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uesday, February 01, 2022

Kant vs Husserl by Thévenaz

국역본이 완역이라면 1952년 [신학과 철학]지 원문은 달랐네. 어째 원문이 더 명확하고 체계적인 것 같아 보이나, 까막눈이니.  


Pierre Thévenaz (1966): 이 새로움을 해명하기 위해서는, 초월적 지향성에 있어서의 데카르트적 주제(명증성, 직관, 요컨대 보는 것)와 칸트적 주제(의식에서의 대상 구성, 곧 의식의 구성하거나 창조하는 활동)의 근원적인 상호결합을 이해해야 한다. 비록 후설이 특별히 환원의 일차적인 설명을 함에 있어 칸트적 언어를 사용하고 있기는 하지만(『현상학의 이념』), 우리는 여기에 속으면 안 된다. [43]

칸트처럼, 후설은 대상이 주체에 준거하는 것이고, 인식의 문제가 본질적으로 구성의 문제라고 생각한다. 이것은 (심리학적인 것이 아니라 초월적인) 의식에서 출발하여 우리가 지향적 세계의 구조, 또한 무엇보다도 그 의미의 통일성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라고 보는 입장에 속한다. 하지만 데카르트처럼 후설은 의식 안에서, 단순히 인식의 형식적 요소 및 통일성, 대상의 가능성의 조건을 보는 것이 아니라 구체적으로 주어진 것(경험적인 것이 아닌)에서, 의식(심리적이 아닌)에서 직접적으로 체험된 것을 본다. 또한 대상은 이러한 의식을 통해 구성되지 않으며, 대상은 이 의식의 봄에 그 자신을 주거나 자기 자신을 드러낸다. 여기서 우리는 데카르트적인 직관이라는 주제와 칸트적인 구성이라는 주제를 결합하는 이 스스로 줌이라는 개념 덕분에 그 모든 실재론과 관념론(심리학주의적이거나 주관주의적인)을 대담하게 넘어서게 된다. 우리는 모든 초월론, 특별히 후설이 함축하는 초월론 때문에 이러한 진전을 이룰 수 있었다. 현상학은 우리를 일종의 초월적 봄 내지는 초월적 체험으로 초대한다. 이것은 신칸트주의의 그 모든 구성주의를 뒤로 하고 나온 것으로, 명증으로의 단호한 복귀, 무엇보다도 의식이 의식 자체를 코기토 속에서 파악하게 하는 필증적 명증성으로의 복귀다. [44-45] 

-- 김동규 옮김(2011)  


난 단지 그의 언어에 속았을 뿐이었는데, 잘못 읽었다고 할 수도 없었네. 그의 모든 저작을 읽으려 하지 않았을 뿐. 다만 교수님을 폭발하시게 한 학생이 또 있었을 것 같지가 않았다. 혼자 힘으로 할 수 있는 것만 할 수밖에 다른 길이 없었다.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2011년 이래 5판 째인데... 이나마도 내 미련퉁이 같은 현실무감각 때문에 오늘 2년 만에 답을 찾게 되었네.

사실 설명은 첫 면담 때 폭포수처럼 해 주셨으나 녹음도 못 하게 하시고 도통 따라갈 수가 없었다. 무엇보다 내가 칸트와 구별을 못 했던 건 (지금도 말끔히 하는 것 같지는 않지만) 칸트를 먼저 읽어서 홀렸기 때문이 아니라 (좋아하는 건 맞지만) 서유럽 근대 과학을 주입하는 한국의 초중고를 졸업했기 때문이다. 

이제 순서대로, sense data도 qualia도 아닌 '이미 주어진 것'들 사이의 구별 그리고 희망컨대(?) 결정적으로 뒤프렌의 '아 프리오리'가 남았는데, 이런 그나마의 때늦은 행운이 또 올는지? kairos missed. 기운만 뺀다. 


+

Pierre Thévenaz (1966): 우리는 세계에서 살아가길 멈출 수 없다. 마찬가지로 세계에 대해 반성하는 일 또한 멈출 수 없다. 왜냐하면 반성은 여전히 세계를 지향하는 방식이기 때문이다. 철학은 삶에 겹쳐져 있고, 철학이 우리에게서 분리된다고 상상할 경우에도, 철학은 세계를 [이전과는] 다르게, 보다 강렬하게 살아가게 한다. 그러므로 후설에게 체험된 세계란 이성으로부터 소외당하는 것이 절대 아니다. 단지 이 이성은 너무 자주 잠재적인 것으로 머물러 있고, 나타나기 위해서는 수많은 노력과 다양한 전복을 요구받을 뿐이다. 이것이 바로 철학에 있어 무한한 과업으로 남겨진 세계의 의미와 이성의 의미에 대한 의식에 이르러야 하는 이유이다. 

-- 김동규 옮김(2011: 47)


No comments:

Post a Com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