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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ednesday, May 15, 2024

Vers Francis Ponge (1965)

Vers Francis Ponge (1965)
Un documentaire de Guy Casaril diffusé le 29 mars 1966 sur la 2ème chaîne.


cf. metapoetry 메타시 

cp. https://en.wikipedia.org/wiki/Metaphysical_poets





Francis PONGE – Un siècle d'écrivains : 1899-1988 
Émission « Un siècle d'écrivains », numéro 203, diffusée sur France 3, le 25 septembre 1999, et réalisée par Jean Thibaudeau et Pierre Beuchot. 






Réflexions sur la Poésie 
: Philosophie de la poésie, poétique et méta-poésie, selon des approches historiques ou thématiques.


#7. L’IMPORTANCE de la Poésie selon BRETON, PONGE & REVERDY (Chaîne Nationale, 1952) 

Une intervention des trois poètes, interrogés par André Parinaud, le 19 octobre 1952 sur la Chaîne Nationale dans l’émission « Rencontres et témoignages ».

https://fr.tipeee.com/arthuryasmine 


🐎 소 아니고 말 띠. 

Wednesday, July 20, 2022

노회찬의 말과 글 Roh Hoe-chan's Words

노회찬 의원 서거 4주기 추모 토론회: '지금 다시, 노회찬의 말과 글' 
2022-07-20 국회의원회관 제1소회의실


1부 주제 강연: 수사학자가 본 노회찬의 말과 글 

[15:50] 김헌(서울대학교 인문학연구원) 고전 수사학에 비춰 본 노회찬의 말

[31:36] 안성재(인천대학교 교육대학원) 기버(Giver)의 전언(傳言) : 노자와 공자 그리고 노회찬의 수사(修辭) - 

[53:50] 하병학(가톨릭대학교 학부대학) 현대 수사학으로 소환하는 노회찬의 말하기

[1:32:10] 2부: 우리시대 정치인의 말과 글


Sunday, August 29, 2021

Stephen Toulmin (1958) The Uses of Argument

Stephen Toulmin (1958/2003): 실질적 논변은 자료와 지지작용으로부터 결론으로 이행할 때 빈번하게 유형전환을 행한다. 다시 말하면 이는 바로 우리가 실질적 논변의 각각의 영역을 그 자체에 관련된 기준에 의해 판단해야 함을 의미한다. 인식론에서 근본적인 오류는 이런 유형의 비약을 논리적인 심연으로 취급하는 것이다. 모든 지식 주장이 분석적으로 정당화되어야 한다는 요구와 그렇게 정당화될 수 없는 모든 것들에 대한 거부는 이런 오류가 도달하는 첫 번째 유혹이다. 다음 단계는 상황을 치유하겠다는 희망을 갖고서, 선험론과 현상론을 거쳐서 회의론이나 혹은 실용주의로 이르는 지루한 열차에 몸을 싣는 것이다. 논변에 있어서 실질적인 단계가 논리적 심연을 나타낸다는 생각을 버리자. 그러면 논리학과 지식론 모두는 좀 더 생산적인 문제들을 다룰 수 있을 것이다. [362]   

-- 고현범/임건태 옮김(2006) 


최초의 지점으로 되돌아옴. 급기야 이럴 것 같은 강력한 느낌에 시달리지 않은 적이 없건만, 선험론, 현상론, 회의론, 실용주의란 네 협곡을 한두 번도 아니고 몇 번인지 세는 것도 진즉 잊고 갈팡질팡하는 것도 모자라, 상위의 입증론과 과학적 설명의 문제, 하위의별도의 측정과 계산가능성의 문제 들에 제대로 돌진했다기보다 접근가능한 자료 수색만 하면서 일 년을 보냈다고 여쭐 수는 없을 것 같은데, 이 문장으로 지난 일 년이 거의 잘 요약되는 이 사태를 어쩌람? 마치 나에 대한 조서를 보는 듯, 무척 잘 쓰였구먼.   

