종 의심되기도 해 그들은 이 일에 몰두해야 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예를 들어, 후설이 선험적 주체와 생활 세계 사이를 오가며 고민한 흔적은 이에 대한 징표이기도 하다. 그리고 하이데거는 후설과는 다른 철학적 토대를 찾아나서지 않았던가? 그러나 실증주의자들 또한 실존주의가 말하는 세계의 근본 현상들이 다시 어떻게 유효한 방식으로 근거지워질 수 있겠는가 하고 반문하기도 한다. 해석학의 경우 자기 근거의 문제는 "해석학적 순환"이란 테제를 통해 공공연히 피하게 되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해석학의 해석학적 순환론 자체는, 마치 상대주의자들의 주장이 그 주장 자체의 상대화를 함의하지 말아야 하는 것처럼, 해석학적 순환 고리로부터 떨어져 있을 경우에나 그 타당성을 갖는 것으로 보인다. 사실 해석학적 이론들은 인간의 이해 혹은 해석 과정에 대한 하나의 객관적 이론이고자 한다. 그렇다고 한다면 그러한 해석학적 진술들에서 주장되고 있는 사실들 자체는 자기 근거를 갖는 것인가? 이러한 종류의 시원적 근거 추적 시도들과 연관해 한스 알베르트가 주장하는 테제는, 하나의 주장을 다른 주장을 통해 최종적으로 근거지우려는 시도들은 모두 실패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사실, "주장적" 성격의 언술들을 근거짓는 작업과 관련해서는 이 테제는 타당한 것으로 보인다. 이는 철학 자체에도 해당된다. 철학이 이렇게 자기 집안 단속도 제대로 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철학은 과학에 과연 토대를 제공할 수 있단 말인가? 요약하자면, 과학 토대화 작업과 관련해, 현상학이나 해석학에서의 작업들은 과학과 아주 느슨한 관계를 맺을 수밖에 없는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방법적 구성주의는, 상황이 이러한데도, 여전히 과학을 토대화하겠다는 프로그램을 갖는다. 가능한 일인가? 그러나 독자들이 알아두어야 할 사항 하나는, 방법적 구성주의의 경우 과학 토대화 개념은 현상학 및 해석학의 그것과 서로 다르다는 사실이다. 이 철학 사상은 과학과의 관계에서 그리고 자기 자신과의 관계에서 위와 같은 류의 절대적 자기 토대화를 시도하지 않는다. 그것은 오히려 방법적 토대화다. 이러한 류의 토대화는 (마치 빵을 구워내기 위해서는 제빵 과정을 수행하면 되는 것처럼) 목적 수행을 위한 수단이 강구됨으로써 그 임무가 완수되는 것으로 이해된다. 예를 들어 과학이 추구하는 (철학적 시각에서의) 목적이 완수될 수 있는 수단들이 과학철학적 재구성 작업에 의해 강구될 수 있으면, 과학의 (철학적) 토대화 작업은 완수될 수 있다. [...] 방법적 구성주의는 이렇게 토대화 개념을 사실 관계에서가 아니라 목적과 수단 관계, 즉 방법적 시각에서 이해한다. 이는 방법적 구성주의가 현상학이나 해석학적 전통의 과학철학과 갖는 작지 않은 차이점이다(방법적 구성주의자들에게 방법론적 시각은 존재론적 혹은 사실론적 시각과 서로 대조된다). [290-293]


그러니까 뒤프렌을 처음 열었을 때 5장부터 확인한 것은 (한국의 고졸자로서) 당연한 일이었다. 근거를 제시하지 못하는 이론으로 (한국의 고졸 이상 학력자인) 사람들을 설득하는 것은 불가능한데, 현상학에 대한 나의 막연한 이미지에 따르면 그 점이 의심스러웠다. 하지만 니체와 하이데거 이후 근거짓기나 합리성의 타당성 개념 자체를 도마 위에 올렸다가 쓰레기통에 버린 학자들이라면 내가 습득하지 못한 다른 설명 방법이나 대안적 노선을 가지고 있으리라는 기대를 가졌던 것도 사실이다. 들뢰즈와 가타리의 리좀 등등. 하지만 이쪽으로는 등록금만으로 해결이 안 되는 현실에 아무리 발품을 팔아도 결국 아무런 훈련을 받지 못했다. (교양 강의나 독서는 훈련이 아니다. 경기 비디오 관람만으로 운동선수가 되는 훈련이 이루어지지 않듯이.) 스타들의 후광과 귀국자들의 영광뿐. 있다 해도 그림의 떡인 셈.     


