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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nday, March 01, 2026

Malebranche (1675) De la méthode

 

from: Nicolas Malebranche 지음, 이충훈 옮김, 진리의 탐구 4: 방법에 대하여 (De la recherche de la vérité, Livre VI: De la méthode, 1674-1675/1712), 나남출판, 2026 


index가 걸작! 


Dans le second chapitre, il suppose d’abord certaines vérités peripatétiques. 1°. Que tous les corps naturels ont d’eux-mêmes la force de se remuer : ce qu’il ne prouve point ici ni ailleurs. Il assure au contraire, dans le premier chapitre du second livre de physique, qu’il est ridicule de s’efforcer de le prouver, parce que, dit-il, c’est une chose évidente par elle-même, et qu’il n’y a que ceux qui ne peuvent discerner ce qui est connu de soi-même de ce qui ne l’est pas qui s’arrêtent à prouver ce qui est évident par ce qui est obscur. Mais on a fait voir ailleurs qu’il est absolument faux que les corps naturels aient dans eux-mêmes la force de se remuer, et que cela ne paraît évident qu’à ceux qui, comme Aristote, suivent les impressions de leurs sens et ne font aucun usage de leur raison. [547] 

 

아리스토텔레스는 2장에서 우선 자기 학파에서 내세우는 어떤 진리들을 가정한다. 첫째, 모든 자연물은 스스로 움직일 수 있는 힘이 있다. 그런데 이 점은 이곳에서도, 또 다른 곳에서도 입증되지 않았다. 반대로 그는 자연학 2권 1장에서 이를 증명하려고 노력을 기울이는 일은 우스꽝스러운 일이라고 확신한다. 그의 말로는 그 자체로 명백한 것이고, 그 자체로 알려진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을 구분할 수 없는 사람들뿐인데, 이들은 모호한 것을 통해 명백한 것을 증명하는 데 집중하는 이들이다. 그런데 다른 곳에서는 자연물이 스스로 운동하는 힘을 가졌다는 것은 완전히 거짓임을 보여 주었다. 이 점은 아리스토텔레스 같이 감각의 자극을 따르고 이성이라고는 전혀 사용하지 않는 사람들에게만 명백해 보일 뿐이다. [137] 



Friday, July 19, 2024

Ta protera analutika

김재홍 옮김/주석, 아리스토텔레스의 분석론 전서, 서광사, 2024.

http://aladin.kr/p/5R7SW


2024년 내가 태어난 👶🎉 7월 ♌ 한반도 🌏 초대형 💣 사건 💥 발생. 🌟🎇🎆😱

이보다 🎅 더 좋을 순 🎁💎 없다! 📘😍 꿈인가? 😇 생신가? 🎠😵   

온갖 ⛈⛆👢🚫⛺☃⛇ 회한과 🍃🍂😭 갖은 🌈🌿🎈 희망이 🌄🚀😊 피어오른다. 🌱🌷🌸

지금 ⌛ 이 순간 🎯🌠 내 손에 🙌📖 떨린다. 💫💃💓 오늘부터 📅🎎 동침! 💕😘💞

  

Friday, May 27, 2022

Community of practice

 https://en.wikipedia.org/wiki/Community_of_practice

ref. Jean Lave & Etienne Wenger (1991) Situated Learning 


cf.

설문원 (2021:19, f.1): 여(Yeo)는 앞의 글에서 "공통적인 목표를 가지고 있고 유사한 방식으로 체계를 이해하도록 학습된 사람들의 집단"이라는 정의를 채택하고 있으며, 경영학이나 조직학에서는 "특정한 주제에 대한 문제점과 생각들을 끊임없이 나누면서 서로의 지식이나 전문성을 발전시키는 비공식 집단"이라는 정의가 사용되고 있음.  


20중-30초 십 년 정도 이러한 활동에 대부분의 시간을 쏟았지만, 서울에서였기 때문인지, 그러니까 주로 한국인, 조직이 없어서였는지, 그러니까 한국... 가장 근본적인 원인은 개개인의 목표가 다르다는 것이었다. (공통의 목표란 표방일 뿐, 동상이몽. 표리부동의 괴리가 너무 멀다. 문제는 위장하는 것은 좋은데 스스로 인식하지 못하는 것으로밖에 보이지 않는 경우가 더 많다는 사실. 의도적으로 낚시하려고 작정하고 들어오는 사람들은 별도로 대응할 수 있으니 의외로 위협이 되지 못한다. 깔끔하게 치고 빠져 주면 오히려 활력을 주기도 하고.) 아무튼 그 어떠한 경우에도 누구의 마음도 다치지 않게 하는 길을 만드는 방법만 알게 되었다. 그것이 결국 가장 중요하다는 진실과. 새옹지마의 취약한 공동체 버전. 그러나 결국 나 자신은 사람을 가리는 사람이 되었다. 조금 현명해졌다고 해 줄까. 모르겠지만, 여전히 아쉽다. 조직 안에서는 어떨지 궁금하긴 하네. 희망적으로. 내 희망은 안 되더라도.


