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문을 좋아하기도 하니 기꺼이 다짐대로 받아쓰기를 하는데, 꿈틀꿈틀. 3분도 안
걸리는 사이에 토할 것 같기도 하고, 날이 가도 어쩐지 개운하지가 않았다. 자책은
잘 해도, ritual이라니... 비위 맞추기를 전혀 못 하는 천성을 고치고 예를 익히기
위해서라고 하더라도 너무 나답지가 않은데. 왜 자꾸 찜찜하고 뭔가 더 가야 한다고
강력히 느끼는 걸까? 문제의 뒷부분.
《呂氏春秋 · 孟夏紀 · 尊師》 :
Lǚ shì chūnqiū - mèng xiàjì - zūnshī :
君子之學也,說義必稱師以論道,聽從必盡力以光明。
Jūnzǐ zhī xué yě, shuō yì bì chēng shī yǐ lùn dào, tīngcóng bì jìnlì yǐ
guāngmíng.
군자의 학문이라고 하는 것은, 담론을 펼 때에는 반드시 스승을 칭하면서
도(道)를 논(論)해야 하고, 스승의 가르침을 귀담아 실천하여 있는 힘을 다하여
스승의 학풍을 빛내야 한다.
聽從不盡力,命之曰背;說義不稱師,命之曰叛;
Tīngcóng bù jìnlì, mìng zhī yuē bèi; shuō yì bù chēng shī, mìng zhī yuē
pàn;
귀담아 따르는 데 있는 힘을 다하지 않는 것을 배(背)라고 이름짓고, 담론을
펼치면서 스승의 이름을 거론치 아니 하는 것을 반(叛)이라
이름짓는다.
背叛之人,賢主弗內之於朝,君子不與交友。
bèipàn zhī rén, xián zhǔ fú nèi zhī yú cháo, jūnzǐ bù yú jiāoyǒu.
현명한 임금은 배반(背叛)의 인간들을 조정에 들이지 아니하고, 군자는 더불어
교우(交友)하지 아니 한다.
故教也者,義之大者也;學也者,知之盛者也。
Gù jiào yě zhě, yìzhī dà zhě yě; xué yě zhě, zhīzhī shèng zhě yě.
그러므로 가르침(敎)이야말로 정의의 대체(大體)이다. 배움(學)이야말로
지식의 융성함이다.
義之大者,莫大於利人,利人莫大於教。
Yìzhī dà zhě, mòdà yú lì rén, lì rén mòdà yú jiào.
정의의 대체는 타인을 이롭게 하는 것보다 더 큰 것이 없고, 타인을 이롭게
하는 것은 가르침보다 더 큰 것이 없다.
知之盛者,莫大於成身,成身莫大於學。
Zhīzhī shèng zhě, mòdà yú chéng shēn, chéng shēn mòdà yú xué.
지식의 융성함이란 몸을 이루는 것(成身: [대학]의 수신修身과 완전히
일치하는 개념)보다 더 큰 것이 없고, 몸을 이루는 것은 배움(學)보다 더 큰
것이 없다.
身成則為人子弗使而孝矣,為人臣弗令而忠矣,
Shēn chéng zé wéi rén zǐ fú shǐ ér xiào yǐ, wéi rén chén fú lìng ér zhōng
yǐ,
배움이 이루어지면, 사람의 아들된 자로서 그렇게 하라고 시키지 않아도
저절로 효성스럽게 되며, 사람의 신하된 자로서 명령을 내리지 않아도 저절로
충성스럽게 되며,
為人君弗彊而平矣,有大勢可以為天下正矣。
wéi rén jūn fú jiàng ér píng yǐ, yǒu dàshì kěyǐ wéi tiānxià zhèng yǐ.
사람의 임금된 자로서 강압을 가하지 않아도 저절로 공평하게 된다. 이러한
방식으로 대세를 장악하는 자라야 천하의 바른 기준이 되는 지도자가 될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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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올 옮김(2009/2016:224-226)
도올(2009/2016:226): 너무도 강렬한 언사이며 《대학》을 이해할 수 있게 하는 모든 논리가 제공되고 있다. 먼저 우리가 흔히
"배반背叛"이라고 쓰고 있는 단어의 실내용이 아주 리얼하게 규정되어 있다.
배반의 가장 큰 것은 가르침과 배움 사이의 배반이다.
[...] 여기서 우리가 놓치지 말아야 할 사실은 "성신"이 "지식知"의 문제와
결부되어 있다는 것이며, 그것은 또 "배움學"과 연결되어 있다는 것이다.
수신은 어디까지나 배움을 통하여 몸을 이루어가는 것이며 그 과정에
깔려있는 것은 지식의 융성함이다. 수신과 격물치지가 연결될 수밖에 없는
논리적 고리가 여기 이미 〈존사〉편에 드러나 있는 것이다. [...]
아니, 내 사전이 배반을 당한 일들로 점철되어 있지, 배반을 한/할 일이 있을 리가
있겠니? 삐딱하게 부러울 지경인데. 근데 왜 자꾸 찔리는 것 같고
슬퍼지려는지...
故子貢問孔子曰:「後世將何以稱夫子?」
Gù Zǐgòng wèn kǒngzǐ yuē: "Hòushì jiāng héyǐ chēng fūzǐ?"