방법적 구성주의의 입장은 반객관주의, 반(절대적)토대주의, 반사실관계적 시각 혹은 반인지주의적 시각들이다. 반면, 방법적 구성주의 철학은 영 · 미 철학 전통의 간주관성 혹은 초주관적 테스트 가능성을 강조하는 반형이상학적 입장을 공유하며, 현상학 혹은 해석학적 전통의 실천성 테제 혹은 문화주의적 시각을 공유하며, 또한 구성주의와 같이 인식 성취에서의 인간의 능동성에 시선을 준다. 그리고 이 모든 입장을 끌어안는 핵심 테제는 행위론적 시각 및 방법론적 시각이다. 이와 함께 방법적 구성주의는 또 합리주의적 입장도 취한다(게다가 방법적 구성주의에서는 지식의 초주관성이 강조되고 있다). 방법적 구성주의의 이러한 입장들은 현대 철학에서 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사상 중의 하나인 포스트모더니즘적 사고와 적절한 우호 및 긴장 관계를 이룬다. [...] 방법적 구성주의는 인간의 본질에 대해 논하지도 않으며 또한 인간의 본질이 이성이라고 하지도 않는다. 인간은 이성적일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그것은 인간의 노력 여하에 달린 문제다. 이 모든 것은 인간이 자연 존재가 아니라 행위하는 존재이기에 가능한 얘기들이다. 즉, 인간이 이미 어떤 본질을 가지고 있어 이러저러한 방식으로 행위를 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은 행위를 통해 그들 스스로를 규정한다는 것이 방법적 구성주의의 입장이다. 그리고 행위를 제한하는 요소들 또한 다양할 수 있다. 인간들은 완벽한 조건이 갖추어진 인큐베이터에서 자라나는 존재가 아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러한 인간 환경들은 (항상은 아니지만) 때때로 인간들 스스로에 의해 통제 혹은 구성되기도 한다. 이는 인간 행위들이 인간의 본질과 인간의 환경 요소의 그 어느 중간에 위치하고 있음을 말한다. 즉, 방법적 구성주의는 모더니즘 주체 철학과 포스트모더니즘의 반주체 철학의 중간에 위치한다. 다른 한편, 방법적 구성주의는 조건적 진리관을 견지한다. 이는 다음과 같은 의미에서다: 어떤 목적이 주어지고 그에 대한 수단이 강구될 때, 이 수단들의 적절성 혹은 옳고 그름은 언제라도 결정될 수 있다. 그리고 경우에 따라서는 하나의 목적에 다수의 수단들이 동일한 기능을 발휘할 수도 있고, 하나의 수단이 경우에 따라서는 서로 다른 목적들에 기여할 수도 있다. 게다가 이때의 수단들이 보여주는 기능 자체는 개인적 차원에서만이 아니라 간주관적 혹은 초주관적으로 검증되고 또한 인정될 수 있다. 이러한 진리관은 주장과 사고 및 견해들의 수렴과 분산을 적절한 수준에서 조정해준다. 달리 말해, 위와 같은 조건적 진리관 하에서는, 한편으로는 합리성, 이성, 보편성 개념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는 (사상 내지 문화의) 상대성 혹은 다양성은 서로 배제하는 것이 아니라 적절한 수준에서 서로 조화될 수 있다. 이러한 의미에서 방법적 구성주의는 다시 모더니즘의 진리 절대주의와 포스트모더니즘의 진리 상대주의 사이에 위치한다. [293-295]   


그러니까 학부 때 교양 수업에서 처음 제대로 접한 매클루언은 곧바로 타도의 대상이 되었다. 역사 유물론에 대한 생리적 반감의 2차적 양상이었달까. 그런 그가 한국에서 1990년대에 베스트셀러였던 현실은 정권의 IT 산업정책과 무관하지 않았다. (4차산업 시대라는 지금은 대입 논술고사 대비 고교생들의 필독서가 되었고.) 어쩌면 그가 아니었다면 인문계로 넘어올 필요까지는 느끼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북해의 소용돌이라니, 차라리 외계인 지구 대침공이라고 하지 그래. 인간의 행위와 우리의 선택에 다른 이름들을 붙이고 싶어하는 저의가 학계라는 프로페셔널 시장에서 파이를 점유하기 위한 경쟁력 전략인 것은 차라리 괜찮다. 자기 인생이니까. '적'을 과장해야 자신의 힘과 값이 올라간다는 세속의 인심을 아는 데 별다른 지성이 필요하지 않다. 그 '적'의 정체와 전략이 또한 모호하고 전면적이어야 조직적 해결 절차가 진행되는 걸 원천적으로 방해할 수가 있겠고. 그렇게 부정하는 데 성공한 책임과 회피하는 데 성공한 고통은 어떤 다른 사람이 맡으라는 말인가? 부정하고 회피하는 데 실패하여 '무능력'을 증명한 사람? 소용돌이에 뛰어들 용기와 의지가 부족해서 '생존력'이 낮은 사람? 엘륄도 그 점에서는 다를 바 없어 보인다. 공부할 필요는 있겠지만.  