Monday, February 14, 2022

René Descartes (1628) Regulae ad directionem ingenii 정신지도규칙

René Descartes (1628?): 그러므로 우리가 생각해야 될 것은, 모든 학문들이 서로 연결되어 있으므로 따로 분리해서 하는 것보다 그것들을 함께 탐구하는 것이 훨씬 더 쉽다는 점이다. 그러므로 진지하게 사물의 진리를 탐구하고자 하는 사람은 개별적인 학문을 취해서는 안 된다. 학문들은 서로 연결되어 있고 서로 의존하고 있기 때문이다. 오히려 우리가 유념할 것은, 이성의 자연적인 빛을 증대시키는 일이다. 그렇지만 이것도 이런저런 학적인 난제를 풀기 위해서가 아니라, 각각의 삶의 상황에서 무엇을 선택해야 할지를 지성이 의지에 보여주기 위함이다. 이렇게 되면 조만간에 자신이 개별적인 것을 연구한 사람보다 훨씬 더 많은 진보를 했음을 알게 될 것이고, 또 다른 사람들이 원하는 것뿐만 아니라 자신이 기대한 것보다 훨씬 더 높은 곳에 도달했음도 알게 될 것이다. 

-- 이현복 옮김(2019: 22) 


정말? 전학 갈 텐데. 


Tuesday, September 14, 2021

Peter Janich (1994) Die konstruktive Wissenschaftstheorie 구성주의 과학철학

이기흥(2004) : 인간의 기술적(技術的) 활동들이 과학의 방법적 근간이 된다는 주장을 통해 과학은 인간의 활동과 떼어놓을 수 없다는 테제를 내세우는 방법적 구성주의는 반객관주의 혹은 반실증주의를 추구하는 현상학과 해석학 혹은 생철학 전통(그리고 더 나아가 실존주의 전통)에 가까이 서 있는 것으로 보인다. 사실 현상학이나 해석학적 입장들은 공히 (위에서 기술한) 실증주의 경향의 과학철학들에 반대해 과학 문제의 해명에서 인간 주체를 배제해서는 안 된다는 입장을 고수한다. 그러는 가운데 그들은 모든 이론적 견해들이나 지식 구성의 시원(始原)을 의식 현상이나 문화 혹은 삶 현상에서 찾고자 할 뿐 아니라 이 영역들은 그 자체로 또한 그들의 철학적 이론화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논리실증주의에서의 감각 기관에 의해 포착되는 관찰 명제도 실은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는 사항이기도 하다. 하지만 논리실증주의자들은 이를 단순히 일종의 자연 과정으로 치부한다. 다른 한편, 해석학에서 말하는 전이해의 영역은 위에서 포퍼의 비판적 합리주의 및 그 이후의 과학철학적 발전들과 관계해 논해졌던 이론 의존적 관찰 혹은 패러다임 내지 연구 프로그램 혹은 과학 연구 전통 개념들과 비교될 수도 있을 것이다.) 현상학과 해석학의 이러한 입장은 분명 방법적 구성주의자들의 논의 맥락과 상통하는 부분이 있다. 하지만 이러한 철학적 입장들은 자신들이 이론화하겠다는 연구 영역을 종종, 방법적 구성주의와는 달리, 그 자체로 연구하는 경향을 보이기도 했으며, 그리고 그러한 작업들이 과학의 근원을 연구하는 이론이라 손치더라도 그들의 작업이 갖는 과학과의 관계는 내적 성격의 것이라기보다는 외적 성격의 것이었다. 사실 그들의 "과학철학적" 작업은 실제의 과학 이론들이 어떻게 해서 성공적 이론이 될 수 있었는지에 대해서는 그 어떤 유효한 설명을 제공하지도 않으며 또한 그 부분에 대한 논의는 그들의 논의에서 찾아보기 힘들다. 그 이유는 종종 그들 내부의 문제에서 기인하기도 한다. 왜냐하면, 과학에 근거를 마련해주는 작업은 고사하고 그 철학들 스스로의 토대 자체가 종종 의심되기도 해 그들은 이 일에 몰두해야 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예를 들어, 후설이 선험적 주체와 생활 세계 사이를 오가며 고민한 흔적은 이에 대한 징표이기도 하다. 그리고 하이데거는 후설과는 다른 철학적 토대를 찾아나서지 않았던가? 그러나 실증주의자들 또한 실존주의가 말하는 세계의 근본 현상들이 다시 어떻게 유효한 방식으로 근거지워질 수 있겠는가 하고 반문하기도 한다. 해석학의 경우 자기 근거의 문제는 "해석학적 순환"이란 테제를 통해 공공연히 피하게 되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해석학의 해석학적 순환론 자체는, 마치 상대주의자들의 주장이 그 주장 자체의 상대화를 함의하지 말아야 하는 것처럼, 해석학적 순환 고리로부터 떨어져 있을 경우에나 그 타당성을 갖는 것으로 보인다. 사실 해석학적 이론들은 인간의 이해 혹은 해석 과정에 대한 하나의 객관적 이론이고자 한다. 그렇다고 한다면 그러한 해석학적 진술들에서 주장되고 있는 사실들 자체는 자기 근거를 갖는 것인가? 이러한 종류의 시원적 근거 추적 시도들과 연관해 한스 알베르트가 주장하는 테제는, 하나의 주장을 다른 주장을 통해 최종적으로 근거지우려는 시도들은 모두 실패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사실, "주장적" 성격의 언술들을 근거짓는 작업과 관련해서는 이 테제는 타당한 것으로 보인다. 이는 철학 자체에도 해당된다. 철학이 이렇게 자기 집안 단속도 제대로 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철학은 과학에 과연 토대를 제공할 수 있단 말인가? 요약하자면, 과학 토대화 작업과 관련해, 현상학이나 해석학에서의 작업들은 과학과 아주 느슨한 관계를 맺을 수밖에 없는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방법적 구성주의는, 상황이 이러한데도, 여전히 과학을 토대화하겠다는 프로그램을 갖는다. 가능한 일인가? 그러나 독자들이 알아두어야 할 사항 하나는, 방법적 구성주의의 경우 과학 토대화 개념은 현상학 및 해석학의 그것과 서로 다르다는 사실이다. 이 철학 사상은 과학과의 관계에서 그리고 자기 자신과의 관계에서 위와 같은 류의 절대적 자기 토대화를 시도하지 않는다. 그것은 오히려 방법적 토대화다. 이러한 류의 토대화는 (마치 빵을 구워내기 위해서는 제빵 과정을 수행하면 되는 것처럼) 목적 수행을 위한 수단이 강구됨으로써 그 임무가 완수되는 것으로 이해된다. 예를 들어 과학이 추구하는 (철학적 시각에서의) 목적이 완수될 수 있는 수단들이 과학철학적 재구성 작업에 의해 강구될 수 있으면, 과학의 (철학적) 토대화 작업은 완수될 수 있다. [...] 방법적 구성주의는 이렇게 토대화 개념을 사실 관계에서가 아니라 목적과 수단 관계, 즉 방법적 시각에서 이해한다. 이는 방법적 구성주의가 현상학이나 해석학적 전통의 과학철학과 갖는 작지 않은 차이점이다(방법적 구성주의자들에게 방법론적 시각은 존재론적 혹은 사실론적 시각과 서로 대조된다). [290-293]


