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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uesday, September 14, 2021

Peter Janich (1994) Die konstruktive Wissenschaftstheorie 구성주의 과학철학

이기흥(2004) : 인간의 기술적(技術的) 활동들이 과학의 방법적 근간이 된다는 주장을 통해 과학은 인간의 활동과 떼어놓을 수 없다는 테제를 내세우는 방법적 구성주의는 반객관주의 혹은 반실증주의를 추구하는 현상학과 해석학 혹은 생철학 전통(그리고 더 나아가 실존주의 전통)에 가까이 서 있는 것으로 보인다. 사실 현상학이나 해석학적 입장들은 공히 (위에서 기술한) 실증주의 경향의 과학철학들에 반대해 과학 문제의 해명에서 인간 주체를 배제해서는 안 된다는 입장을 고수한다. 그러는 가운데 그들은 모든 이론적 견해들이나 지식 구성의 시원(始原)을 의식 현상이나 문화 혹은 삶 현상에서 찾고자 할 뿐 아니라 이 영역들은 그 자체로 또한 그들의 철학적 이론화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논리실증주의에서의 감각 기관에 의해 포착되는 관찰 명제도 실은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는 사항이기도 하다. 하지만 논리실증주의자들은 이를 단순히 일종의 자연 과정으로 치부한다. 다른 한편, 해석학에서 말하는 전이해의 영역은 위에서 포퍼의 비판적 합리주의 및 그 이후의 과학철학적 발전들과 관계해 논해졌던 이론 의존적 관찰 혹은 패러다임 내지 연구 프로그램 혹은 과학 연구 전통 개념들과 비교될 수도 있을 것이다.) 현상학과 해석학의 이러한 입장은 분명 방법적 구성주의자들의 논의 맥락과 상통하는 부분이 있다. 하지만 이러한 철학적 입장들은 자신들이 이론화하겠다는 연구 영역을 종종, 방법적 구성주의와는 달리, 그 자체로 연구하는 경향을 보이기도 했으며, 그리고 그러한 작업들이 과학의 근원을 연구하는 이론이라 손치더라도 그들의 작업이 갖는 과학과의 관계는 내적 성격의 것이라기보다는 외적 성격의 것이었다. 사실 그들의 "과학철학적" 작업은 실제의 과학 이론들이 어떻게 해서 성공적 이론이 될 수 있었는지에 대해서는 그 어떤 유효한 설명을 제공하지도 않으며 또한 그 부분에 대한 논의는 그들의 논의에서 찾아보기 힘들다. 그 이유는 종종 그들 내부의 문제에서 기인하기도 한다. 왜냐하면, 과학에 근거를 마련해주는 작업은 고사하고 그 철학들 스스로의 토대 자체가 종종 의심되기도 해 그들은 이 일에 몰두해야 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예를 들어, 후설이 선험적 주체와 생활 세계 사이를 오가며 고민한 흔적은 이에 대한 징표이기도 하다. 그리고 하이데거는 후설과는 다른 철학적 토대를 찾아나서지 않았던가? 그러나 실증주의자들 또한 실존주의가 말하는 세계의 근본 현상들이 다시 어떻게 유효한 방식으로 근거지워질 수 있겠는가 하고 반문하기도 한다. 해석학의 경우 자기 근거의 문제는 "해석학적 순환"이란 테제를 통해 공공연히 피하게 되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해석학의 해석학적 순환론 자체는, 마치 상대주의자들의 주장이 그 주장 자체의 상대화를 함의하지 말아야 하는 것처럼, 해석학적 순환 고리로부터 떨어져 있을 경우에나 그 타당성을 갖는 것으로 보인다. 사실 해석학적 이론들은 인간의 이해 혹은 해석 과정에 대한 하나의 객관적 이론이고자 한다. 그렇다고 한다면 그러한 해석학적 진술들에서 주장되고 있는 사실들 자체는 자기 근거를 갖는 것인가? 이러한 종류의 시원적 근거 추적 시도들과 연관해 한스 알베르트가 주장하는 테제는, 하나의 주장을 다른 주장을 통해 최종적으로 근거지우려는 시도들은 모두 실패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사실, "주장적" 성격의 언술들을 근거짓는 작업과 관련해서는 이 테제는 타당한 것으로 보인다. 이는 철학 자체에도 해당된다. 철학이 이렇게 자기 집안 단속도 제대로 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철학은 과학에 과연 토대를 제공할 수 있단 말인가? 요약하자면, 과학 토대화 작업과 관련해, 현상학이나 해석학에서의 작업들은 과학과 아주 느슨한 관계를 맺을 수밖에 없는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방법적 구성주의는, 상황이 이러한데도, 여전히 과학을 토대화하겠다는 프로그램을 갖는다. 가능한 일인가? 그러나 독자들이 알아두어야 할 사항 하나는, 방법적 구성주의의 경우 과학 토대화 개념은 현상학 및 해석학의 그것과 서로 다르다는 사실이다. 이 철학 사상은 과학과의 관계에서 그리고 자기 자신과의 관계에서 위와 같은 류의 절대적 자기 토대화를 시도하지 않는다. 그것은 오히려 방법적 토대화다. 이러한 류의 토대화는 (마치 빵을 구워내기 위해서는 제빵 과정을 수행하면 되는 것처럼) 목적 수행을 위한 수단이 강구됨으로써 그 임무가 완수되는 것으로 이해된다. 예를 들어 과학이 추구하는 (철학적 시각에서의) 목적이 완수될 수 있는 수단들이 과학철학적 재구성 작업에 의해 강구될 수 있으면, 과학의 (철학적) 토대화 작업은 완수될 수 있다. [...] 방법적 구성주의는 이렇게 토대화 개념을 사실 관계에서가 아니라 목적과 수단 관계, 즉 방법적 시각에서 이해한다. 이는 방법적 구성주의가 현상학이나 해석학적 전통의 과학철학과 갖는 작지 않은 차이점이다(방법적 구성주의자들에게 방법론적 시각은 존재론적 혹은 사실론적 시각과 서로 대조된다). [290-293]


