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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nday, September 03, 2023

Shostakovich (1966) Cello Concerto No. 2

Дми́трий Шостако́вич (Dmitri Shostakovich, 1966) Cello Concerto No. 2 in G major, Op. 126
Sol Gabetta cello
Orchestre de Paris / Klaus Mäkelä conductor 
2023-05-30 Philharmonie de Paris


💓💕💖💗💙💚💛💜💘 

나 죽으라고, 대책 아직 없는 일요일도 황홀!

Tuesday, July 18, 2023

Rota (1966) La Strada

Nino Rota (1966) Sinfonische Suite from the Ballet La Strada 
hr-Sinfonieorchester (Frankfurt Radio Symphony) / Christoph Koncz conductor
2022-09-08 hr-Sendesaal Frankfurt





Nino Rota – La Strada (1954) – Suite Dal Balletto "La Strada" (1966) 
Orchestra Filarmonica Della Scala / Riccardo Muti conductor 
1994-04-09_-14 Teatro Abanella, Milan
(P) 1995 Sony Music Entertainment


1. Nozze In Campagna. "È Arrivato Zampanò" 3:44 

2. I Tre Suonatori E Il "Matto" Sul Filo 6:10 

3. Il Circo (Il Numero Di Zampanò - I Giocolieri - Il Violino Del "Matto") 4:54 

4. La Rabbia Di Zampanò 4:11 

5. Zampanò Uccide Il "Matto". Gelsomina Impazzisce Di Dolore 2:50 

6. L'ultimo Spettacolo Sulla Neve - "Addio Gelsomina" 4:52 

7. Solitudine E Pianto Di Zampanò 3:16 




original film by Federico Fellini (1954) 

=> 보기: 길 (한글 자막)


울 아부지 최애 영화 


Tuesday, February 01, 2022

Kant vs Husserl by Thévenaz

국역본이 완역이라면 1952년 [신학과 철학]지 원문은 달랐네. 어째 원문이 더 명확하고 체계적인 것 같아 보이나, 까막눈이니.  


Pierre Thévenaz (1966): 이 새로움을 해명하기 위해서는, 초월적 지향성에 있어서의 데카르트적 주제(명증성, 직관, 요컨대 보는 것)와 칸트적 주제(의식에서의 대상 구성, 곧 의식의 구성하거나 창조하는 활동)의 근원적인 상호결합을 이해해야 한다. 비록 후설이 특별히 환원의 일차적인 설명을 함에 있어 칸트적 언어를 사용하고 있기는 하지만(『현상학의 이념』), 우리는 여기에 속으면 안 된다. [43]

칸트처럼, 후설은 대상이 주체에 준거하는 것이고, 인식의 문제가 본질적으로 구성의 문제라고 생각한다. 이것은 (심리학적인 것이 아니라 초월적인) 의식에서 출발하여 우리가 지향적 세계의 구조, 또한 무엇보다도 그 의미의 통일성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라고 보는 입장에 속한다. 하지만 데카르트처럼 후설은 의식 안에서, 단순히 인식의 형식적 요소 및 통일성, 대상의 가능성의 조건을 보는 것이 아니라 구체적으로 주어진 것(경험적인 것이 아닌)에서, 의식(심리적이 아닌)에서 직접적으로 체험된 것을 본다. 또한 대상은 이러한 의식을 통해 구성되지 않으며, 대상은 이 의식의 봄에 그 자신을 주거나 자기 자신을 드러낸다. 여기서 우리는 데카르트적인 직관이라는 주제와 칸트적인 구성이라는 주제를 결합하는 이 스스로 줌이라는 개념 덕분에 그 모든 실재론과 관념론(심리학주의적이거나 주관주의적인)을 대담하게 넘어서게 된다. 우리는 모든 초월론, 특별히 후설이 함축하는 초월론 때문에 이러한 진전을 이룰 수 있었다. 현상학은 우리를 일종의 초월적 봄 내지는 초월적 체험으로 초대한다. 이것은 신칸트주의의 그 모든 구성주의를 뒤로 하고 나온 것으로, 명증으로의 단호한 복귀, 무엇보다도 의식이 의식 자체를 코기토 속에서 파악하게 하는 필증적 명증성으로의 복귀다. [44-45] 