그러니까 뒤프렌을 처음 열었을 때 5장부터 확인한 것은 (한국의 고졸자로서) 당연한 일이었다. 근거를 제시하지 못하는 이론으로 (한국의 고졸 이상 학력자인) 사람들을 설득하는 것은 불가능한데, 현상학에 대한 나의 막연한 이미지에 따르면 그 점이 의심스러웠다. 하지만 니체와 하이데거 이후 근거짓기나 합리성의 타당성 개념 자체를 도마 위에 올렸다가 쓰레기통에 버린 학자들이라면 내가 습득하지 못한 다른 설명 방법이나 대안적 노선을 가지고 있으리라는 기대를 가졌던 것도 사실이다. 들뢰즈와 가타리의 리좀 등등. 하지만 이쪽으로는 등록금만으로 해결이 안 되는 현실에 아무리 발품을 팔아도 결국 아무런 훈련을 받지 못했다. (교양 강의나 독서는 훈련이 아니다. 경기 비디오 관람만으로 운동선수가 되는 훈련이 이루어지지 않듯이.) 스타들의 후광과 귀국자들의 영광뿐. 있다 해도 그림의 떡인 셈.     


방법적 구성주의의 입장은 반객관주의, 반(절대적)토대주의, 반사실관계적 시각 혹은 반인지주의적 시각들이다. 반면, 방법적 구성주의 철학은 영 · 미 철학 전통의 간주관성 혹은 초주관적 테스트 가능성을 강조하는 반형이상학적 입장을 공유하며, 현상학 혹은 해석학적 전통의 실천성 테제 혹은 문화주의적 시각을 공유하며, 또한 구성주의와 같이 인식 성취에서의 인간의 능동성에 시선을 준다. 그리고 이 모든 입장을 끌어안는 핵심 테제는 행위론적 시각 및 방법론적 시각이다. 이와 함께 방법적 구성주의는 또 합리주의적 입장도 취한다(게다가 방법적 구성주의에서는 지식의 초주관성이 강조되고 있다). 방법적 구성주의의 이러한 입장들은 현대 철학에서 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사상 중의 하나인 포스트모더니즘적 사고와 적절한 우호 및 긴장 관계를 이룬다. [...] 방법적 구성주의는 인간의 본질에 대해 논하지도 않으며 또한 인간의 본질이 이성이라고 하지도 않는다. 인간은 이성적일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그것은 인간의 노력 여하에 달린 문제다. 이 모든 것은 인간이 자연 존재가 아니라 행위하는 존재이기에 가능한 얘기들이다. 즉, 인간이 이미 어떤 본질을 가지고 있어 이러저러한 방식으로 행위를 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은 행위를 통해 그들 스스로를 규정한다는 것이 방법적 구성주의의 입장이다. 그리고 행위를 제한하는 요소들 또한 다양할 수 있다. 인간들은 완벽한 조건이 갖추어진 인큐베이터에서 자라나는 존재가 아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러한 인간 환경들은 (항상은 아니지만) 때때로 인간들 스스로에 의해 통제 혹은 구성되기도 한다. 이는 인간 행위들이 인간의 본질과 인간의 환경 요소의 그 어느 중간에 위치하고 있음을 말한다. 즉, 방법적 구성주의는 모더니즘 주체 철학과 포스트모더니즘의 반주체 철학의 중간에 위치한다. 다른 한편, 방법적 구성주의는 조건적 진리관을 견지한다. 이는 다음과 같은 의미에서다: 어떤 목적이 주어지고 그에 대한 수단이 강구될 때, 이 수단들의 적절성 혹은 옳고 그름은 언제라도 결정될 수 있다. 그리고 경우에 따라서는 하나의 목적에 다수의 수단들이 동일한 기능을 발휘할 수도 있고, 하나의 수단이 경우에 따라서는 서로 다른 목적들에 기여할 수도 있다. 게다가 이때의 수단들이 보여주는 기능 자체는 개인적 차원에서만이 아니라 간주관적 혹은 초주관적으로 검증되고 또한 인정될 수 있다. 이러한 진리관은 주장과 사고 및 견해들의 수렴과 분산을 적절한 수준에서 조정해준다. 달리 말해, 위와 같은 조건적 진리관 하에서는, 한편으로는 합리성, 이성, 보편성 개념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는 (사상 내지 문화의) 상대성 혹은 다양성은 서로 배제하는 것이 아니라 적절한 수준에서 서로 조화될 수 있다. 이러한 의미에서 방법적 구성주의는 다시 모더니즘의 진리 절대주의와 포스트모더니즘의 진리 상대주의 사이에 위치한다. [293-295]   