+

Stephen Toulmin: '인간 오성의 본성'에 관한 물음들은 많은 경우 심리학으로 가장한 논리학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논리학에서의 혼동은 너무 쉽게 지식론에 있어서의 잘못된 개념으로도 이어졌다. 이런 식으로 논점을 벗어난 경우에도 — 즉 실질적 논변들에 있어서도 — 분석성에 도달하려는 욕망은 회의론으로 이어지거나 회의론에 대한 공포 때문에 마찬가지로 과격하게 실제 행동을 중단해 버리는 것으로 이어졌다. 그런 논리학적인 시초의 혼동을 제거할 때만 인식론에 적합한 길은 회의론을 껴안거나 회피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야심을 조절하는 것이란 점이 분명해진다. 즉 어떤 분야에서건 논변과 지식론이 분석적 기준들에 따를 것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좀 더 현실적으로 해당 분야에서 적합하게 요구될 수 있는 그 어떤 종류의 설득력이나 훌륭한 근거를 갖추기를 요구하는 것이다. 

형식논리학에서 분석적 이상은 자신의 매력을 수학의 명성으로부터 빌려왔던 것 같다. 고대 아테네와 과학 혁명의 시기 모두 철학사는 수학사와 긴밀히 연관되었다. 그래서 그런 결과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명문 기하학 학교의 창립자이자 선생인 플라톤이 모든 학문의 가치 있는 이상을 기하학적 증명에서 발견했다는 사실에 놀랄 필요는 없다. 근대 물리학 발전에 막대한 영향을 미쳤던 '데카르트 기하학'의 창시자인 데카르트가 자연과학과 신학의 모든 근본적인 진리를 유사기하학적인 방법으로 세우려는 생각에 매료되었다는 사실 역시 마찬가지이다. 이런 식으로 우리는 근대미분법의 발명자인 라이프니츠가 어떻게 철학을 수학처럼 '실재적이고 증명할 수 있는' 것으로 만들려는 전망에 환호했는지를 이해할 수 있다.  

다시 말하지만 이런 것들에 놀랄 필요가 없다. 하지만 이런 사실이 우리가 그와 동일한 이상에 의해서 이끌려져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사실 우리는 그보다 그런 이상을 경계해야 하며, 어느 지점에서 그 이상의 영향이 해로운지를 재빨리 알아채야 한다. 물론 일반적으로 보아서 이런 생각이 독창적인 것은 아니다. 하지만 분석적 이상을 포기하는 것의 일련의 결과들이 명백해지려고 한다면, 모든 필연적인 논리적 구별들을 분명하고도 확고하게 명심해야만 한다. [383-384] 

우리의 인식론적 문제들의 상세한 원천에 대한 조명은 오직 좀 더 복합적이고, 영역 의존적인 논리적 범주들의 체계를 구축할 때만이 가능하다. 예를 들어 데카르트 이래로 그가 제기한 감각의 오류 가능성에 관한 문제들은 철학자들을 괴롭혔다. 특히 우리의 모든 감각 경험이 교활한 악마에 의해서 감쪽같이 조작될 수 있으며, 우리를 둘러싼 대상들의 존재와 성질에 관한 기만적인 믿음들을 계속 고수하도록 설정되었을 가능성 — 물론 논리적 가능성이지만 — 이 그러하다. 

처음 봐서는 어떤 문제도 그보다 더 우리의 자존심이나 진정한 지식 주장에 심각하게 도전하지는 못할 것 같다. 하지만 사물들이 보이는 방식으로부터 존재방식으로 진행되는 논변들이 여기서 문제를 만들어 내는 바로 그 분석적 타당성을 이상적으로 성취할 수 있다는 것은 헛된 기대에 불과하다. 데카르트가 주의를 기울인 모든 것은 '논리적 가능성'이며, 이런 '논리적 가능성'(즉 자기모순의 부재)은 사태의 필연적 특성이다. 다른 한편 우리가 실제 논변에서 요구하는 것은 그에 대한 추정들이 실질적 목적에 비추어 반박할 수 없을 만큼 강력한 결론들이다. [384-385]  

플라톤처럼 데카르트에서도 분석적 이상의 기하학적 연결들은 아주 분명하다. 실질적 논변들이 — 모든 종류의 유형의 비약에 대한 의혹을 포함해서 — '논리적 심연'을 포함하고 있다는 생각은 순수수학을 위해 만들어진 척도에 비추어서 그 논변들을 측정할 때 초래되는 자연스런 결과이다. 하지만 유형의 비약과 영역의 차이들은 우리가 안고 시작할 수밖에 없는 것이며, 우리는 절대로 그것들을 없앨 수는 없다. 다시 말하면 결론과 그것을 지탱하는 정보 사이의 유형의 전이는 심연이나 결함이 아니라, 논변의 영역에 특징적인 성질이다. 실질적 논변들에는 필연적 함축이 결여되어 있다는 것, 그것들이 분석적 기준에 따르지 않는다는 사실은 유감스럽거나 변명이 필요한 것 혹은 심판하거나 변화시켜야 할 것이 아니다. 