그러니까 뒤프렌을 처음 열었을 때 5장부터 확인한 것은 (한국의 고졸자로서) 당연한 일이었다. 근거를 제시하지 못하는 이론으로 (한국의 고졸 이상 학력자인) 사람들을 설득하는 것은 불가능한데, 현상학에 대한 나의 막연한 이미지에 따르면 그 점이 의심스러웠다. 하지만 니체와 하이데거 이후 근거짓기나 합리성의 타당성 개념 자체를 도마 위에 올렸다가 쓰레기통에 버린 학자들이라면 내가 습득하지 못한 다른 설명 방법이나 대안적 노선을 가지고 있으리라는 기대를 가졌던 것도 사실이다. 들뢰즈와 가타리의 리좀 등등. 하지만 이쪽으로는 등록금만으로 해결이 안 되는 현실에 아무리 발품을 팔아도 결국 아무런 훈련을 받지 못했다. (교양 강의나 독서는 훈련이 아니다. 경기 비디오 관람만으로 운동선수가 되는 훈련이 이루어지지 않듯이.) 스타들의 후광과 귀국자들의 영광뿐. 있다 해도 그림의 떡인 셈.     


방법적 구성주의의 입장은 반객관주의, 반(절대적)토대주의, 반사실관계적 시각 혹은 반인지주의적 시각들이다. 반면, 방법적 구성주의 철학은 영 · 미 철학 전통의 간주관성 혹은 초주관적 테스트 가능성을 강조하는 반형이상학적 입장을 공유하며, 현상학 혹은 해석학적 전통의 실천성 테제 혹은 문화주의적 시각을 공유하며, 또한 구성주의와 같이 인식 성취에서의 인간의 능동성에 시선을 준다. 그리고 이 모든 입장을 끌어안는 핵심 테제는 행위론적 시각 및 방법론적 시각이다. 이와 함께 방법적 구성주의는 또 합리주의적 입장도 취한다(게다가 방법적 구성주의에서는 지식의 초주관성이 강조되고 있다). 방법적 구성주의의 이러한 입장들은 현대 철학에서 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사상 중의 하나인 포스트모더니즘적 사고와 적절한 우호 및 긴장 관계를 이룬다. [...] 방법적 구성주의는 인간의 본질에 대해 논하지도 않으며 또한 인간의 본질이 이성이라고 하지도 않는다. 인간은 이성적일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그것은 인간의 노력 여하에 달린 문제다. 이 모든 것은 인간이 자연 존재가 아니라 행위하는 존재이기에 가능한 얘기들이다. 즉, 인간이 이미 어떤 본질을 가지고 있어 이러저러한 방식으로 행위를 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은 행위를 통해 그들 스스로를 규정한다는 것이 방법적 구성주의의 입장이다. 그리고 행위를 제한하는 요소들 또한 다양할 수 있다. 인간들은 완벽한 조건이 갖추어진 인큐베이터에서 자라나는 존재가 아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러한 인간 환경들은 (항상은 아니지만) 때때로 인간들 스스로에 의해 통제 혹은 구성되기도 한다. 이는 인간 행위들이 인간의 본질과 인간의 환경 요소의 그 어느 중간에 위치하고 있음을 말한다. 즉, 방법적 구성주의는 모더니즘 주체 철학과 포스트모더니즘의 반주체 철학의 중간에 위치한다. 다른 한편, 방법적 구성주의는 조건적 진리관을 견지한다. 이는 다음과 같은 의미에서다: 어떤 목적이 주어지고 그에 대한 수단이 강구될 때, 이 수단들의 적절성 혹은 옳고 그름은 언제라도 결정될 수 있다. 그리고 경우에 따라서는 하나의 목적에 다수의 수단들이 동일한 기능을 발휘할 수도 있고, 하나의 수단이 경우에 따라서는 서로 다른 목적들에 기여할 수도 있다. 게다가 이때의 수단들이 보여주는 기능 자체는 개인적 차원에서만이 아니라 간주관적 혹은 초주관적으로 검증되고 또한 인정될 수 있다. 이러한 진리관은 주장과 사고 및 견해들의 수렴과 분산을 적절한 수준에서 조정해준다. 달리 말해, 위와 같은 조건적 진리관 하에서는, 한편으로는 합리성, 이성, 보편성 개념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는 (사상 내지 문화의) 상대성 혹은 다양성은 서로 배제하는 것이 아니라 적절한 수준에서 서로 조화될 수 있다. 이러한 의미에서 방법적 구성주의는 다시 모더니즘의 진리 절대주의와 포스트모더니즘의 진리 상대주의 사이에 위치한다. [293-295]   