-- 김동규 옮김(2011)  


난 단지 그의 언어에 속았을 뿐이었는데, 잘못 읽었다고 할 수도 없었네. 그의 모든 저작을 읽으려 하지 않았을 뿐. 다만 교수님을 폭발하시게 한 학생이 또 있었을 것 같지가 않았다. 혼자 힘으로 할 수 있는 것만 할 수밖에 다른 길이 없었다.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2011년 이래 5판 째인데... 이나마도 내 미련퉁이 같은 현실무감각 때문에 오늘 2년 만에 답을 찾게 되었네.

사실 설명은 첫 면담 때 폭포수처럼 해 주셨으나 녹음도 못 하게 하시고 도통 따라갈 수가 없었다. 무엇보다 내가 칸트와 구별을 못 했던 건 (지금도 말끔히 하는 것 같지는 않지만) 칸트를 먼저 읽어서 홀렸기 때문이 아니라 (좋아하는 건 맞지만) 서유럽 근대 과학을 주입하는 한국의 초중고를 졸업했기 때문이다. 

이제 순서대로, sense data도 qualia도 아닌 '이미 주어진 것'들 사이의 구별 그리고 희망컨대(?) 결정적으로 뒤프렌의 '아 프리오리'가 남았는데, 이런 그나마의 때늦은 행운이 또 올는지? kairos missed. 기운만 뺀다. 


+

Pierre Thévenaz (1966): 우리는 세계에서 살아가길 멈출 수 없다. 마찬가지로 세계에 대해 반성하는 일 또한 멈출 수 없다. 왜냐하면 반성은 여전히 세계를 지향하는 방식이기 때문이다. 철학은 삶에 겹쳐져 있고, 철학이 우리에게서 분리된다고 상상할 경우에도, 철학은 세계를 [이전과는] 다르게, 보다 강렬하게 살아가게 한다. 그러므로 후설에게 체험된 세계란 이성으로부터 소외당하는 것이 절대 아니다. 단지 이 이성은 너무 자주 잠재적인 것으로 머물러 있고, 나타나기 위해서는 수많은 노력과 다양한 전복을 요구받을 뿐이다. 이것이 바로 철학에 있어 무한한 과업으로 남겨진 세계의 의미와 이성의 의미에 대한 의식에 이르러야 하는 이유이다. 

-- 김동규 옮김(2011: 47)


Friday, January 28, 2022

Sergei Bondarchuk (1967) War and Peace

1. Andrei Bolkonsky (1/2)



1. Andrei Bolkonsky (2/2)



2. Natasha Rostova



3. The Year 1812



4. Pierre Bezukhov


in: Серге́й Фёдорович Бондарчу́к (Sergei Bondarchuk, 1966-1967) 
Война и мир (Voyna i mir) War and Peace (영어 자막)



씬들이 아니라 프레임들이 명화.   

+

역시 내가 놀려고 할 때는 몸이 안 좋을 때였어... 단지 좌절하지 않기 위한 방편. 어떻게 예외가 없어... 


Saturday, December 25, 2021

Tarkovsky (1966) Strasti po Andreyu (Andrei Rublev)


Андрей Арсеньевич Тарковский (Andrei Arsenyevich Tarkovsky, 1966)
Андрей Рублёв (Страсти по Андрею; Strasti po Andreyu) (영/독/프/스 등 자막)
* 칸 영화제(21회) 국제영화비평가연맹(FIPRESCI)상 


2021-12-24 쇠의 밤@내 방 

결국 놀았다. 자막 있는 감독판을 못 찾아서 아쉬운 대로. 아빠랑.  