실용적인 견지에서 분석적인 보증들이 그러한 경우들에 요구되어지는 것은 과도하다고 말할 필요조차 없다. 정당한 이유가 작동한다는 확신이 우리가 합리적으로 요구할 수 있는 모든 것이라거나 필연적 함축을 논외로 하고 이것을 수용해야 한다는 확신도 마찬가지이다. 비록 그런 말이 (우리가 지금까지 도달한 입장과 완전히 다르다고 할 수는 없고) 겸손하게 들릴지는 모르겠지만, 이런 관점조차 오해를 유발한다. 왜냐하면 지금은 '논외로 하고'와 같은 말을 쓸 장소가 아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그 말들에는 상황이 보증하지 않는 함축된 변명이 있다. 

하나의 이미지를 떠올리면서 이 논의를 마치는 것이 유익할 것 같다. '논리적 심연'이라는 말에 간직된 경쟁적 이미지가 야기하는 효과를 무마시킬 만한 이미지 말이다. 우리에겐 그런 말처럼 혼란스런 연상을 가져오지 않는 유형 전환의 추론을 그려내는 길이 필요하다. 다양한 가능성들이 제기된다. 즉 하나의 논리 유형을 가진 정보로부터 다른 유형의 결론에로의 이행은 '심연'을 건너는 걸음이라기보다는 '수위'의 변화나, '방향'의 변화, 또는 태도의 변화로 간주될 수는 없는가? 아마도 이 마지막 비유가 가장 도움이 될 것이다. 왜냐하면 태도의 변화라는 것은 적합한 기준으로 판단할 때 시기적으로 부적절하거나, 성급하거나, 시기상조일 수 있거나 그렇지 않다면, 적절하거나, 정당하거나, 시기적절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사실 태도가 — 미세하게 구별되는 신호나 동작은 차치하고 — 명확하게 언어적인 것이 되는 지점이 있다. 그래서 두 개의 발화들 간의 논리 유형의 차이는 — 바로 이런 식으로 확장된 의미에서 — 두 유형의 의사소통적 태도 간의 차이이다. 

운전자는 전방도로에 차가 없는 것을 보고서, 뒤차에 추월신호를 보낼 수 있다. 도로가 비었다는 것을 보는 것은 이런 식으로 신호를 보내는 하나의 이유를 제공한다. 다시 말하면 전자는 후자를 정당화한다. 하지만 비록 보는 것과 신호하는 것이 별개의 것이라 해도, 보는 것과 그렇게 하는 것 간에 '심연'은 없다. 다만 차이가 존재할 뿐이다. 신호하는 것을 정당화하기 위해서 우리는 다만 전방 도로 상태를 지적하기만 하면 된다. 여기에서 우리는 시각과 행위 간의 간격을 메워줄 더 나아간 원칙들을 제공할 필요가 없다. 이제 실질적인 물음은 '신호하기 자체가 보는 것에 필적할 수 있는가, 또는 보는 것이 신호하기에 필적하는가?'가 아니라 '어떤 경우에 보는 것이 신호하기와 같은 (전적으로 구별되는) 활동을 정당화하는가?'이다. [385-387] 

-- 고현범/임건태 옮김(2006)  


툴민으로부터 배운 건 전혀 아니었지만, 그에겐 지적의 대상이었던 것이 나에겐 폭력의 두 원천으로 여겨졌고, 그의 결론이 나에겐 신조로 이미 구축되어 있었다. 구별하지 못했던 고통들도 아니었고, 인식하지 못했던 목표들도 아니었다. 일단은, 이라며 비켜 가려 했던 마음의 수법에 자꾸만 발목을 잡혔는지, 아니면, 사안의 내부 관계적 순서와 진행의 실천 절차를 달리하지 못하는 우둔함인지 모르겠네. 현실적으로 후자에 무게가... 執迷. 