방법철학은 이렇게 딩글러의지주의, 로렌첸의 행위주의 그리고 야니히에 와서는 문화주의로 변모해나가고 있는 중이다. 이 번역서는 그[페터 야니히]가 방법적 구성주의 철학의 행위론적 시각을 이어받아 그것을 문화주의적 시각을 가미해 각색하기 시작했던 시기의 저작이다. [296]


잘만 쓰면 취지에 딱인 것 같기도 한데 판단이 안 되네. 페이퍼는 커녕 이 입문서조차 숙독할 시간이 없는 현실로서는 일단 보류. 이 상태로 보고하면 보고하는 시점이 늦었다고 벼락 먼저 떨어지던 과거는 그저 그리움의 대상으로. (난 더이상 단기에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남아 있지 않았을 때 바로가 아니라 그런 상태에서도 어떻게든 온갖 불필요하거나 무리수인 난리를 다 쳐 본 다음에야 여쭈었기 때문에 적절 시점에 비해 결과적으로 두세 배의 시간이 낭비된 다음이 되곤 했다. 과유불급. 이 감은 참 늦게 생겼기에 괜한 고생을 많이 했는데, 여기서는 뭐 이러나저러나 쓸모가 없다.)


Peter Janich (1994): 게다가 학문을 대상으로 하는 메타론적 판단 문제에서는 문외한들도(각각의 과학자들 또한 자신의 학문 분야 이외의 다른 모든 학문 분야에서는 역시 문외한일 것이다), 그들이 과학의 결과들에 의해 일정 방식으로 영향을 받자마자, "과학의 영향권에 든 사람은 과학에 대해 언급할 자격이 있다"는 식의 신념을 가지고는, 자신도 과학 이론들에 대한 나름의 판단 능력이 있을 거라 생각하는 경향을 종종 보인다. 과학에 대한 이러한 식의 사고방식은 마치 누군가가 한 번 의학이나 심리학이 실천되고 있는 병원 같은 기관의 환자나 고객이 되고난 후 이러한 과학적 의학이나 심리학에 대해 자기 자신도 나름의 판단을 내릴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과 유사하다. 다시 말해, 위와 같은 사고를 가진 사람들은 유기화학, 인류사, 뇌의 신진 대사 혹은 천체 사건 등과 같은 특수한 과학적 물음들은, 일반적으로 그렇게 이해되고 있듯이, 당연히 특수 전문 지식을 통해 설명되어야 하는 것으로 보는 반면, (과학 바깥에서 제기되는 주제인) 과학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를 두고 벌어지는 담론에는, 마치 어느 누구라도 그러한 문제에 관한 한 거기서 요구되는 능력들을 충분히 갖추고 있기라도 한 것처럼, 자기 나름의 생각을 가지고 같이 끼여 논쟁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일상 삶에서의 아주 간단한 경험이 이 같은 사고 방식에 대해 경종을 울리고 있다: 우리 삶에는, 한편으로는 그림을 그리고 소나타를 작곡하고 기계를 제작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그림에 대해, 작곡에 대해, 기계 제작에 대해 하나의 이론이나 과학을 발전시키는 인간의 능력들이 있다는 사실에 어느 누구도 이의를 달지 않을 것이다. 우리가 이렇게 과학 활동을 몸소 직접 행하는 것과 과학에 대해 논하는 일이 전적으로 서로 다른 과제라는 사실을 알게 되면, 우리는 즉시 한편으로는 과학 연구 때 사용되는 언어와 다른 한편으로는 과학에 대해 논의할 때 사용되는 언어가 서로 다른 언어들이라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15-16] 

"생활 세계적"이라는 개념은, 여기서 우리가 이 개념에 대한 다른 철학적 의미, 예를 들어 그것에 대한 현상학적 의미는 도외시하고 논하자면, 삶을 헤쳐나가는 실천(Praxen der Lebensbewältigung)과 연계되어 사용되는 개념으로, 이는 다시 기존하는 인간의 실천 영역들은 삶에서 일반적으로 제기되는 인간의 욕구들을 해결해주고 있음을 말한다. 다른 말로 표현해, 생활 세계적 실천이란 우연히 출현하는 인간의 사치 현상이 아니라 오히려 삶의 조건과 삶의 요구 조건 하에서, 즉 빠듯한 생필품과 인간의 여러 요구 조건들 하에 나타나 실천되는 그러한 인간 행위 영역을 말한다. [38]    

-- 이기흥 옮김(2004) 


(영미의) "과학철학에서의 구성주의" 영어 위키와 본서의 "방법적 구성주의"를 차별되는 (독일의) "철학적(급진적) 구성주의"와 함께 하위의 일파인 "에어랑엔 학파"로 다루고 있는 독일어 위키의 내용이 많이 다르다. 역사적 전개만 다르고 뿌리는 같다고 봐도 되는 것인지 아니면 배경만 통하고 다른 내용인지 모르겠네. (한국미학회에서 "구축주의"로 합의한 예술에서의 constructivism과는 별개.) 이래저래 어설픈 상황이라 놀이터에 스크랩. 