그러니까 학부 때 교양 수업에서 처음 제대로 접한 매클루언은 곧바로 타도의 대상이 되었다. 역사 유물론에 대한 생리적 반감의 2차적 양상이었달까. 그런 그가 한국에서 1990년대에 베스트셀러였던 현실은 정권의 IT 산업정책과 무관하지 않았다. (4차산업 시대라는 지금은 대입 논술고사 대비 고교생들의 필독서가 되었고.) 어쩌면 그가 아니었다면 인문계로 넘어올 필요까지는 느끼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북해의 소용돌이라니, 차라리 외계인 지구 대침공이라고 하지 그래. 인간의 행위와 우리의 선택에 다른 이름들을 붙이고 싶어하는 저의가 학계라는 프로페셔널 시장에서 파이를 점유하기 위한 경쟁력 전략인 것은 차라리 괜찮다. 자기 인생이니까. '적'을 과장해야 자신의 힘과 값이 올라간다는 세속의 인심을 아는 데 별다른 지성이 필요하지 않다. 그 '적'의 정체와 전략이 또한 모호하고 전면적이어야 조직적 해결 절차가 진행되는 걸 원천적으로 방해할 수가 있겠고. 그렇게 부정하는 데 성공한 책임과 회피하는 데 성공한 고통은 어떤 다른 사람이 맡으라는 말인가? 부정하고 회피하는 데 실패하여 '무능력'을 증명한 사람? 소용돌이에 뛰어들 용기와 의지가 부족해서 '생존력'이 낮은 사람? 엘륄도 그 점에서는 다를 바 없어 보인다. 공부할 필요는 있겠지만.  


방법철학은 이렇게 딩글러의지주의, 로렌첸의 행위주의 그리고 야니히에 와서는 문화주의로 변모해나가고 있는 중이다. 이 번역서는 그[페터 야니히]가 방법적 구성주의 철학의 행위론적 시각을 이어받아 그것을 문화주의적 시각을 가미해 각색하기 시작했던 시기의 저작이다. [296]


잘만 쓰면 취지에 딱인 것 같기도 한데 판단이 안 되네. 페이퍼는 커녕 이 입문서조차 숙독할 시간이 없는 현실로서는 일단 보류. 이 상태로 보고하면 보고하는 시점이 늦었다고 벼락 먼저 떨어지던 과거는 그저 그리움의 대상으로. (난 더이상 단기에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남아 있지 않았을 때 바로가 아니라 그런 상태에서도 어떻게든 온갖 불필요하거나 무리수인 난리를 다 쳐 본 다음에야 여쭈었기 때문에 적절 시점에 비해 결과적으로 두세 배의 시간이 낭비된 다음이 되곤 했다. 과유불급. 이 감은 참 늦게 생겼기에 괜한 고생을 많이 했는데, 여기서는 뭐 이러나저러나 쓸모가 없다.)


Peter Janich (1994): 게다가 학문을 대상으로 하는 메타론적 판단 문제에서는 문외한들도(각각의 과학자들 또한 자신의 학문 분야 이외의 다른 모든 학문 분야에서는 역시 문외한일 것이다), 그들이 과학의 결과들에 의해 일정 방식으로 영향을 받자마자, "과학의 영향권에 든 사람은 과학에 대해 언급할 자격이 있다"는 식의 신념을 가지고는, 자신도 과학 이론들에 대한 나름의 판단 능력이 있을 거라 생각하는 경향을 종종 보인다. 과학에 대한 이러한 식의 사고방식은 마치 누군가가 한 번 의학이나 심리학이 실천되고 있는 병원 같은 기관의 환자나 고객이 되고난 후 이러한 과학적 의학이나 심리학에 대해 자기 자신도 나름의 판단을 내릴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과 유사하다. 다시 말해, 위와 같은 사고를 가진 사람들은 유기화학, 인류사, 뇌의 신진 대사 혹은 천체 사건 등과 같은 특수한 과학적 물음들은, 일반적으로 그렇게 이해되고 있듯이, 당연히 특수 전문 지식을 통해 설명되어야 하는 것으로 보는 반면, (과학 바깥에서 제기되는 주제인) 과학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를 두고 벌어지는 담론에는, 마치 어느 누구라도 그러한 문제에 관한 한 거기서 요구되는 능력들을 충분히 갖추고 있기라도 한 것처럼, 자기 나름의 생각을 가지고 같이 끼여 논쟁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일상 삶에서의 아주 간단한 경험이 이 같은 사고 방식에 대해 경종을 울리고 있다: 우리 삶에는, 한편으로는 그림을 그리고 소나타를 작곡하고 기계를 제작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그림에 대해, 작곡에 대해, 기계 제작에 대해 하나의 이론이나 과학을 발전시키는 인간의 능력들이 있다는 사실에 어느 누구도 이의를 달지 않을 것이다. 우리가 이렇게 과학 활동을 몸소 직접 행하는 것과 과학에 대해 논하는 일이 전적으로 서로 다른 과제라는 사실을 알게 되면, 우리는 즉시 한편으로는 과학 연구 때 사용되는 언어와 다른 한편으로는 과학에 대해 논의할 때 사용되는 언어가 서로 다른 언어들이라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15-16] 