전략에 허점과 기복이 있을 수 있다. 전술을 철회해야만 할 수 있다. 전투에서 패배할 수 있다. 총알에 불량품이 있을 수도 있으면 안 된다. 자기가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는 글이 있다. 그 말이 알차고 훌륭해서 이해하려고 노력할 가치가 충분하더라도. 


Thursday, January 28, 2021

윤희연 Yoon, Hee-Yeon (2020) 감정, 이미지, 수사로 읽는 클래식 (Guide for Listeners) - 1. Emotion

윤희연 (2020) 감정, 이미지, 수사로 읽는 클래식: 듣는 사람을 위한 가이드  

1. 감정으로 읽기 

1.1 슬픔 - 인용 음악 듣기

눈물음형: 눈물방울이 떨어지는 모습을 악보에 그리듯 음표가 차례로 한 음씩 내려가는 음형 (18쪽)

후렴구


탄식저음(Lament Bass): 눈물음형이 특별히 베이스(Bass) 성부에 나타나는 것 (19쪽) 


고집저음(ostinato bass): 이탈리아어로 지속, 반복을 뜻하는 오스티나토(ostinato)로부터 특정 베이스 진행이 끊임없이 반복되는 것 (20쪽)


나폴리/네아폴리탄 6화음(N6): 17세기 이탈리아, 특히 나폴리 비극에 자주 쓰이던 음악 이디엄 (23쪽) 


반감 7화음: 19세기 낭만시대 음악가들이 애절한 감정을 표현할 때 사용한 비련의 화음 (25쪽) 

4악장 첫 부분


"미칠 듯 사랑했던 기억이"


"검은 산을 넘으면 너는 날 안아주겠지"


템포 아다지오(Adagio): "느린 템포는 그 자체로 슬픔의 본성과 가장 맞닿아 있는 음악 언어다." (27쪽) 

 

1.2  유희와 광기 - 인용 음악 듣기

스케르초 풍으로(scherzando): 이탈리아어로 해학, 농담을 뜻하는 스케르초(scherzo)로부터 농담, 장난, 판타지, 춤, 묘기 등의 유희적 연주 표현을 지시하는 말 (33, 37쪽) 


"청중의 예상을 비껴가며 웃음을 유발하는 유머가 있다." (38쪽) "주제에 대한 상투적인 전개, 음악의 균형과 조화의 부족을 흉내 낸 부분은 클래식 음악에서 '소나타란 이런 것', '클래식은 이런 것'이라는 어법에 익숙한 청중에게 통하는 유머 코드인데, 고전시대 기악음악에서 주제 발전이 일반적으로 어떻게 이뤄지는지에 대한 경험이 별로 없는 청중이라면 잘 알아듣지 못할 수 있는 음악적 유머이기도 하다." (40-41쪽) 

"(말러가) 자신의 가곡 <물고기들에게 설교하는 파도바의 성 안토니오>를 인용했을 때, 여기에는 비평가와 청중들에게 '왜 나의 예술적 시도를 알아주지 않나?'하는 서운함과 냉소가 깃들어 있었다." (41-42쪽)  


과도한 반복: "만약 변화 없는 반복이 과잉으로 나타난다면 이것은 음악에 있어 의도된 '광기'의 표현일 수 있다." (44쪽) 

기교적 과잉: "작곡가들이 이처럼 유독 정신이 온전히 못하거나 사회적 윤리를 무시하는 악인 캐릭터에 기교적으로 가장 훌륭한 테크닉을 구사하도록 했다는 사실은 음악에서 화려한 기교는 좋지 못하다는 인식(교회에서 악기 사용이 금지된 이유이기도 했던)이 서양인들의 뇌리에 오래도록 박혀 있었기 때문이다." (48쪽) 


반음의 에토스: "선율에 반음이 많이 들어가면 음악이 더 달콤하고, 자극적이고, 멜랑콜리해진다. 이것은 주관적인 느낌이 아니다." (55쪽) "반음의 과잉은 오페라에서 창녀, 광녀, 호색가의 에로티시즘의 언어이자, 표제음악에서는 주로 악마와 관련된 유희와 광기의 언어로 쓰이게 된다." (59쪽)