주인이 주인 노릇 좀 하게 하려고 그 손에 고삐를 단단히 쥐어 주려고, 먼저 그럴 힘을 갖고자 십 년을 바쳤는데 어차피 위험한 선택이었으니까 결과적으로 실패해도 어쩔 수 없지만 마땅히 거쳐야 할 과정들은 유실된 채로 이처럼 소모적인 비효율로 하루하루가 날아가다니. 뭔가 쌓기는 커녕 그 혹독한 훈련으로 만든 근육들이 많이도 허물어졌다. 여기서는 교육이 엄격하다고 하면 전문성 없이 ad hominem이나 하거나 기껏해야 호사스럽게 (실은 학생의 연구 능력 성장을 저해하는) micro-managing을 받는 건 줄로나 착각들 한다. 이제 오래 못 갈 텐데. 


Saturday, September 11, 2021

methodology

Max Weber: 경험과학은 그 누구에게도 결코 그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는 가르쳐줄 수 없으며, 단지 그가 무엇을 할 수 있는지, 그리고 — 경우에 따라서는 — 그가 무엇을 원하는지를 가르쳐줄 수 있을 뿐이다. (김덕영 옮김, 2021: 5)


김덕영 (2021): 왜 같은 과학자 공동체 내에서, 그것도 역사학파 경제학이라는 커다란 테두리 안에 있는 과학자 공동체 내에서 세대 간의 대립과 갈등 그리고 투쟁이 일어났을까? 왜 독일 역사학파 경제학의 내부에서는 심지어 아들인 제3세대가 아버지인 제2세대를 살해하는 사태가 일어났을까? [221-222] 

이에 대한 답은 일차적으로 두 집단 사이에 존재하는 근본적인 지적-정신적 입장에서 찾을 수 있다. 독일 역사학파 경제학의 제3세대는 — 보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베버를 위시한 일군의 제3세대 학자들은 — 사회학과 사회정책에 대해 제2세대와는 근본적으로 다른 입장을 가지게 되었다. 이들 젊은 세대는 독일이 자본주의적 산업사회로 이행하는 과정에서 사회적 질서와 세력의 다양화, 집단들이나 계급들 간의 대립과 갈등 및 투쟁의 일상화 그리고 사회적 관계의 물화 및 탈도덕화를 인지하게 되었으며, 이 모든 것은 사회정책학회, 아니 역사학파 경제학이 추구하는 이론과 실천의 직접적인 결합 및 사회과학과 사회정책의 직접적인 결합의 방식으로는 해결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들은 사회과학의 과제를 객관적 현상과 과정에 대한 경험적이고 실증적인 인식에서 찾아야 한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되었다. 

사회정책학회와 독일 역사학파 경제학의 젊은 세대는, 엄밀한 의미에서 — 단순히 시간적인 의미에서가 아니라, 사회적 행위와 관계 그리고 사회질서를 규정하고 근거짓는 이념과 원리의 의미에서 — 진정한 근(현)대성을 발견하고 이를 실증적인 방법으로, 그러니까 객관적 사실에 대한 경험적 인식에 입각하여 해결해야 한다는 사실을 통찰했으며, 이에 따라 인식과 행위, 이론과 실천, 과학과 정치, 존재와 당위, 사실과 가치, 분석과 판단 그리고 사회과학과 사회정책 사이의 노동분업과 이에 기반을 둔 상호 협력관계의 의미와 필요성을 절감했던 것이다. 요컨대 독일 역사학파 경제학의 제2세대와 제3세대는 공히 근대를 대상으로 하는 과학, 즉 근대의 과학을 추구했지만, 구스타프 폰 슈몰러를 위시한 노장 세대와 이 세대를 추종하는 일군의 젊은 세대는 근대적인 과학을 구축하지 못한 반면, 막스 베버를 위시한 또 다른 일군의 젊은 세대는 근대적인 과학을 구축했다. 전자는 근대(적인 것)에 대한 전(前)근대적 과학에 머물렀던 반면, 후자는 근대(적인 것)에 대한 근대적인 과학으로 나아갔다. 바로 이 두 유형의 과학이 독일 역사학파 경제학과 사회정책학회에 공존하면서 대립, 갈등 및 투쟁은 불가피해졌으며, 이것이 공적인 형태로 표출된 것이 1909년 1914년 두 차례에 걸쳐 벌어진 가치판단 논쟁이다. [222-223] 


그러니까 내가 '근대성' 개념/역사에 우연히 관심을 가졌던 것이 아니라 단지 메이지 때문이 아니라 이것을 알아야만 하는 이유가 있었다. 어느 길을 다시 골라도 여기서 꼭 걸렸으니까. 


