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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turday, September 11, 2021

methodology

Max Weber: 경험과학은 그 누구에게도 결코 그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는 가르쳐줄 수 없으며, 단지 그가 무엇을 할 수 있는지, 그리고 — 경우에 따라서는 — 그가 무엇을 원하는지를 가르쳐줄 수 있을 뿐이다. (김덕영 옮김, 2021: 5)


김덕영 (2021): 왜 같은 과학자 공동체 내에서, 그것도 역사학파 경제학이라는 커다란 테두리 안에 있는 과학자 공동체 내에서 세대 간의 대립과 갈등 그리고 투쟁이 일어났을까? 왜 독일 역사학파 경제학의 내부에서는 심지어 아들인 제3세대가 아버지인 제2세대를 살해하는 사태가 일어났을까? [221-222] 

이에 대한 답은 일차적으로 두 집단 사이에 존재하는 근본적인 지적-정신적 입장에서 찾을 수 있다. 독일 역사학파 경제학의 제3세대는 — 보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베버를 위시한 일군의 제3세대 학자들은 — 사회학과 사회정책에 대해 제2세대와는 근본적으로 다른 입장을 가지게 되었다. 이들 젊은 세대는 독일이 자본주의적 산업사회로 이행하는 과정에서 사회적 질서와 세력의 다양화, 집단들이나 계급들 간의 대립과 갈등 및 투쟁의 일상화 그리고 사회적 관계의 물화 및 탈도덕화를 인지하게 되었으며, 이 모든 것은 사회정책학회, 아니 역사학파 경제학이 추구하는 이론과 실천의 직접적인 결합 및 사회과학과 사회정책의 직접적인 결합의 방식으로는 해결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들은 사회과학의 과제를 객관적 현상과 과정에 대한 경험적이고 실증적인 인식에서 찾아야 한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되었다. 

사회정책학회와 독일 역사학파 경제학의 젊은 세대는, 엄밀한 의미에서 — 단순히 시간적인 의미에서가 아니라, 사회적 행위와 관계 그리고 사회질서를 규정하고 근거짓는 이념과 원리의 의미에서 — 진정한 근(현)대성을 발견하고 이를 실증적인 방법으로, 그러니까 객관적 사실에 대한 경험적 인식에 입각하여 해결해야 한다는 사실을 통찰했으며, 이에 따라 인식과 행위, 이론과 실천, 과학과 정치, 존재와 당위, 사실과 가치, 분석과 판단 그리고 사회과학과 사회정책 사이의 노동분업과 이에 기반을 둔 상호 협력관계의 의미와 필요성을 절감했던 것이다. 요컨대 독일 역사학파 경제학의 제2세대와 제3세대는 공히 근대를 대상으로 하는 과학, 즉 근대의 과학을 추구했지만, 구스타프 폰 슈몰러를 위시한 노장 세대와 이 세대를 추종하는 일군의 젊은 세대는 근대적인 과학을 구축하지 못한 반면, 막스 베버를 위시한 또 다른 일군의 젊은 세대는 근대적인 과학을 구축했다. 전자는 근대(적인 것)에 대한 전(前)근대적 과학에 머물렀던 반면, 후자는 근대(적인 것)에 대한 근대적인 과학으로 나아갔다. 바로 이 두 유형의 과학이 독일 역사학파 경제학과 사회정책학회에 공존하면서 대립, 갈등 및 투쟁은 불가피해졌으며, 이것이 공적인 형태로 표출된 것이 1909년 1914년 두 차례에 걸쳐 벌어진 가치판단 논쟁이다. [222-223] 


그러니까 내가 '근대성' 개념/역사에 우연히 관심을 가졌던 것이 아니라 단지 메이지 때문이 아니라 이것을 알아야만 하는 이유가 있었다. 어느 길을 다시 골라도 여기서 꼭 걸렸으니까. 


Max Weber (1910): 만약 그대가 한 특정한 당위에 대한 관심사에서 진정으로 명료한 이 특정한 가치판단에 따라 행위하기를 원한다면, 그렇다면 그대는, 과학적 경험에 따라 볼 때, 상기한 가치공리에 상응하는 그대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이런저런 수단들을 사용해야 한다. 만약 이 수단들이 그대에게 적합하지 않다면, 그대는 수단들과 목적 사이에서 선택해야 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나는 그에게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다: 그대는, 과학적 경험에 따라 볼 때, 그대의 가치판단을 실현하는 데 불가결한 수단으로 인해 의도하지 않은 다른 부차적 결과들이 초래될 수도 있다는 점을 고려해야 한다 — 그대에게는 이 부차적 결과들도 바람직한 것인가; "그렇다"인가 또는 "아니다"인가? 과학은 그 사람을 이 "그렇다"와 "아니다"의 경계까지 이끌 수 있다 — 왜냐하면 이 경계의 차안에 존재하는 것은 모두 경험적 과학분야가, 또는 논리학이 답을 줄 수 있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 다시 말해 순수한 과학적 문제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그렇다" 또는 "아니다" 자체는 더 이상 그 어떤 과학의 문제가 아니라 양심 또는 주관적 취향의 문제이다 — 어쨌든 그에 대한 답이 다른 정신적 영역에 있는 문제이다. 