그러니까 학부 때 교양 수업에서 처음 제대로 접한 매클루언은 곧바로 타도의 대상이 되었다. 역사 유물론에 대한 생리적 반감의 2차적 양상이었달까. 그런 그가 한국에서 1990년대에 베스트셀러였던 현실은 정권의 IT 산업정책과 무관하지 않았다. (4차산업 시대라는 지금은 대입 논술고사 대비 고교생들의 필독서가 되었고.) 어쩌면 그가 아니었다면 인문계로 넘어올 필요까지는 느끼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북해의 소용돌이라니, 차라리 외계인 지구 대침공이라고 하지 그래. 인간의 행위와 우리의 선택에 다른 이름들을 붙이고 싶어하는 저의가 학계라는 프로페셔널 시장에서 파이를 점유하기 위한 경쟁력 전략인 것은 차라리 괜찮다. 자기 인생이니까. '적'을 과장해야 자신의 힘과 값이 올라간다는 세속의 인심을 아는 데 별다른 지성이 필요하지 않다. 그 '적'의 정체와 전략이 또한 모호하고 전면적이어야 조직적 해결 절차가 진행되는 걸 원천적으로 방해할 수가 있겠고. 그렇게 부정하는 데 성공한 책임과 회피하는 데 성공한 고통은 어떤 다른 사람이 맡으라는 말인가? 부정하고 회피하는 데 실패하여 '무능력'을 증명한 사람? 소용돌이에 뛰어들 용기와 의지가 부족해서 '생존력'이 낮은 사람? 엘륄도 그 점에서는 다를 바 없어 보인다. 공부할 필요는 있겠지만.  


방법철학은 이렇게 딩글러의지주의, 로렌첸의 행위주의 그리고 야니히에 와서는 문화주의로 변모해나가고 있는 중이다. 이 번역서는 그[페터 야니히]가 방법적 구성주의 철학의 행위론적 시각을 이어받아 그것을 문화주의적 시각을 가미해 각색하기 시작했던 시기의 저작이다. [296]


잘만 쓰면 취지에 딱인 것 같기도 한데 판단이 안 되네. 페이퍼는 커녕 이 입문서조차 숙독할 시간이 없는 현실로서는 일단 보류. 이 상태로 보고하면 보고하는 시점이 늦었다고 벼락 먼저 떨어지던 과거는 그저 그리움의 대상으로. (난 더이상 단기에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남아 있지 않았을 때 바로가 아니라 그런 상태에서도 어떻게든 온갖 불필요하거나 무리수인 난리를 다 쳐 본 다음에야 여쭈었기 때문에 적절 시점에 비해 결과적으로 두세 배의 시간이 낭비된 다음이 되곤 했다. 과유불급. 이 감은 참 늦게 생겼기에 괜한 고생을 많이 했는데, 여기서는 뭐 이러나저러나 쓸모가 없다.)