"생활 세계적"이라는 개념은, 여기서 우리가 이 개념에 대한 다른 철학적 의미, 예를 들어 그것에 대한 현상학적 의미는 도외시하고 논하자면, 삶을 헤쳐나가는 실천(Praxen der Lebensbewältigung)과 연계되어 사용되는 개념으로, 이는 다시 기존하는 인간의 실천 영역들은 삶에서 일반적으로 제기되는 인간의 욕구들을 해결해주고 있음을 말한다. 다른 말로 표현해, 생활 세계적 실천이란 우연히 출현하는 인간의 사치 현상이 아니라 오히려 삶의 조건과 삶의 요구 조건 하에서, 즉 빠듯한 생필품과 인간의 여러 요구 조건들 하에 나타나 실천되는 그러한 인간 행위 영역을 말한다. [38]    

-- 이기흥 옮김(2004) 


(영미의) "과학철학에서의 구성주의" 영어 위키와 본서의 "방법적 구성주의"를 차별되는 (독일의) "철학적(급진적) 구성주의"와 함께 하위의 일파인 "에어랑엔 학파"로 다루고 있는 독일어 위키의 내용이 많이 다르다. 역사적 전개만 다르고 뿌리는 같다고 봐도 되는 것인지 아니면 배경만 통하고 다른 내용인지 모르겠네. (한국미학회에서 "구축주의"로 합의한 예술에서의 constructivism과는 별개.) 이래저래 어설픈 상황이라 놀이터에 스크랩. 

주인이 주인 노릇 좀 하게 하려고 그 손에 고삐를 단단히 쥐어 주려고, 먼저 그럴 힘을 갖고자 십 년을 바쳤는데 어차피 위험한 선택이었으니까 결과적으로 실패해도 어쩔 수 없지만 마땅히 거쳐야 할 과정들은 유실된 채로 이처럼 소모적인 비효율로 하루하루가 날아가다니. 뭔가 쌓기는 커녕 그 혹독한 훈련으로 만든 근육들이 많이도 허물어졌다. 여기서는 교육이 엄격하다고 하면 전문성 없이 ad hominem이나 하거나 기껏해야 호사스럽게 (실은 학생의 연구 능력 성장을 저해하는) micro-managing을 받는 건 줄로나 착각들 한다. 이제 오래 못 갈 텐데. 


Saturday, September 11, 2021

methodology

Max Weber: 경험과학은 그 누구에게도 결코 그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는 가르쳐줄 수 없으며, 단지 그가 무엇을 할 수 있는지, 그리고 — 경우에 따라서는 — 그가 무엇을 원하는지를 가르쳐줄 수 있을 뿐이다. (김덕영 옮김, 2021: 5)


김덕영 (2021): 왜 같은 과학자 공동체 내에서, 그것도 역사학파 경제학이라는 커다란 테두리 안에 있는 과학자 공동체 내에서 세대 간의 대립과 갈등 그리고 투쟁이 일어났을까? 왜 독일 역사학파 경제학의 내부에서는 심지어 아들인 제3세대가 아버지인 제2세대를 살해하는 사태가 일어났을까? [221-222] 

이에 대한 답은 일차적으로 두 집단 사이에 존재하는 근본적인 지적-정신적 입장에서 찾을 수 있다. 독일 역사학파 경제학의 제3세대는 — 보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베버를 위시한 일군의 제3세대 학자들은 — 사회학과 사회정책에 대해 제2세대와는 근본적으로 다른 입장을 가지게 되었다. 이들 젊은 세대는 독일이 자본주의적 산업사회로 이행하는 과정에서 사회적 질서와 세력의 다양화, 집단들이나 계급들 간의 대립과 갈등 및 투쟁의 일상화 그리고 사회적 관계의 물화 및 탈도덕화를 인지하게 되었으며, 이 모든 것은 사회정책학회, 아니 역사학파 경제학이 추구하는 이론과 실천의 직접적인 결합 및 사회과학과 사회정책의 직접적인 결합의 방식으로는 해결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들은 사회과학의 과제를 객관적 현상과 과정에 대한 경험적이고 실증적인 인식에서 찾아야 한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되었다. 

사회정책학회와 독일 역사학파 경제학의 젊은 세대는, 엄밀한 의미에서 — 단순히 시간적인 의미에서가 아니라, 사회적 행위와 관계 그리고 사회질서를 규정하고 근거짓는 이념과 원리의 의미에서 — 진정한 근(현)대성을 발견하고 이를 실증적인 방법으로, 그러니까 객관적 사실에 대한 경험적 인식에 입각하여 해결해야 한다는 사실을 통찰했으며, 이에 따라 인식과 행위, 이론과 실천, 과학과 정치, 존재와 당위, 사실과 가치, 분석과 판단 그리고 사회과학과 사회정책 사이의 노동분업과 이에 기반을 둔 상호 협력관계의 의미와 필요성을 절감했던 것이다. 요컨대 독일 역사학파 경제학의 제2세대와 제3세대는 공히 근대를 대상으로 하는 과학, 즉 근대의 과학을 추구했지만, 구스타프 폰 슈몰러를 위시한 노장 세대와 이 세대를 추종하는 일군의 젊은 세대는 근대적인 과학을 구축하지 못한 반면, 막스 베버를 위시한 또 다른 일군의 젊은 세대는 근대적인 과학을 구축했다. 전자는 근대(적인 것)에 대한 전(前)근대적 과학에 머물렀던 반면, 후자는 근대(적인 것)에 대한 근대적인 과학으로 나아갔다. 바로 이 두 유형의 과학이 독일 역사학파 경제학과 사회정책학회에 공존하면서 대립, 갈등 및 투쟁은 불가피해졌으며, 이것이 공적인 형태로 표출된 것이 1909년 1914년 두 차례에 걸쳐 벌어진 가치판단 논쟁이다. [222-223] 


그러니까 내가 '근대성' 개념/역사에 우연히 관심을 가졌던 것이 아니라 단지 메이지 때문이 아니라 이것을 알아야만 하는 이유가 있었다. 어느 길을 다시 골라도 여기서 꼭 걸렸으니까. 