1.3 고통과 공포 - 인용 음악 듣기 

포부르동(faux-bourdon): 프랑스어로 '잘못된 반주'라는 의미로, 3도 및 6도 음정을 품은 화음이 연달아 나오는 화음 진행 (62쪽) 

Zoltan Spirandelli (2002) Vaya con Dios 


12음 기법: 쇤베르크가 조성음악의 으뜸음 개념을 배제하기 위해 창안한 것으로 옥타브 내의 열두 음의 조합이나 사용 빈도 등을 철저히 통제하는 기법 (68쪽) 



1.4 열정 - 인용 음악 듣기 

도약 선율: 멀리 떨어진 음으로 과감하게 점프하는 선율 진행(79쪽)에는 '나 꼭 하고 싶은 말 있어요' 하는 열정의 목소리가 들어 있다. (83쪽)  

비화성음(non harmonic tones): 화성음들 옆에 있는 음(이웃음, neighboring tone), 강박에 치고 나오는 음(전타음, appoggiatura), 버티는 음(계류음, suspension), 미리 나온 음(예상음, anticipate tone), 선율이 흘러가는 방향을 이탈하는 음(이탈음, escape tone) 등 (87쪽) 


난 클래시컬에 조예가 얕은데, 어째 설명을 듣고 가장 절실하게 떠오르는 곡들이 다 빠져 있어 너무 아쉽다. 목록을 새로 만들고 싶어...질 때가 아니고! 이렇게 놀고 나니 날이 새 버린 광란의 포스팅. 

Saturday, August 29, 2020

Heinrich F. Plett

따라하면 되는 사람을 찾았다. 하인리히 플렛. 

Heinrich F. Plett (2000) Systematische Rhetorik: Konzepte und Analysen  

원서를 구하지 못했는데, 한글판보다 1년 늦게 출판된 영역본은 구했다. 

그렇지만, 실은 재발견이다. 정확하게는 세 번째랄까. 

석사 과정 때였던 것 같다. 랩실에 늘 그렇듯 혼자 있다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던 기억이 있다. 그때 심장이 오그라들고 팔다리가 긴장했던 감각이 선명 떠오른다. 이 사람한테 가야겠다고. 

그런데 이미 퇴직한 것 같았다. 게다가 연구 논문 목록에서 '수사학'이라니, 심지어 '중세'라니 하여 좌절감에 앞서 의문스러움이 가득해졌던 기억도 난다. 그때가 처음으로 내가 '비교문학 전공자'를 무서워하게 된 계기가 되었다. 이후로 몇 번 되풀이되면서 내게 비교문학은 신화보다 더한 계시록의 인상으로 자리잡았다.     

그때 발견했던 논문이 정확히 무엇이었는지는 모르지만, 나중에 다시 찾아보면 알 수 있을 것 같다. 아무튼 그 처음의 발견을 싹 잊어버린 채 그저 제목의 앞단어에 끌려 국역본을 장바구니에 담아 두고, 뒷단어에 막혀 도대체 지난 몇 년을 보냈었는지, 불과 사흘 전 이 책을 이 시점에서 주문하고 있는 나를 저지해 줄 힘이 좀 어디에 없을까, 했는데... 월경으로 거의 퇴폐적 날들을 보내고 있는 이제야 이 분이 오셨다. 이런 순간 전화했던 그 사람이 지금은 왜 없다. 외로움을 잘 타지 않는 것은 나의 증상일 뿐인데, 내가 어느 만큼 외로웠는지, 그게 이십 년이나 되었음이 어이가 없는지 염치가 없어야 하는지 하는 걸... 더 이상 외롭지 않게 된 순간에야 깨닫게 되었다. 그런데 이 이야기를 하던 사람이 왜 없는지 모른다.   

아무튼 플렛은 자신의 말을 당연히 실천했다. 

Heinrich F. Plett (2012) Enargeia in Classical Antiquity and the Early Modern Age: The Aesthetics of Evidence

나도 따라가면 된다. 드디어. 


그런데 이제 기력이 없는 것 같아. 아빠랑 얘기를 못 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