-- 김덕영 옮김(2021: 236)


내가 썼는 줄. "가치공리"란 말만 빼고. 나의 시대와 정반대 방향의 흐름 속에서 같은 문제의식을 가졌던 베버. 덤으로 사회학자인 그가 왜 문화 연구를 하게 되었는지 이해하게 되었다. 지금 내가 어릴 때부터 싫어하는 사회학의 방법론 텍스트를 고통스럽게 읽고 있는 이유와 매한가지.      


김덕영: 방법론이란, 연구의 절차나 수단을 기술적으로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그 절차와 수단이 무엇인가를 들여다보는 ‘메타’적인 것 -- 이혜인@경향신문


김덕영: 막스 베버의 '창조적 절충주의' -- 최원형@한겨레 


정독도서관에서 공개 연속 강의하셨을 때 정말 많이 배웠고 복도에서 잠시 뵈었을 때 기억도 강하게 남았다. 면식이 없는 상태였음에도 온전히 100% 제자를 바라보는 눈빛을 받아서. 여태 국내에 chair가 없으시다니, 하여튼 여기 인문계는 만사가 전도되어 있다. 그런데 더이상은 오래갈 수가 없을 텐데.  


Tuesday, February 09, 2016

fact vs. value

이상화 (2015) 중국의 과학과 형이상학 논쟁

5 · 4시기의 대표적 구호는 '과학'과 '민주'라고 할 수 있다. 특히 과학은 민주의 근저를 이루고 있는 방법, 철학, 또는 세계관의 문제로 제기되었으며, 중체서용(中體西用) 논의와 그 비판, 근대적 학제 등을 통해 중국사회 내에서 새로운 보편 가치를 형성하고 있는 듯했다. 그러나 과학은 그 속성상 사실(is)의 학문이었고, 당시 중국 지식인에게 무엇을 해야 하는가(ought to)에 대해 구체적으로 지시할 수 없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과학은 삶에 대한 가치(ought to)를 만들 수 없다고 선언한 것이 장쥔마이의 「인생관」이었으며, 이것이 ‘과학과 형이상학 논쟁’의 시작이었다. (p. 5-6) 이 논쟁은 실제로 새로운 가치관의 모색이라는 시대적 과제를 수행하고 있었다. 가치는 주관적이므로 객관적인 과학의 대상이 아니라는 장쥔마이에 대해, 과학파 딩원장이 가치도 객관적인 과학의 대상이라는 반론을 제기하고, / 장쥔마이가 여기에 재반론을 발표하면서 ‘과학-형이상학 논쟁’은 본격화된다. (p. 6-7)
이 책에서는 / ‘과학과 형이상학 논쟁’ 자체에 담겨 있는 과학과 사회, 인식, 감정, 자유의지, 인과율 등에 대하여 가치와 사실의 문제를 중심으로 분석하고, 유물사관이 당시 중국에서 서로 경쟁하던 여러 이론 가운데 어떻게 대다수 중국 청년 지식인들에게 결정적으로 어필할 수 있었는지를 밝히려 한다. (p. 11)
> 주요 주제
1) 유물사관 이론이 형이상학파 이론이나 과학파 이론에 비해 이론적 · 시대적 과제에 대한 해답을 제시하고 있는지
2) 유물사관 이론이 다른 이론들과 비교하여 논리적 일관성과 타당성을 가지고 있었는지
3) 유물사관 이론이 중국이라는 특수한 사회 안에서 객관적으로 어떤 특징을 지니고 있었는지


도대체 아무 것도 하기 싫고 살기 싫고, 그렇다고 뭐 하자는 짓인지... 아직 안 읽어 봤지만 저자의 결론은 마음에 안 들고. (지금 이 땅에서 이런 책, 게다가 내가 읽어도 읽히게, 쓰신 것만으로도 훌륭하지만! 논쟁참여적(?) 입장에서 재미있는 결론이라고 할 수는 없다는. 이미 역사적으로 승리한 입장에 대한 이론적 정당화라면.) 재작년의 화두였던 '이론과 방법', 작년의 화두였던 '역사성과 타당성'에 이어 올해의 화두가 '형식과 가치'가 된 것 같지만. (당연히 해소된 건 하나도 없고. 어째 꼭 해마다 하나씩 느네.) 난 아무래도 학문할 체질이 아닌 것 같다. 공부는 이렇게 그냥 취미로 해도 되니까. 자고로 취미가 가장 순수한 거야... 이젠 뭐 먹고 살지 찾아봐야.

그런데 Putnam은 대체 뭐하자는 걸까? 제목도 딱이고, 2000년 강연의 2002년 출판물이란 걸 확인하고서 엄청 확신을 가지고 펼쳤건만 첫 페이지부터 혼돈의 도가니탕. 이 분 유명하신 거 아니었음? 내가 이름 알 정도면. 정말 이 분 왜 이러삼. 퍼트넘이 아니라 퓌뜨낭인 건가? 이중 스파이인가? 지금으로선 도무지 건널 수 없는 강이라고 알고 있는 강 양안을 마구 넘나드는 인물인 건가?

어쩐지, 그럼 그렇지, 바로 해결될 것 같았으면 화두의 냄새가 났었겠어? orz


방금 알고 보니, 전통 있는 주제였다. (생각해 보니 당연하다.)
https://en.wikipedia.org/wiki/Fact-value_distinction
(-> 현재의 논의에 대해선 부실하네... 분석철학 계열에선 책이 홍수처럼 쏟아져 나오고 있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