Max Weber (1910): 만약 그대가 한 특정한 당위에 대한 관심사에서 진정으로 명료한 이 특정한 가치판단에 따라 행위하기를 원한다면, 그렇다면 그대는, 과학적 경험에 따라 볼 때, 상기한 가치공리에 상응하는 그대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이런저런 수단들을 사용해야 한다. 만약 이 수단들이 그대에게 적합하지 않다면, 그대는 수단들과 목적 사이에서 선택해야 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나는 그에게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다: 그대는, 과학적 경험에 따라 볼 때, 그대의 가치판단을 실현하는 데 불가결한 수단으로 인해 의도하지 않은 다른 부차적 결과들이 초래될 수도 있다는 점을 고려해야 한다 — 그대에게는 이 부차적 결과들도 바람직한 것인가; "그렇다"인가 또는 "아니다"인가? 과학은 그 사람을 이 "그렇다"와 "아니다"의 경계까지 이끌 수 있다 — 왜냐하면 이 경계의 차안에 존재하는 것은 모두 경험적 과학분야가, 또는 논리학이 답을 줄 수 있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 다시 말해 순수한 과학적 문제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그렇다" 또는 "아니다" 자체는 더 이상 그 어떤 과학의 문제가 아니라 양심 또는 주관적 취향의 문제이다 — 어쨌든 그에 대한 답이 다른 정신적 영역에 있는 문제이다. 

-- 김덕영 옮김(2021: 236)


내가 썼는 줄. "가치공리"란 말만 빼고. 나의 시대와 정반대 방향의 흐름 속에서 같은 문제의식을 가졌던 베버. 덤으로 사회학자인 그가 왜 문화 연구를 하게 되었는지 이해하게 되었다. 지금 내가 어릴 때부터 싫어하는 사회학의 방법론 텍스트를 고통스럽게 읽고 있는 이유와 매한가지.      


김덕영: 방법론이란, 연구의 절차나 수단을 기술적으로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그 절차와 수단이 무엇인가를 들여다보는 ‘메타’적인 것 -- 이혜인@경향신문


김덕영: 막스 베버의 '창조적 절충주의' -- 최원형@한겨레 


정독도서관에서 공개 연속 강의하셨을 때 정말 많이 배웠고 복도에서 잠시 뵈었을 때 기억도 강하게 남았다. 면식이 없는 상태였음에도 온전히 100% 제자를 바라보는 눈빛을 받아서. 여태 국내에 chair가 없으시다니, 하여튼 여기 인문계는 만사가 전도되어 있다. 그런데 더이상은 오래갈 수가 없을 텐데.  


Monday, August 02, 2021

Verständlichkeit

G.W.F. Hegel (1806): 의식은 새롭게 현상하는 형태에서 내용의 확장과 특수화가 결여되어 있음을 깨닫는다. 그러나 더 나아가 의식은 구별들이 확실히 규정되어 그것들의 확고한 관계들 속에 정돈될 수 있게끔 해주는 형식의 형성 · 발양이 이루어져 있지 않음을 알아차린다. 이러한 발양이 이루어지지 않은 학문은 보편적 이해 가능성 · 지성성(Verständlichkeit)을 결여하며, 몇몇 개인들의 비교적(esoterisches) 소유물이라는 가상을 지닌다. — 비교적 소유물인 까닭은 그러한 학문이 오로지 그의 개념이나 그의 내적인 것 속에서만 겨우 현전하기 때문이다. 몇몇 개인들의 것인 까닭은 그러한 학문의 확장되지 않은 현상이 그의 현존재를 개별적인 것으로 만들기 때문이다. 완전히 규정되어 있는 것이야말로 비로소 동시에 공교적(exoterisch)이고 개념적으로 파악 가능하며 학습되어 모든 이의 소유물이 될 수 있다. 학문의 지성적 형식은 학문에 이르는, 모두에게 제시되고 모두를 위해 똑같이 만들어진 길이며, 지성을 통해 이성적 앎에 도달하는 것은 학문에 다가서는 의식의 정당한 요구이다. 왜냐하면 지성은 사유, 즉 순수한 자아 일반이고, 지성적인 것은 이미 잘 알려진 것이자 학문과 비학문적 의식에게 공통된 것으로서, 이를 통해 비학문적 의식은 직접적으로 학문에 들어설 수 있기 때문이다. 

이제 비로소 시작되고 따라서 세부적 완벽함이나 형식의 완전함에 도달하지 못한 학문은 바로 그 점에 관해 비난에 내맡겨져 있다. 그러나 이 비난이 학문의 본질에 적중해야 한다면, 그 비난은 저 형성 · 발양의 요구를 인정하지 않고자 하는 것이 부적절한 만큼이나 부당할 것이다. 다음과 같은 대립이 학문적 교양이 현재 풀려고 애쓰고 있지만 아직 그에 관해 적절히 이해하지 못한 가장 중요한 매듭인 것으로 보인다. 한쪽은 자료의 풍부함과 지성성을 내세우며, 다른 쪽은 최소한 이 지성성을 경멸하고 직접적 이성성(Vernünftigkeit)과 신성을 내세운다. 전자가 오로지 진리의 힘에 의해서이건 또한 다른 쪽의 격정에 의해서이건 조용히 침묵하게 되고  또 사태의 근거와 관련하여 스스로 압도되었다고 느꼈을지라도, 그렇다고 해서 그 편이 저 요구들과 관련하여 만족되어 있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그 요구들은 정당하지만 충족되어 있지는 않기 때문이다. 전자의 침묵은 다만 한편으로는 승리에,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지속적으로 자극된 기대와 약속들의 뒤따르지 않는 충족의 결과이곤 하는 권태감과 무관심에 속할 뿐이다.  