Андрей Арсеньевич Тарковский (Andrey Arsenyevich Tarkovsky, 1986): 시나리오 집필 이후에 나는 나의 구상이 실현될 수 있을지를 두고 깊은 의구심에 빠졌다. 그러나 기회가 주어진다면 미래의 영화가 어떤 경우에도 역사물이나 전기물로는 만들어지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나의 관심은 다른 데 있었다. 그것은 바로 위대한 러시아 화가의 시적 재능에 깃든 성격을 탐구하는 것이다. 루블료프의 사례를 통해서 나는 예술 창작의 심리 문제를 탐구하고 싶었고 초시간적 의미가 있는 정신적 보고를 창조한 한 예술가의 정신과 시민적 감정을 분석해 보고 싶었다. [49]

이 이야기들은 전통적인 연대기 방식으로 연결된 것이 아니라, 루블료프가 <성 삼위일체> 성상화를 그리게 된 내적/시적 논리로 연결되어 있다. 바로 이 논리가 에피소드들의 통일성으로 이어지는데, 각 에피소드에는 특별한 플롯과 고유한 사상이 담겨 있다. 에피소드들은 내적으로 서로 충돌하며 상호 작용을 거쳐 발전한다. 

그러나 시나리오의 순서상 이러한 충돌은 삶과 창작의 모순과 복잡성이 이미지로 표현되는 것처럼 시적 논리에 상응하여 일어나야만 했다. 

역사적인 측면에서, 마치 우리의 동시대인에 관해 이야기한다는 인상을 주는 영화를 만들고 싶었다. 그렇게 하려면 역사적 사실과 인물들 속에서, 물질문화의 잔재 속에서 미래의 기념비를 위한 동기가 아니라 살아 숨 쉬듯이 생생하면서 심지어 일상적이기까지 한 무엇인가를 찾아야만 했다. [50] 

모든 예술의 목적이 인간은 무엇을 위해 살고 인간의 존재 의미는 무엇인지를 예술가 자신과 주변 사람들에게 설명해준다는 것임은 자명하다. 그것은 인간이 지구상에 출현하게 된 이유가 무엇인지 그들에게 설명해주는 데 있다. 설명해주지 않는다고 할지라도 적어도 이런 질문을 사람들에게 제기하는 것이 예술의 목적이다. [53] 

'자연의 화관'이라고 하는 인간은 다름 아닌 바로 인간이 무엇을 위해 나타났는지, 또는 보내졌는지 알기 위해 지구에 나타났다. 그리고 인간의 도움을 통해 창조주는 자기 자신을 알게 된다. 이러한 길은 진화라고 불린다. 이 길은 인간의 자기 인식이라는 고통스러운 과정을 수반한다. [54] 

예술의 발견은 매번 새롭고도 독보적인 세계의 이미지로, 절대 진리의 상형문자로 나타난다. 그것은 계시로 나타난다. 아름다운 것과 추한 것, 인간적인 것과 잔인한 것, 무한한 것과 유한한 것 등 세계의 모든 법칙을 한꺼번에 직관적으로 파악하고 싶은 순간적이고 열정적인 바람으로 나타난다. 예술가는 예술적 이미지를 창조하면서 이런 것들을 표현한다. 그는 독특한 절대의 포획자다. 무한한 것의 느낌은 이미지의 도움으로 유지되는데, 여기서 무한한 것은 유한한 것을 통해서, 정신적인 것은 물질적인 것을 통해서, 광대한 것은 프레임을 통해서 표현된다. [55] 

시나리오에는 다음과 같은 에피소드가 쓰여 있었다. 농부가 날개를 만들어 교회 위로 올라가서 뛰어내리다 땅에 떨어져 박살이 난다. 우리는 이 에피소드를 '재구성하고' 에피소드의 심리적 본질을 검토해보았다. 어떻게 하면 하늘을 날 수 있을지 평생 생각해온 사람이 분명히 있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것은 실제로 어떻게 일어났을까? 사람들이 그를 쫓아오고 그는 서둘렀다. 이윽고 그가 뛰어내렸다. 최초로 날았던 사람은 무엇을 보고 느꼈을까? 그는 뭔가 볼 새도 없이 곧장 떨어져 박살이 났다. 그는 기대하지 않은 끔찍한 자신의 추락만 느꼈을 뿐이다. 비행의 열정, 비행의 상징은 사라졌다. 여기서 의미는 우리에게 이미 익숙한 연상들과 비교하여 매우 직접적이고 기초적이기 때문이다. 스크린에는 흙 묻은 순박한 농부가 나와서 곧장 땅으로 떨어져 박살 나 죽어야만 했다. 이것은 구체적인 사건이며, 누군가가 달려오는 자동차에 뛰어들었다가 만신창이가 되어 아스팔트 위에 쓰러져 있는 것을 지금 우리가 보는 것처럼, 그렇게 주변 사람들에게 관찰되는 인간 참사이다. 