Max Weber (1910): 만약 그대가 한 특정한 당위에 대한 관심사에서 진정으로 명료한 이 특정한 가치판단에 따라 행위하기를 원한다면, 그렇다면 그대는, 과학적 경험에 따라 볼 때, 상기한 가치공리에 상응하는 그대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이런저런 수단들을 사용해야 한다. 만약 이 수단들이 그대에게 적합하지 않다면, 그대는 수단들과 목적 사이에서 선택해야 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나는 그에게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다: 그대는, 과학적 경험에 따라 볼 때, 그대의 가치판단을 실현하는 데 불가결한 수단으로 인해 의도하지 않은 다른 부차적 결과들이 초래될 수도 있다는 점을 고려해야 한다 — 그대에게는 이 부차적 결과들도 바람직한 것인가; "그렇다"인가 또는 "아니다"인가? 과학은 그 사람을 이 "그렇다"와 "아니다"의 경계까지 이끌 수 있다 — 왜냐하면 이 경계의 차안에 존재하는 것은 모두 경험적 과학분야가, 또는 논리학이 답을 줄 수 있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 다시 말해 순수한 과학적 문제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그렇다" 또는 "아니다" 자체는 더 이상 그 어떤 과학의 문제가 아니라 양심 또는 주관적 취향의 문제이다 — 어쨌든 그에 대한 답이 다른 정신적 영역에 있는 문제이다. 

-- 김덕영 옮김(2021: 236)


내가 썼는 줄. "가치공리"란 말만 빼고. 나의 시대와 정반대 방향의 흐름 속에서 같은 문제의식을 가졌던 베버. 덤으로 사회학자인 그가 왜 문화 연구를 하게 되었는지 이해하게 되었다. 지금 내가 어릴 때부터 싫어하는 사회학의 방법론 텍스트를 고통스럽게 읽고 있는 이유와 매한가지.      


김덕영: 방법론이란, 연구의 절차나 수단을 기술적으로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그 절차와 수단이 무엇인가를 들여다보는 ‘메타’적인 것 -- 이혜인@경향신문


김덕영: 막스 베버의 '창조적 절충주의' -- 최원형@한겨레 


정독도서관에서 공개 연속 강의하셨을 때 정말 많이 배웠고 복도에서 잠시 뵈었을 때 기억도 강하게 남았다. 면식이 없는 상태였음에도 온전히 100% 제자를 바라보는 눈빛을 받아서. 여태 국내에 chair가 없으시다니, 하여튼 여기 인문계는 만사가 전도되어 있다. 그런데 더이상은 오래갈 수가 없을 텐데.  


Sunday, August 29, 2021

Stephen Toulmin (1958) The Uses of Argument

Stephen Toulmin (1958/2003): 실질적 논변은 자료와 지지작용으로부터 결론으로 이행할 때 빈번하게 유형전환을 행한다. 다시 말하면 이는 바로 우리가 실질적 논변의 각각의 영역을 그 자체에 관련된 기준에 의해 판단해야 함을 의미한다. 인식론에서 근본적인 오류는 이런 유형의 비약을 논리적인 심연으로 취급하는 것이다. 모든 지식 주장이 분석적으로 정당화되어야 한다는 요구와 그렇게 정당화될 수 없는 모든 것들에 대한 거부는 이런 오류가 도달하는 첫 번째 유혹이다. 다음 단계는 상황을 치유하겠다는 희망을 갖고서, 선험론과 현상론을 거쳐서 회의론이나 혹은 실용주의로 이르는 지루한 열차에 몸을 싣는 것이다. 논변에 있어서 실질적인 단계가 논리적 심연을 나타낸다는 생각을 버리자. 그러면 논리학과 지식론 모두는 좀 더 생산적인 문제들을 다룰 수 있을 것이다. [362]   

-- 고현범/임건태 옮김(2006) 


최초의 지점으로 되돌아옴. 급기야 이럴 것 같은 강력한 느낌에 시달리지 않은 적이 없건만, 선험론, 현상론, 회의론, 실용주의란 네 협곡을 한두 번도 아니고 몇 번인지 세는 것도 진즉 잊고 갈팡질팡하는 것도 모자라, 상위의 입증론과 과학적 설명의 문제, 하위의별도의 측정과 계산가능성의 문제 들에 제대로 돌진했다기보다 접근가능한 자료 수색만 하면서 일 년을 보냈다고 여쭐 수는 없을 것 같은데, 이 문장으로 지난 일 년이 거의 잘 요약되는 이 사태를 어쩌람? 마치 나에 대한 조서를 보는 듯, 무척 잘 쓰였구먼.   