내용과 관련하여 다른 쪽 사람들은 때때로 아주 쉽사리 스스로 커다란 확대를 수행한다. 그들은 자기들의 지반에로 일군의 자료들, 요컨대 이미 잘 알려진 것과 정리된 것을 끌어들이며, 특히 기이한 것들과 호기심이 갈 만한 것들을 다룸으로써 그만큼 더욱 더 그런 종류의 앎이 이미 마무리한 여타의 것을 소유하는 동시에 또한 아직 규칙을 통해 정돈되지 않은 것마저도 지배함으로써 모든 것을 절대적 이념에 종속시키는 것으로 보인다. 이리하여 절대적 이념은 모든 것에서 인식되고 확장된 학문으로 성장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 확장을 좀 더 상세히 고찰하게 되면, 그것은 하나의 동일한 것이 자기 자신을 상이하게 형태화함으로써 성립한 것으로 나타나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은 단지 상이한 자료에 외면적으로 적용되어 상의성의 지루한 가상을 획득할 뿐인 하나의 동일한 것의 몰형태적인 반복이다.

-- 이신철 옮김(2013: 29-30)


고딩 때였다, Sokal affair가. 그때 난 참 늦게 터졌다고 느꼈다. 그리고 그것이 나만의 느낌이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않았다. 나만이 아닐 우리에게라면 그가 물리학자라는 사실은 거기서 아무런 의미가 없다. 우리가 문제시하는 건 내용이 아니라 방법이니까. 정확히 말하면, 방법들에 대한 기준들 (회피). 또는 없는 것을 마치 다른 식으로 있는 척 짜고 치는 행태. 엘리트주의 교육을 채택하고 있는 나라에서 학자가 신분이 되는 특별한 폐쇄적 형편을 국력과 위세로 밀어붙이면서 벌어지는 사정들이라고, 전통에 대한 열등감에 사로잡힌 나라에서 개방적 태도와 실용적 평가로 가장한 손쉬운 편승이라고 이해해 주면서. Erwin Metzke의 주해에 따르면, 계몽주의와 그에 대립하여 나름 그를 극복한 낭만주의에 대한 헤겔의 대결이라는데, 내 수준에 솔직한 감상은, 세상에 욕을 이토록 잘하는 사람 처음 본다며 감탄스럽다. (무슨 선전포고문이 이리도 길고 힘든지... 공명의 출사표 연작이 울고 갈 판. 어차피 살인적 실내 온도에 세월아 네월아.) 전장에 나가 보기도 전에 드디어 이긴 듯이 처절히/철저히 지치게 되니 꼭 이처럼 이기게 해 줄 것 같은 기분이 드는 대장인 걸까? 수재였단 분들이 보통 헤겔 전공인 걸 보면.       

아무튼 헤겔-비트겐슈타인-포퍼라는 적어도 교양 수준에서는 상식적으로 (거리가 멀면 대립도 안 하니까) 유의미한 교점이 없어 보이는 세 사람의 각자의 문제들 중에 그것 때문에 내가 미쳐 버리겠는 문제가 유사한 형태로 공유되어 있다. 모든 고전이 담고 있는 인류 공통의 문제들 말고. 그런데 지금으로서는 별로 반갑지가 않고 더 미칠 것 같다. 고의가 아니고(벤제에겐 중요하지만 메를로퐁티마저 방법으로 쓰는 헤겔이라니 등등) 어쩌다 보니 인지하게 되었지만 더 이상 파악할 시간이 없는데, 이미 손에 있는 자료들을 두고 또 넘어가지도 못하겠고, 난 내가 누군지 점점 더 알 수 없게 되어 버렸다. 그게 유일하게 아는 거였는데.   

리뷰들에 대한 리뷰를 훈련받지 못하면 전공한 것이 아니다. 그냥 교양이지. 근대라고 부른다며. 돈 있으면 알라딘 우수 고객.  

 

Sunday, May 16, 2021

Hans Blumenberg (1957) Nachahmung der Natur. Zur Vorgeschichte der Idee des schöpferischen Menschen 자연의 모방 - 창조적 인간 이념의 전사에 대하여

Hans Blumenberg (1957): 이 무학자 illiteratus가 학계의 권위자들을 마주할 때 보인 어조의 아이러니는, 전제조건들이 같지 않음을 고려하지 않고 자기도 대화에 끼워 주도록 요구하는 데에서 나타나는 말하자면 민주적 양식은 또 다른 기반을 가지고 있다. 그 사람은 자기가 하는 것과 할 수 있는 것을 토대로 — 자기 자신을 이해하고 자신의 가치를 정당화하는데, 이 새로운 각인이 눈길을 끈다. 수행과 자의식의 결합은 역사적으로 결코 자명하지 않지만 쿠자누스의 이디오타에게서 포착될 수 있다. 더 정확히 말하면, 우리가 여기에서 몰두하는 바로 그 관점에서 포착될 수 있다. 

