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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ursday, May 11, 2023

Riley (1964) in C

Jeroen van Veen piano & keyboards
(P) 2015 Brilliant Classics


Terry Riley (1964) In C 


날은 좋고 몸은 안 좋다. 힘들다. 


Sunday, June 12, 2022

Starobinski (1964) l'invention de la liberté, 1700-1789

Jean Starobinski (1964): 18세기 미학이론의 역사만 봐서는 그 시대 예술이 실제로 어땠는지 규정할 수가 없다. 예술에는 이론가가 보지 못한 면이 많았고, 이론에는 예술가가 거추장스럽다고 오해할 만한 요구가 꽤 많았다. 한편에서는 철학자들이, 다른 한편에서는 예술사가들이 사상은 어떻게 전개되었고 작품은 어떻게 만개하게 되었는지 따로 연구했다. 물론 이런 업무 분담이 잘못됐다고 할 수는 없지만, 18세기의 생생한 현실을 이해하고자 하는 우리에게는 불만스러운 상황이다. 우리의 임무는 (예술 따로 사상 따로 해석하는 것이 아니라) 둘이 공유하는 역사적이고 사회적인 기원을 고려하면서, 자유로워지려는 예술과 그런 예술을 이해하고 지도하고 고취하고자 하는 까다로운 성찰이 얼마나 복잡한 관계를 맺고 있는지 알아내는 것이다. 

-- 이충훈 옮김(2018: 17-18)


이뿐만이 아니라서 미학/예술학을 하라고 하시는 건 마치 연인에게 공작을 하라는 명령 같은 걸. 자명고 찢을 리도 없지만 난 좀 뜨거운 편이라 곤란한데. 보통 안 드러나지만.

실천을 "이해하고 지도하고 고취"할 능력이 이론에게 없으니 걱정할 필요는 없다. 이론은 새로운 경험을 줄 수 있을 뿐이다. (난 이런 세계가 더 맘에 드는데.) 그걸 활용할 능력은 양쪽 모두에게 있고.

그러니까 FN 교수님도 JM 교수님도 나에겐 소중한 고객. 

우리 나라의... 그러고 보니 북한은 어떨지 다를 것 같은 기대와 함께 궁금하네. 남한의 작가들과 관객들은 자칭 이론가(대개는 백인분들 말씀 전파자)들의 작태에 이골이 나 있다. 일단 예술 현장에 자신의 몸이 있지 않은 자의 예술론이란 절망을 줄 만한 힘조차 없는 것을. 지금까지 살면서 관찰한 바로는 아무래도 이 나라에서만 나타나는 기이한 현상이다. 우리는 더 이상 입 아픈 얘기는 별로 할 필요를 못 느끼고 잘 살고 있고. 예술 학교에서도 예술가로 살기 위해서는 직접 글을 써야 하는 것으로 가르친 지 오래다. 

그런 의미에서도 LH 씨를 꼭 만나야겠다.

 

++


Jean Starobinski (1964): 교양을 갖춘 사람은 기존의 모든 권위에 반대할 권리를 강력히 요구하다보니 반대자의 입장까지 갖게 된다. 스스로 자신에게 반론을 던지는 자가 될 수 있는 것은 이 때문이다. 그렇기에 18세기는 그 시대의 모든 경향과 그 시대에 인기를 끌었던 모든 관례적 표현에 비판의 칼날을 댔던 것이다. 간혹 단호한 의지로 완전히 다른 것을 실험하고자 할 때도 있었다. 그리하여 즉각적 자극을 추구하는 로코코 시대의 취향이 영원한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신고전주의 시대의 취향을 대체되었다. 표현의 변동성이 형식의 부동성 속에 숨어버린다. 

-- 이충훈 옮김(2018: 22)


책 쓰실 만하오. 