+

Stephen Toulmin: '인간 오성의 본성'에 관한 물음들은 많은 경우 심리학으로 가장한 논리학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논리학에서의 혼동은 너무 쉽게 지식론에 있어서의 잘못된 개념으로도 이어졌다. 이런 식으로 논점을 벗어난 경우에도 — 즉 실질적 논변들에 있어서도 — 분석성에 도달하려는 욕망은 회의론으로 이어지거나 회의론에 대한 공포 때문에 마찬가지로 과격하게 실제 행동을 중단해 버리는 것으로 이어졌다. 그런 논리학적인 시초의 혼동을 제거할 때만 인식론에 적합한 길은 회의론을 껴안거나 회피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야심을 조절하는 것이란 점이 분명해진다. 즉 어떤 분야에서건 논변과 지식론이 분석적 기준들에 따를 것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좀 더 현실적으로 해당 분야에서 적합하게 요구될 수 있는 그 어떤 종류의 설득력이나 훌륭한 근거를 갖추기를 요구하는 것이다. 

형식논리학에서 분석적 이상은 자신의 매력을 수학의 명성으로부터 빌려왔던 것 같다. 고대 아테네와 과학 혁명의 시기 모두 철학사는 수학사와 긴밀히 연관되었다. 그래서 그런 결과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명문 기하학 학교의 창립자이자 선생인 플라톤이 모든 학문의 가치 있는 이상을 기하학적 증명에서 발견했다는 사실에 놀랄 필요는 없다. 근대 물리학 발전에 막대한 영향을 미쳤던 '데카르트 기하학'의 창시자인 데카르트가 자연과학과 신학의 모든 근본적인 진리를 유사기하학적인 방법으로 세우려는 생각에 매료되었다는 사실 역시 마찬가지이다. 이런 식으로 우리는 근대미분법의 발명자인 라이프니츠가 어떻게 철학을 수학처럼 '실재적이고 증명할 수 있는' 것으로 만들려는 전망에 환호했는지를 이해할 수 있다.  

다시 말하지만 이런 것들에 놀랄 필요가 없다. 하지만 이런 사실이 우리가 그와 동일한 이상에 의해서 이끌려져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사실 우리는 그보다 그런 이상을 경계해야 하며, 어느 지점에서 그 이상의 영향이 해로운지를 재빨리 알아채야 한다. 물론 일반적으로 보아서 이런 생각이 독창적인 것은 아니다. 하지만 분석적 이상을 포기하는 것의 일련의 결과들이 명백해지려고 한다면, 모든 필연적인 논리적 구별들을 분명하고도 확고하게 명심해야만 한다. [383-384] 

우리의 인식론적 문제들의 상세한 원천에 대한 조명은 오직 좀 더 복합적이고, 영역 의존적인 논리적 범주들의 체계를 구축할 때만이 가능하다. 예를 들어 데카르트 이래로 그가 제기한 감각의 오류 가능성에 관한 문제들은 철학자들을 괴롭혔다. 특히 우리의 모든 감각 경험이 교활한 악마에 의해서 감쪽같이 조작될 수 있으며, 우리를 둘러싼 대상들의 존재와 성질에 관한 기만적인 믿음들을 계속 고수하도록 설정되었을 가능성 — 물론 논리적 가능성이지만 — 이 그러하다. 

처음 봐서는 어떤 문제도 그보다 더 우리의 자존심이나 진정한 지식 주장에 심각하게 도전하지는 못할 것 같다. 하지만 사물들이 보이는 방식으로부터 존재방식으로 진행되는 논변들이 여기서 문제를 만들어 내는 바로 그 분석적 타당성을 이상적으로 성취할 수 있다는 것은 헛된 기대에 불과하다. 데카르트가 주의를 기울인 모든 것은 '논리적 가능성'이며, 이런 '논리적 가능성'(즉 자기모순의 부재)은 사태의 필연적 특성이다. 다른 한편 우리가 실제 논변에서 요구하는 것은 그에 대한 추정들이 실질적 목적에 비추어 반박할 수 없을 만큼 강력한 결론들이다. [384-385]  

플라톤처럼 데카르트에서도 분석적 이상의 기하학적 연결들은 아주 분명하다. 실질적 논변들이 — 모든 종류의 유형의 비약에 대한 의혹을 포함해서 — '논리적 심연'을 포함하고 있다는 생각은 순수수학을 위해 만들어진 척도에 비추어서 그 논변들을 측정할 때 초래되는 자연스런 결과이다. 하지만 유형의 비약과 영역의 차이들은 우리가 안고 시작할 수밖에 없는 것이며, 우리는 절대로 그것들을 없앨 수는 없다. 다시 말하면 결론과 그것을 지탱하는 정보 사이의 유형의 전이는 심연이나 결함이 아니라, 논변의 영역에 특징적인 성질이다. 실질적 논변들에는 필연적 함축이 결여되어 있다는 것, 그것들이 분석적 기준에 따르지 않는다는 사실은 유감스럽거나 변명이 필요한 것 혹은 심판하거나 변화시켜야 할 것이 아니다. 