정신에 대한 대화의 제2장에서 "문외한"은 대화의 상대자들인 철학자와 수사학자에게 자신의 수작업이, 즉 이 직업의 종사자를 근근이 먹여 살리고 있을 뿐만 아니라 일반 직업 순위에서는 그렇게나 낮은 등급으로 매겨지는 숟가락 만들기가, 자신의 자기이해와 자기평가를 위하여 자신에게 무엇을 뜻하는지를 설명한다. 물론 이 "예술"도 모방이긴 하지만, 자연의 모방이 아니라 신 자신의 무한한 아르스 infinita ars의 모방이다. 이 아르스가 참신하고 자연발생적이고 창조적인 한에서는 그렇지만, 사실상 이 세계를 창조해 온 한에서는 그렇지 않다. "우리 정신의 이념 밖에 있는 숟가락은 표본을 안 갖고 있다." 숟가락이 곧 예술의 고품위 생산품은 아니지만, 절대적으로 새로운 무엇이고, 자연에 미리 주어져 있지 않은 하나의 형상이며, 단순한 "문외한"은 그 형상을 만들어 내는 사람이다. "왜냐하면 나는 여기서 자연의 사물로부터 그 형태를 모방하지 않기 때문이다." 숟가락, 냄비, 접시 등 "문외한"이 만드는 형태들은 순수하게 기술적인 형태들이다. 그리고 그가 이러한 정황에 대해 기뻐하는 단계에서 현대 "산업 디자인"의 기본 특징인 생산품 자체의 부각 단계에 이르는 데에는 더 이상의 도약이 필요하지 않다. 인간은 존재하는 것에서 자신의 지위를 읽어 내기 위하여 더 이상 자연을, 우주를 바라보지 않고, 오로지 인간의 아르스에 의해서 생겨난 사물세계를 바라본다. 우리의 자리에서 또 중요한 것은 이디오타가 자신의 "수행"을 특히 화가와 조각가가 완성하는 것과 대비시킨다는 점이다. 이들은 사물에서 표본을 가져오겠지만, "나는 아니"라고 이디오타는 말한다. 여기서 창조적이고 참신한 인간의 모든 파토스 그리고 모방원칙과의 결별이 예술적 인간이 아니라 기술적 인간에게서 드러난다는 것은 평가할 수 없을 만큼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이 차이점은 아마도 여기에서 처음 실증적으로 강조되고 있을 것이다. 근본적으로 증명서의 가치는 바로 이 점에 있다. 창조적인 것을 입증하려는 이후의 태도, 즉 거의 전적으로 조형예술과 시문학에 집중하는 태도를 현재에도 취한다면 말이다. 거기서 작가가 자기 자신에 대해 그리고 창조하는 자발성에 대해 말하기 시작한다는 것은 중세 말 이후부터는 예술의 출현형식에 속한다. 반면에 기술 정신의 역사에서는 역사 담지자들의 그러한 자기증명서들이 훨씬 빈약하다. [...] 그것은 무엇보다도 기술의 "할 말 없음" 현상이다. [74-76] 

[...] 우리는 쿠자누스의 이디오타를 역사적 지표로 여겨야 하지, 역사를 형성하는 에너지로 여길 필요는 없다. [80] 

-- 양태종 옮김 (2011: 69-124) 


"존재와 자연의 동일성" 문제와 "창조적 인간" 이념 사이의 관계를 "역사의 현상학"으로 탐구한 논문. 최고! 이쯤은 그냥 오지게 재밌는 부분. 밑줄이 민폐. 부분 인용은 실례. 눈부신 해석 수준에 압도된다. 순결한 오라클. 해석의 힘을 무차별로 권력욕에 할당하여 중화하는 시도가 저 아래로 보이는 재미는 덤.  

헤겔을 직접 소화한 학자와 마르크스의 필터로 헤겔을 읽은 학자들의 길이 서로 얼마나 갈리는지 보여 준다. 중고딩 때부터 어찌어찌 지금까지 지식 없이 그저 "직성"으로 느껴 왔던 생리적 거부감의 대상이 특정하게 무엇인지 오늘에야 알게 되었다. 마르크스가 아닌 줄은 독일 이데올로기와 정치경제학비판을 부분이나마 읽자마자 선입관을 깨어 주는 그 지독한 인간주의에 반했기에 첫눈에 알았다. 헤겔도 비슷하다. 최강 난이도라기에 전공자의 개인 번역본과 직강으로 살짝 구경이나 하면서야 굳이 싫달 거리도 없었다. 상호주관성에는 개념 자체보다 그 고투에 어설피 감동받기도 했으니까. 주범이 누구인지 입증해 주는 것 같은 논문을 어렵게 구했던 날의 기억도 생생하고, 명저의 느낌이 나서 답인 줄 알고 서문만 읽은 오지랖도 어언 8년 전이네. 따지면 수십 년 동안 마음 한 켠에 풀리지 않는 실뭉치 같은 걸림돌로 남아 있었는데, 그 정체가 비로소 밝혀지다니, 뜻밖의 감회다. 마치 공범들을 알지만 범행을 밝힐 수 없어 답답했던 미제 사건이 해결된 기분. 그렇다고 지금 다윈을 읽지는 좀 말자. 어차피 내가 아는 정도의 학자 중에 간단한 도식으로 정리될 수 있는 경우는 없으니까. 중요한 건, 인용은 없어도 내 눈에도 읽히는 헤겔까지 멋져 보이게 만드는 하지만 니체와 후썰 정신으로 무장한, 위대한 이 분 블루멘베르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