+++


Jean Starobinski (1964): 예술은 역사의 어떤 지점에서든 사회 전반의 상태를 직접적으로 표현하진 않는다는 점이 충분히 강조되지 않았다. 예술은 권력과 부를 가진 이들의 전유물이었다. 그들이 작품을 주문하고, 자기 취향과 문화를 기준으로 작품을 평가했다. 예술사회학은 여기서 꼭 짚고 넘어가지 않을 수 없는 여러 가지 질문을 던진다. 예술의 생산과 수용의 회로에서 배제된 사회계급이 있는가? 예술작품은 문화의 언어를 모르는 채로 살아가는 말 없는 사람들과 어떤 관계를 맺는가? 그림과 조각, 건물의 소유자가 되는 후원자가 그것들의 다양한 기능을 결정할 수 있다는 점도 잊어선 안 된다. 그는 작품을 개인적 즐거움을 위해 보관할 수도 있고, 반대로 군중을 초대하여 경이로운 작품을 감상하게 할 수도 있다. 후자의 경우에는 예술가의 영광보다도 비용을 낸 사람의 위신이 더 중요할 때도 있다. 이때 사회적으로 열등한 조건을 가졌기에 '미'의 생산과 소비의 회로에서 배제된 것처럼 보이던 사람들이 한데 모여 예술작품을 넋 놓고 바라보고 감화되는 수용자로 재통합된다. 미술 애호가가 혼자 즐기려고 모으는 수집품과 민중의 시선을 한몸에 받는 교회나 광장의 예술적 기능은 전혀 다를 수밖에 없다. 민중은 교회나 광장에서 신앙의 상징, 공동생활의 공간을 찾게 된다. 여기에서 집단적 귀속과 일체화가 이루어지는 셈이다. 예술의 기능을 분석한다는 것은 결국 말하는 사람이 누구인지, 왜 그것을 언급하는지, 나아가 누구를 대상으로 말한 것인지, 수용자가 작품을 이해했는지 묻는 일이다. 

-- 이충훈 옮김(2018: 25-26)



Tuesday, July 06, 2021

Ennio Morricone (1966) Sergio Leone's Dollars trilogy OST

Sergio Leone (1964) Per un pugno di dollari
A Fistful of Dollars 황야의 무법자 OST: #01 Titoli (Title)
by Ennio Morricone


Sergio Leone (1965) Per qualche dollaro in più 
For a Few Dollars More 석양의 건맨 title music
by Ennio Morricone


Sergio Leone (1966) Il Buono, Il Brutto e Il Cattivo 
The Good, the Bad and the Ugly 석양에 돌아오다 (석양의 무법자) OST
by Ennio Morricone


어휴, 이 천재... 세 편 다 못 봤는데 내용이 어떻든 레오네의 에픽 정경이야 예상 안이라도, 스파게티 웨스턴이란 용어가 무색하도록 음악만으로도 새로 장르를 만드셨네. 전곡을 이어 들으니 오히려 새록새록 놀라운 엔니오 모리코네.   


원작: 黒澤明 (Akira Kurosawa, 1961) 用心棒 Yojimbo 
요짐보 trailer


또 다른 리메이크: Walter Hill (1996) Last Man Standing 
라스트맨 스탠딩 trailer



Friday, June 11, 2021

just a model

Maurice Merleau-Ponty (1964): 보기와 감각하기를 이해하는 것, 그것은 그들을 잠시 정지시키는 것이다. [60] [...] 그러니까 철학자가 본연의 시각을 일시 정지시키는 것은 다만 표현된 것의 차원 가운데로 본연의 시각을 이행시키기 위해서뿐이다. 요컨대 본연의 시각은 철학의 모델 또는 척도로 남는다. [61] 

-- 남수인 옮김 (2004) 


다음 문장부터가 중요하겠지만, 내 용건은 저자를 이해하기 위함이 아니라서. 그제-어제는 죄의식과 파멸의 시간이었는데, 어제-오늘은 응답과 투정으로 변했다. 자포자기의 상태. 덮지를 못하고 낑낑댔더니, 후회도 못 하게 하네. 대상을 정하는 것부터 도움을 받아야 했지만, 방법도 주시려던 거였나 아차 싶어 뒤늦게 한 것도 없이 어렵게 찾아갔었지만, 역시 오해였음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방법을 마련하기 위한 시도를 다시 이어갔다. 결과가 없다고는 못해도 당장 쓰기에 적합하지는 않다. 만약 다음들이 있다면 방향은 맞추어야 할 것 같다 보니 순서가 바뀌었을 뿐. 2절이 사정상 술술 읽히기에 이어지는 부분도 한번 기웃거려나 보려던 거였는데, 혼자 어디서 해결할 수 있는지 알 수 없는 것들이 분명한 것 같아서 여쭈려던 질문들에 대한 답이 줄줄 나오고 있다. 문제를 해결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질문을 잊어버리지 않는 것도 중요하다는 생각이 다시 든다.   