실용적인 견지에서 분석적인 보증들이 그러한 경우들에 요구되어지는 것은 과도하다고 말할 필요조차 없다. 정당한 이유가 작동한다는 확신이 우리가 합리적으로 요구할 수 있는 모든 것이라거나 필연적 함축을 논외로 하고 이것을 수용해야 한다는 확신도 마찬가지이다. 비록 그런 말이 (우리가 지금까지 도달한 입장과 완전히 다르다고 할 수는 없고) 겸손하게 들릴지는 모르겠지만, 이런 관점조차 오해를 유발한다. 왜냐하면 지금은 '논외로 하고'와 같은 말을 쓸 장소가 아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그 말들에는 상황이 보증하지 않는 함축된 변명이 있다. 

하나의 이미지를 떠올리면서 이 논의를 마치는 것이 유익할 것 같다. '논리적 심연'이라는 말에 간직된 경쟁적 이미지가 야기하는 효과를 무마시킬 만한 이미지 말이다. 우리에겐 그런 말처럼 혼란스런 연상을 가져오지 않는 유형 전환의 추론을 그려내는 길이 필요하다. 다양한 가능성들이 제기된다. 즉 하나의 논리 유형을 가진 정보로부터 다른 유형의 결론에로의 이행은 '심연'을 건너는 걸음이라기보다는 '수위'의 변화나, '방향'의 변화, 또는 태도의 변화로 간주될 수는 없는가? 아마도 이 마지막 비유가 가장 도움이 될 것이다. 왜냐하면 태도의 변화라는 것은 적합한 기준으로 판단할 때 시기적으로 부적절하거나, 성급하거나, 시기상조일 수 있거나 그렇지 않다면, 적절하거나, 정당하거나, 시기적절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사실 태도가 — 미세하게 구별되는 신호나 동작은 차치하고 — 명확하게 언어적인 것이 되는 지점이 있다. 그래서 두 개의 발화들 간의 논리 유형의 차이는 — 바로 이런 식으로 확장된 의미에서 — 두 유형의 의사소통적 태도 간의 차이이다. 

운전자는 전방도로에 차가 없는 것을 보고서, 뒤차에 추월신호를 보낼 수 있다. 도로가 비었다는 것을 보는 것은 이런 식으로 신호를 보내는 하나의 이유를 제공한다. 다시 말하면 전자는 후자를 정당화한다. 하지만 비록 보는 것과 신호하는 것이 별개의 것이라 해도, 보는 것과 그렇게 하는 것 간에 '심연'은 없다. 다만 차이가 존재할 뿐이다. 신호하는 것을 정당화하기 위해서 우리는 다만 전방 도로 상태를 지적하기만 하면 된다. 여기에서 우리는 시각과 행위 간의 간격을 메워줄 더 나아간 원칙들을 제공할 필요가 없다. 이제 실질적인 물음은 '신호하기 자체가 보는 것에 필적할 수 있는가, 또는 보는 것이 신호하기에 필적하는가?'가 아니라 '어떤 경우에 보는 것이 신호하기와 같은 (전적으로 구별되는) 활동을 정당화하는가?'이다. [385-387] 

-- 고현범/임건태 옮김(2006)  


툴민으로부터 배운 건 전혀 아니었지만, 그에겐 지적의 대상이었던 것이 나에겐 폭력의 두 원천으로 여겨졌고, 그의 결론이 나에겐 신조로 이미 구축되어 있었다. 구별하지 못했던 고통들도 아니었고, 인식하지 못했던 목표들도 아니었다. 일단은, 이라며 비켜 가려 했던 마음의 수법에 자꾸만 발목을 잡혔는지, 아니면, 사안의 내부 관계적 순서와 진행의 실천 절차를 달리하지 못하는 우둔함인지 모르겠네. 현실적으로 후자에 무게가... 執迷. 

전략에 허점과 기복이 있을 수 있다. 전술을 철회해야만 할 수 있다. 전투에서 패배할 수 있다. 총알에 불량품이 있을 수도 있으면 안 된다. 자기가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는 글이 있다. 그 말이 알차고 훌륭해서 이해하려고 노력할 가치가 충분하더라도. 