우리는 이 에피소드를 구축하고 있는 조형적 상징을 무너뜨릴 기회를 오랫동안 찾다가 악의 근원이 바로 날개에 있다는 생각에 이르렀다. 그리고 에피소드의 '이카로스' 콤플렉스를 무너뜨리고자  열기구가 고안됐다. 가죽과 밧줄, 넝마로 만든 볼품없는 열기구였다. 우리가 볼 때 열기구는 에피소드에서 그릇된 열정을 제거하고 사건을 특별하게 만들어주었다. 

가장 먼저 묘사해야 하는 것은 사건이지, 사건에 대한 자신의 태도가 아니다. 사건에 대한 태도는 영화 전체에 의해 규명되어야 하고 영화의 총체성 안에서 나와야 한다. 이것은 하나의 모자이크 안에서 모든 조각이 각자 나름대로 동등한 색깔을 띠고 있는 것과 같다. 푸른색이나 하얀색, 아니면 빨간색으로 각기 다르다. 그러나 나중에 완성된 그림을 보면 작가가 무엇을 고려하고 있었는지 알 수 있다. [108-109] 

수도원 밖에 펼쳐진 현실을 왜곡하는 장벽 안에서 보호를 받던 안드레이가 바깥 세계의 삶과 부딪혔을 때 얼마나 속수무책이었을지는 쉽게 상상할 수 있을 것이다. 고통의 길을 거치며 민중의 운명과 하나가 되고 나서야 비로소 안드레이는 현실과는 괴리된 선善에 대한 믿음을 버리고 출발점으로 다시 돌아간다. 다시 말해 사랑과 자비, 박애 사상으로 회귀한다. 하지만 그는 이미 고통받는 민중의 열망을 표현한 데서 이 사상의 위대하고 고매한 진리를 감지했다.

전통적인 진리는 오직 자기 자신의 경험으로 뒷받침될 때만 진리로 남는다. [120] 

-- 라승도 옮김(2021: 42-43)



+

1964년 11월 제작 착수, 1966년 12월 시사회. 2년이면 이런 불후의 대작을 만드는데 나는 단편 하나를 못 쓰네. 어제 처음 자료가 완전하지는 않아도 부족하지는 않다는 느낌이 왔다. 이제 읽으면 된다는. "분류압"과 함께. 



OST by Вячесла́в Алекса́ндрович Овчи́нников (Vyacheslav Aleksandrovich Ovchinnikov
비야체슬라프 옵치니코프 


Tuesday, July 06, 2021

Ennio Morricone (1966) Sergio Leone's Dollars trilogy OST

Sergio Leone (1964) Per un pugno di dollari
A Fistful of Dollars 황야의 무법자 OST: #01 Titoli (Title)
by Ennio Morricone


Sergio Leone (1965) Per qualche dollaro in più 
For a Few Dollars More 석양의 건맨 title music
by Ennio Morricone


Sergio Leone (1966) Il Buono, Il Brutto e Il Cattivo 
The Good, the Bad and the Ugly 석양에 돌아오다 (석양의 무법자) OST
by Ennio Morricone


어휴, 이 천재... 세 편 다 못 봤는데 내용이 어떻든 레오네의 에픽 정경이야 예상 안이라도, 스파게티 웨스턴이란 용어가 무색하도록 음악만으로도 새로 장르를 만드셨네. 전곡을 이어 들으니 오히려 새록새록 놀라운 엔니오 모리코네.   


원작: 黒澤明 (Akira Kurosawa, 1961) 用心棒 Yojimbo 
요짐보 trailer


또 다른 리메이크: Walter Hill (1996) Last Man Standing 
라스트맨 스탠딩 trail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