왜 (데카르트를 빼고) 여러 프랑스 철학자들은 자신의 전제에 대해서 명시하지 않고 말하기 시작하는 걸까? (출발점과 전제는 엄연히 다르다. 출발점은 장황하리만치 늘어 놓던데. 자기 선생님들과 선학에게 인정받아야 해서 그런지?) 해설이 상납되기를 기다리는 건가? 학위가 없어도 연구 지망이 아니라도 이과생들은 늦어도 학부 과정을 거치며 그 점만은 가차없는 훈련을 받는다. 물론 우리는 그 전제들에 대해 성찰하지 않고 대개는 심지어 검토하지도 않는다. 하지만 그것을 의식/선택하지 않고는 어떤 출발도 할 수가 없고, 다만 습관이 안 되어 표현상의 기술을 누락하는 실수를 하는 미숙한 단계가 있을 뿐이다. 마치 축 설명이 빠져 있는 그래프 같은 상태로는 읽어도 읽기가 시작이 안 된다고요. 

이거 순환 논리가 아닌가, 그것도 서로 다른 두 개의 차원에서 2중으로, 했던, 갑갑한 부분들을 조목조목 지적해 주니, 비판이 목적이 아니라 이해가 목적이었던 나에게는 그 자체로 답들이 되었다. 

그리고 이 사람은 동시대를 철학자로 살았네. 와이트헤드는 안 읽은 것 같지만, 적어도 코펜하겐 해석은 잘 이해하고 있다. 아인슈타인의 입장에 대한 인식도 면밀하고 정확하다. 1950년대 말이라면 당연한 일 아닌가 생각하지만, 프랑스 문과인들은 20세기에도 과학을 아마 콩트인지 시절의 의미로 일컫는 경우가 많아 보이던데. 아무튼 이 분은 건전하고 정직한 사람이라는 사실을 알았다. 어차피 따라갈 수 있는 능력이 없는 나에게는 먼저 아는 것이 중요한 사실이다.      

게슈탈트는 포기해야겠다. 포기라는 판단을 하는 데 이렇게나 오래들 걸려서야...     

Wednesday, June 09, 2021

William Wordsworth (1802) My Heart Leaps Up

Maurice Merleau-Ponty (1964): 진실적인 것은 사물처럼, 타인처럼, 정서적이고 거의 살적[肉的; 관능적]인 경험을 통해 빛을 발하거니와, 이 경험에서 '관념들' — 타인의 관념들과 우리의 관념들 —은 타인이나 우리의 생김새의 면면이라 할 수 있으며, 이해된다기보다는 오히려 사랑 또는 미움 속에서 받아들여지거나 배척된다고 할 수 있다. 물론 매우 일찍부터 추상적인 동기들, 범주들은 이러한 야생적 사유 가운데서 작용하거니와, 이러한 점은 어린 시절 가운데 성인의 삶이 엄청나게 예시되고 있는 데서 잘 나타나 있다. 결국 우리는 인간 전체가 이미 여기 어린 시절에 들어 있다고까지 말할 수 있다. 어린이는 말로 표현해 낼 수 있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이 이해하며, 정의는 못 내릴지언정 답변은 잘할 수 있다. 게다가 성인도 마찬가지이다. 진정한 대담(entretien)은 내가 머릿속에 품고 있었음을 나 자신이 알고 있지 못했던 사유들에, 내가 가질 능력은 없었지만 때로 낯선 길에서 나를 좇고 있음을 느낀 사유들에, 그리고 이제 타인에 의해 탄력을 받아 나의 담론이 나를 위해 개척하고 있는 중인 사유들에 도달하게 해 준다.

cf. 기다 겐(木田 元) 해설 in: 이신철 옮긴(2001) [현상학 사전]

샛길이지만 자연히 떠오른 

My heart leaps up


William Wordsworth (1802) 

My heart leaps up when I behold 
⁠A Rainbow in the sky: 
So was it when my life began; 
So is it now I am a Man; 
So be it when I shall grow old, ⁠
Or let me die! 
The Child is Father of the Man; 
And I could wish my days to be 
Bound each to each by natural piety.


자연히 생각난 내 책상 서랍 속의 

내 손바닥보다 작은 책. (원시는 1904년 판본에서는 제목이 The Rainbow로 수정되었다.) 초등 2년 여름방학이 끝나가던 며칠 머물렀던 외가의 아파트 단지 내 상가 문구점에서 외할머니가 아무거나 사 주시겠다 해서 골랐던 선물. 조르진 않았다. 어린 시절 이상하리만치 욕심이 없었기에 여러 번 거부하는 바람에 한참 실랑이가 오가고 가게 주인 아주머니까지 거들고 나서야 탐색에 나섰던 기억이 난다. 이미 예의와 도리를 배운 나이였지만, 그래서는 아니었고, 세상에 좋은 것을 굳이 내가 가진다는 것이 마치 들판의 꽃을 꺾어 내 방에 가둬 놓는 것처럼 여겨져서 죽여 버리는 것처럼 느껴져 진심 싫었던 기억들이 있다. 안타깝게도 지금은 안 그렇다. 