Wednesday, April 28, 2021

Erwin Schrödinger (1958) Mind and Matter 정신과 물질

Erwin Schrödinger (1958): 발전은 거부할 수 없는 운명에 의해 결정된다는 믿음으로 사태를 방치하지 말아야 한다. 우리가 발전을 원한다면, 발전을 위해 무언가 해야 한다. 또한 발전을 원하지 않는다면 하지 말아야 한다. 정치적 사회적 발전과 역사적 사건들 일반이 운명의 장난으로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주로 우리의 행동 때문에 발생하듯이, 더 큰 규모의 역사에 다름 아닌 우리의 생물학적 미래를 어떤 자연법칙에 의해 미리 결정된 불변의 운명으로 여겨서는 안 된다. 적어도 연극의 주인공인 우리에게는 사태가 그러할 수 없다. 설령 우리가 새와 개미를 보듯이 우리를 지켜보는 더 높은 존재에게는 그렇다 할지라도 말이다. 사람들이 좁은 의미와 넓은 의미의 역사를 예정된 것으로 여기는 경향이 있는 이유는 매우 명백하다. 그것은 모든 개인 각자가, 자신의 의견을 많은 사람들에게 전파하고 그것에 따라 행동하도록 설득할 수 없는 한, 자신에게는 거의 아무 힘도 없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 

현재 대부분의 생산 공정에서 진행 중인 기계화와 '바보화(stupidization)'는 우리의 지능 기관의 일반적 퇴보를 가져올 수 있는 심각한 위험 요소라고 나는 믿는다. 수공업의 억압과 따분하고 지루한 조립 라인 작업의 확산에 의해 영리한 노동자로서 살 기회와 무감각한 노동자로서 살 기회의 비중이 동등해질수록, 영리한 뇌와 유능한 손과 날카로운 눈은 점점 더 불필요해질 것이다. 심지어 천성적으로 따분한 노동이 더 쉽다고 느끼는 우둔한 인간이 더 선호될 것이다. 그런 인간들이 더 쉽게 성장하고 정착하여 자손을 낳을 것이다. 결과적으로 재능이나 재주와 관련해서 부정적인 선택이 일어날 가능성이 다분하다. 

[...] 다행스럽게도 우리의 현재 행복과 미래 진화는 나란히 함께 간다. 지루함은 우리의 삶에서 결핍 다음으로 나쁜 가장 심각한 독소가 되었다. 우리가 발명한 교묘한 기계들이 불필요한 사치품을 점점 더 많이 생산하도록 방치하는 대신에, 그 기계들을 인간의 바보 같고 기계적이고 '기계 같은' 노동을 대신할 수 있는 수준으로 발전시켜야 한다. 인간이라는 훌륭한 존재가 하기에 너무 하찮은 노동을 기계가 맡아야 한다. [...] 전 세계의 큰 기업들과 재벌들이 서로 경쟁하는 한, 이런 일이 실현되리라는 작은 희망을 품을 수 있다. 하지만 그런 종류의 경쟁은 흥미롭지도 않고 생물학적으로 무가치하다. 우리의 목표는 그런 경쟁 대신에 인간 개인들 간의 흥미롭고 지적인 경쟁을 회복하는 것이 되어야 한다. 

-- 전대호 옮김 (2007: 186-189) 


오퍼레이터로서 탱크의 자리를 지망하고 건너왔다. 나는 탱크와 달리 시온 출신이 아닌 매트릭스 출신이지만, 그래서 유리한 점이 있다. 설령 탱크처럼 조종간까지는 못 맡게 되더라도 그래서 백업을 해 주진 못하더라도 네오들이 쓸 총알 알고리듬 같은 건 얼마든지 만들 수 있을 것 같았으니까. 침투 루트를 좀 알고 있으니까. 그들의 설계도를 읽을 수 있으니까. 그런데 아직도 각성하지 않는 모피어스들을 보며 절망한다. 이미 늦었지만 아직 늦지 않았는데... 

네오가 매트릭스에서 낮에는 프로그래머로 밤에는 해커로 투잡을 했듯이, 전설의 해커 모피어스는 전직 고등학교 문학 담당 교사였다, 라고 처음 영화를 봤을 때부터 생각했다. 오비디우스로 박사 학위 논문을 썼나 보다고. 그가 대련 프로그램과 점프 프로그램 안에서 네오에게 무엇을 가르치는지 보면 확실하다. 얼른 네오들을 찾아서 현실을 보여 주고 좋은 알약을 고르게 하고 잘 훈련시켜서 팀에 데리고 들어가야 하는데. 어쩌면 이 모피어스들은 자신이 모피어스임을 모르는지 아니면 알고 싶지 않은 건지 모르겠다. 무엇보다 모피어스는 신념이 강해야 하는데 말이다.  


이렇게 중요한 이야기를 적는 곳이 아닌데, 고립무원이라 그런지 점점 심각해지는 것 같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