Peter Janich (1994): 게다가 학문을 대상으로 하는 메타론적 판단 문제에서는 문외한들도(각각의 과학자들 또한 자신의 학문 분야 이외의 다른 모든 학문 분야에서는 역시 문외한일 것이다), 그들이 과학의 결과들에 의해 일정 방식으로 영향을 받자마자, "과학의 영향권에 든 사람은 과학에 대해 언급할 자격이 있다"는 식의 신념을 가지고는, 자신도 과학 이론들에 대한 나름의 판단 능력이 있을 거라 생각하는 경향을 종종 보인다. 과학에 대한 이러한 식의 사고방식은 마치 누군가가 한 번 의학이나 심리학이 실천되고 있는 병원 같은 기관의 환자나 고객이 되고난 후 이러한 과학적 의학이나 심리학에 대해 자기 자신도 나름의 판단을 내릴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과 유사하다. 다시 말해, 위와 같은 사고를 가진 사람들은 유기화학, 인류사, 뇌의 신진 대사 혹은 천체 사건 등과 같은 특수한 과학적 물음들은, 일반적으로 그렇게 이해되고 있듯이, 당연히 특수 전문 지식을 통해 설명되어야 하는 것으로 보는 반면, (과학 바깥에서 제기되는 주제인) 과학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를 두고 벌어지는 담론에는, 마치 어느 누구라도 그러한 문제에 관한 한 거기서 요구되는 능력들을 충분히 갖추고 있기라도 한 것처럼, 자기 나름의 생각을 가지고 같이 끼여 논쟁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일상 삶에서의 아주 간단한 경험이 이 같은 사고 방식에 대해 경종을 울리고 있다: 우리 삶에는, 한편으로는 그림을 그리고 소나타를 작곡하고 기계를 제작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그림에 대해, 작곡에 대해, 기계 제작에 대해 하나의 이론이나 과학을 발전시키는 인간의 능력들이 있다는 사실에 어느 누구도 이의를 달지 않을 것이다. 우리가 이렇게 과학 활동을 몸소 직접 행하는 것과 과학에 대해 논하는 일이 전적으로 서로 다른 과제라는 사실을 알게 되면, 우리는 즉시 한편으로는 과학 연구 때 사용되는 언어와 다른 한편으로는 과학에 대해 논의할 때 사용되는 언어가 서로 다른 언어들이라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15-16] 

"생활 세계적"이라는 개념은, 여기서 우리가 이 개념에 대한 다른 철학적 의미, 예를 들어 그것에 대한 현상학적 의미는 도외시하고 논하자면, 삶을 헤쳐나가는 실천(Praxen der Lebensbewältigung)과 연계되어 사용되는 개념으로, 이는 다시 기존하는 인간의 실천 영역들은 삶에서 일반적으로 제기되는 인간의 욕구들을 해결해주고 있음을 말한다. 다른 말로 표현해, 생활 세계적 실천이란 우연히 출현하는 인간의 사치 현상이 아니라 오히려 삶의 조건과 삶의 요구 조건 하에서, 즉 빠듯한 생필품과 인간의 여러 요구 조건들 하에 나타나 실천되는 그러한 인간 행위 영역을 말한다. [38]    

-- 이기흥 옮김(2004) 


(영미의) "과학철학에서의 구성주의" 영어 위키와 본서의 "방법적 구성주의"를 차별되는 (독일의) "철학적(급진적) 구성주의"와 함께 하위의 일파인 "에어랑엔 학파"로 다루고 있는 독일어 위키의 내용이 많이 다르다. 역사적 전개만 다르고 뿌리는 같다고 봐도 되는 것인지 아니면 배경만 통하고 다른 내용인지 모르겠네. (한국미학회에서 "구축주의"로 합의한 예술에서의 constructivism과는 별개.) 이래저래 어설픈 상황이라 놀이터에 스크랩. 

주인이 주인 노릇 좀 하게 하려고 그 손에 고삐를 단단히 쥐어 주려고, 먼저 그럴 힘을 갖고자 십 년을 바쳤는데 어차피 위험한 선택이었으니까 결과적으로 실패해도 어쩔 수 없지만 마땅히 거쳐야 할 과정들은 유실된 채로 이처럼 소모적인 비효율로 하루하루가 날아가다니. 뭔가 쌓기는 커녕 그 혹독한 훈련으로 만든 근육들이 많이도 허물어졌다. 여기서는 교육이 엄격하다고 하면 전문성 없이 ad hominem이나 하거나 기껏해야 호사스럽게 (실은 학생의 연구 능력 성장을 저해하는) micro-managing을 받는 건 줄로나 착각들 한다. 이제 오래 못 갈 텐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