가격 700원. ISBN도 없는 1986년 8월 5일 무려 8판 인쇄되고 20일 발행된 한림출판사(발행인 임인수) 편집부의 이름 없는 번역자(들)의 우리말들은 오늘까지 날마다 내 마음속에 고스란히 펼쳐져 있다. 내일도 살아 있다면 그럴 것이다. 나는 여기의 시들에서 처음 배운 낱말들이 많으니까. 백합, 몸서리, 몽기몽기, 첫사랑, 키스, 햇발, 살포시, 라이너 마리아 릴케(여자인 줄 알았다), 아스라이, 강변, 에메랄드, 시몬(남자인 줄 알았다. 그래서 나중에 게이라는 낱말을 처음 들었을 때, 나는 구르몽과 시몬을 떠올렸다. 물론 낙엽 밟는 소리와 함께), 나그네, 이니스프리, 소네트, (누나 말고) 누이... 셀 수 없다. '프로스트'는 서리이기 전부터 시인이었던 세월이 쌓여 있었고. 무엇보다 교과서에는 학년이 올라가도 잘 나오지 않은 다채로운 어미들과 섬세한 조사들. 그리고 처음 만난 '은유'(라는 낱말은 그때는 몰랐지만), "봄은 고양이로다". 

아홉(만 여덟) 살 때까지 살면서 무지개를 몇 번밖에 보지 못했다. 그러니 그 단어가 얼마나 강렬했던지! 책을 펼치기만 하면 진짜 무지개가 나왔으니까! 그런 의미에서 이 삽화에 무지개가 없다는 점이야말로 시집다운 미덕이라고 생각한다.(이거야말로 모피어스들이 갖추어야 할 핵심 능력인데.) 사실 삽화는 무려 150편의 시 중 처음 몇 편에만 있다. 나에게 이 포켓북보다 작은 6cm x 9cm "미니 책"은 책이라기보다는 마술 상자였다. 처음 만나는 낱말이라면 그것이 그대로 세계가 되었다. 하지만 이 시는 좀 어려웠다. 특히 "어린이는 어른의 아버지"라는 말이. 그래서 강하게 남기는 했어도, "내 마음을 뛰게" 한 시들은 다른 시들이었다. 

뒷부분에는 원문과 함께 실린 시들이 있는데, 그래서 학교에서 '조사', '어간/어미' 등의 문법을 배우기 한참 전에, 우리말의 조사라는 것 그리고 특히 어미라는 것이 외국어와는 다른 우리말의 특징임을 곧 눈치채게 되었다. 그때의 놀라움과 자부심은 이루 말로 다할 수가 없다. 여기에 번역된 시가 훨씬 더 아름답게 느껴졌으니까. 그렇다, 나는 그 8월 말의 어느 날부터 수 년이 지나 영어를 처음 배울 때까지, 그리고 중딩 때까지, 이 책을 작은 주머니에 넣고 어디를 가든, 학교에 가든 화장실에 가든, 목욕이나 샤워 할 때만 빼고, 밤에 이불 속에 들어가서도 불 끌 때까지, 친구랑 놀러 나가든, 주말에 부모님을 따라 공원이나 미술관에 가든, 방학 때 계곡이나 바다로 여행을 가든, 소풍이나 캠프나 수련회를 가든, 속상한 일로 잠시 바람이나 쐬러 나가든, 침대에서 뒹굴 때든, 수시로 꺼내 보며 종이가 마르고 닳도록 읽었다. 고딩 때가 되어서야 서랍 속에 두었다. 그것도 미친 교사들 때문에 학교 생활이 너무 험악해 지키기 위해서였다. 이미 버젓한 시집들이 몇 권이나 있어서 덜 찾게 되었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그렇게 몸에서 멀어지니 마음에서 멀어졌다. 그래도 이것 없는 나는 상상할 수 없다. 이 책이, 시들이 없었더라면, 그런 나는 지금의 나와는 분명 아주 다른 사람이다.

게슈탈트에서 외도의 외도의 외도의 외도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