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W.F. Hegel (1806): 의식은 새롭게 현상하는 형태에서 내용의 확장과 특수화가 결여되어 있음을 깨닫는다. 그러나 더 나아가 의식은 구별들이 확실히 규정되어 그것들의 확고한 관계들 속에 정돈될 수 있게끔 해주는 형식의 형성 · 발양이 이루어져 있지 않음을 알아차린다. 이러한 발양이 이루어지지 않은 학문은 보편적 이해 가능성 · 지성성(Verständlichkeit)을 결여하며, 몇몇 개인들의 비교적(esoterisches) 소유물이라는 가상을 지닌다. — 비교적 소유물인 까닭은 그러한 학문이 오로지 그의 개념이나 그의 내적인 것 속에서만 겨우 현전하기 때문이다. 몇몇 개인들의 것인 까닭은 그러한 학문의 확장되지 않은 현상이 그의 현존재를 개별적인 것으로 만들기 때문이다. 완전히 규정되어 있는 것이야말로 비로소 동시에 공교적(exoterisch)이고 개념적으로 파악 가능하며 학습되어 모든 이의 소유물이 될 수 있다. 학문의 지성적 형식은 학문에 이르는, 모두에게 제시되고 모두를 위해 똑같이 만들어진 길이며, 지성을 통해 이성적 앎에 도달하는 것은 학문에 다가서는 의식의 정당한 요구이다. 왜냐하면 지성은 사유, 즉 순수한 자아 일반이고, 지성적인 것은 이미 잘 알려진 것이자 학문과 비학문적 의식에게 공통된 것으로서, 이를 통해 비학문적 의식은 직접적으로 학문에 들어설 수 있기 때문이다.
이제 비로소 시작되고 따라서 세부적 완벽함이나 형식의 완전함에 도달하지 못한 학문은 바로 그 점에 관해 비난에 내맡겨져 있다. 그러나 이 비난이 학문의 본질에 적중해야 한다면, 그 비난은 저 형성 · 발양의 요구를 인정하지 않고자 하는 것이 부적절한 만큼이나 부당할 것이다. 다음과 같은 대립이 학문적 교양이 현재 풀려고 애쓰고 있지만 아직 그에 관해 적절히 이해하지 못한 가장 중요한 매듭인 것으로 보인다. 한쪽은 자료의 풍부함과 지성성을 내세우며, 다른 쪽은 최소한 이 지성성을 경멸하고 직접적 이성성(Vernünftigkeit)과 신성을 내세운다. 전자가 오로지 진리의 힘에 의해서이건 또한 다른 쪽의 격정에 의해서이건 조용히 침묵하게 되고 또 사태의 근거와 관련하여 스스로 압도되었다고 느꼈을지라도, 그렇다고 해서 그 편이 저 요구들과 관련하여 만족되어 있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그 요구들은 정당하지만 충족되어 있지는 않기 때문이다. 전자의 침묵은 다만 한편으로는 승리에,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지속적으로 자극된 기대와 약속들의 뒤따르지 않는 충족의 결과이곤 하는 권태감과 무관심에 속할 뿐이다.
내용과 관련하여 다른 쪽 사람들은 때때로 아주 쉽사리 스스로 커다란 확대를 수행한다. 그들은 자기들의 지반에로 일군의 자료들, 요컨대 이미 잘 알려진 것과 정리된 것을 끌어들이며, 특히 기이한 것들과 호기심이 갈 만한 것들을 다룸으로써 그만큼 더욱 더 그런 종류의 앎이 이미 마무리한 여타의 것을 소유하는 동시에 또한 아직 규칙을 통해 정돈되지 않은 것마저도 지배함으로써 모든 것을 절대적 이념에 종속시키는 것으로 보인다. 이리하여 절대적 이념은 모든 것에서 인식되고 확장된 학문으로 성장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 확장을 좀 더 상세히 고찰하게 되면, 그것은 하나의 동일한 것이 자기 자신을 상이하게 형태화함으로써 성립한 것으로 나타나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은 단지 상이한 자료에 외면적으로 적용되어 상의성의 지루한 가상을 획득할 뿐인 하나의 동일한 것의 몰형태적인 반복이다.
고딩 때였다, Sokal affair가. 그때 난 참 늦게 터졌다고 느꼈다. 그리고 그것이 나만의 느낌이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않았다. 나만이 아닐 우리에게라면 그가 물리학자라는 사실은 거기서 아무런 의미가 없다. 우리가 문제시하는 건 내용이 아니라 방법이니까. 정확히 말하면, 방법들에 대한 기준들 (회피). 또는 없는 것을 마치 다른 식으로 있는 척 짜고 치는 행태. 엘리트주의 교육을 채택하고 있는 나라에서 학자가 신분이 되는 특별한 폐쇄적 형편을 국력과 위세로 밀어붙이면서 벌어지는 사정들이라고, 전통에 대한 열등감에 사로잡힌 나라에서 개방적 태도와 실용적 평가로 가장한 손쉬운 편승이라고 이해해 주면서. Erwin Metzke의 주해에 따르면, 계몽주의와 그에 대립하여 나름 그를 극복한 낭만주의에 대한 헤겔의 대결이라는데, 내 수준에 솔직한 감상은, 세상에 욕을 이토록 잘하는 사람 처음 본다며 감탄스럽다. (무슨 선전포고문이 이리도 길고 힘든지... 공명의 출사표 연작이 울고 갈 판. 어차피 살인적 실내 온도에 세월아 네월아.) 전장에 나가 보기도 전에 드디어 이긴 듯이 처절히/철저히 지치게 되니 꼭 이처럼 이기게 해 줄 것 같은 기분이 드는 대장인 걸까? 수재였단 분들이 보통 헤겔 전공인 걸 보면.
아무튼 헤겔-비트겐슈타인-포퍼라는 적어도 교양 수준에서는 상식적으로 (거리가 멀면 대립도 안 하니까) 유의미한 교점이 없어 보이는 세 사람의 각자의 문제들 중에 그것 때문에 내가 미쳐 버리겠는 문제가 유사한 형태로 공유되어 있다. 모든 고전이 담고 있는 인류 공통의 문제들 말고. 그런데 지금으로서는 별로 반갑지가 않고 더 미칠 것 같다. 고의가 아니고(벤제에겐 중요하지만 메를로퐁티마저 방법으로 쓰는 헤겔이라니 등등) 어쩌다 보니 인지하게 되었지만 더 이상 파악할 시간이 없는데, 이미 손에 있는 자료들을 두고 또 넘어가지도 못하겠고, 난 내가 누군지 점점 더 알 수 없게 되어 버렸다. 그게 유일하게 아는 거였는데.
리뷰들에 대한 리뷰를 훈련받지 못하면 전공한 것이 아니다. 그냥 교양이지. 근대라고 부른다며. 돈 있으면 알라딘 우수 고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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