그러므로 자공이 공자에게 여쭈어 말하였다: "후세사람들이 장차 선생님을
어떻게 상찬하오리이까?"
孔子曰:「吾何足以稱哉?勿已者,則好學而不厭,好教而不倦,其惟此邪。」
Kǒngzǐ yuē:`Wú hé zúyǐ chēng zāi? Wù yǐ zhě, zé hào xué ér bùyàn, hǎo jiào
ér bù juàn, qí wéi cǐ xié.'
공자께서 말씀하시었다: "내가 어찌 상찬을 받기에 족한 인물이겠는가? 부득불
나보고 어떤 사람이냐고 말하라고 한다면, 끊임없이 배우며 싫증내지 않았고,
남을 가르치는 것을 좋아하며 게으름이 없었다는 것, 그것을 말할 수 있을
뿐이로다."
天子入太學,祭先聖,則齒嘗為師者弗臣,所以見敬學與尊師也。
Tiānzǐ rù tàixué, jì xiān shèng, zé chǐ cháng wéi shī zhě fú chén, suǒyǐ
jiàn jìng xué yǔ zūnshī yě.
천자가 태학(太學)에 들어가 지나간 성인들의 제사를 올릴 때, 일찌기
스승이었던 사람을 신하의 반열에 세우는 짓은 하지 않는다. 이러한 행동을
통하여 학문을 숭상하고 스승을 존경하는 자세를 천하에 보이는
것이다.
-- 도올 옮김(2009/2016: 226-228)
원망이 자책으로 설움이 슬픔으로 바뀌었을 뿐이라면 뭔가 아직 아니올시다. 존사
편은 존사의 방법을 알려 주고 있다. 그걸 몰라서 본 손실이 아까우니 익혀서
써먹겠다고 하는 심사는 또 뭐냐. 흉하다. (그런데 왠지 교수님은 그렇게라도 좀 잘
받아먹는 게 있었으면 차라리 좋다고 하셨을 것 같기도 하다. 이 생각은 더
슬프기는 하지만.) 그리고 그 답은 뒤가 아니라 앞에서 찾을 수 있었다. 권학 편은
존사가 왜 필요한지 내면(수신)에서부터 경륜(치세)까지 단계적으로
설명한다.(소름끼친다.) 그리고, 나에게 결정적이었던 것은 바로, 존사란 기실
무엇인지.
《呂氏春秋 · 孟夏紀 ·
勸學》 :
Lǚ shì chūnqiū - mèng xiàjì - quàn xué
疾學在於尊師,師尊則言信矣,道論矣。
Jí xué zàiyú zūnshī, shī zūnzé yán xìn yǐ, dào lùn yǐ.
Intense study depends on honoring teachers. When teachers are honored, their
doctrines are accepted on faith and their way is advocated.
故往教者不化,召師者不化,
Gù wǎng jiào zhě bù huà, zhào shī zhě bù huà,
Therefore, a teacher who instructs in response to a summons does not
transform the person who summoned him, and the person who summons the
teacher is not transformed by his teachings.
自卑者不聽,卑師者不聽。
zìbēi zhě bù tīng, bēi shī zhě bù tīng.
Those who debase themselves are not heeded, and those who debase teachers do
not heed their teachings.
師操不化不聽之術而以彊教之,欲道之行、身之尊也,不亦遠乎?
Shī cāo bù huà bù tīng zhī shù ér yǐ jiàng jiàozhī, yù dào zhī xíng, shēn
zhī zūn yě, bù yì yuǎn hū?
If the teacher upholds methods that do not transform and are not heeded, yet
insists that others be instructed in them, is this not far indeed from his
desire to have his Dao practiced and his person honored!
學者處不化不聽之勢,而以自行,欲名之顯、身之安也,
Xuézhě chù bù huà bù tīng zhī shì, ér yǐ zìxíng, yù míng zhī xiǎn, shēn zhī
ān yě,
If the student lives in a situation where he can neither be transformed nor
heed instructions, but does whatever suits him, then his hope of making his
name eminent and his person secure is
是懷腐而欲香也,是入水而惡濡也。
shì huái fǔ ér yù xiāng yě, shì rùshuǐ ér è rú yě.
like "holding something rotten but wanting to smell perfume" or "hating to
get wet and yet going in the water."
-- tr. John Knoblock & Jeffrey Riegel (2001) The Annals of Lü Buwei, p.119
疾學在於尊師,師尊則言信矣,道論矣。 순간 너무 아파서 이것이 답이고 모든
원인인 줄 절로 알았다. 난 마지막까지도 고작 이렇게 적지 않았던가. 매번 즉각
답을 주셨는데, 그것이 답이 아니라고 생각했다고. 그때는 뉘우치는 마음으로
괴롭지만 굳이 끌어내 적어 놓자는 것이었는데, 조금만 더 생각하면 이 말만으로도
내가 얼마나 삿되이 비틀려 있는지 알 수 있다. 여기서부터 일파만파 꼬이기 시작한
것이었다. 대학원이란,
내가 공부하는 동기란(그래도 가장 중요하지만), 잘도 이래 가면서. 더 많지만 차마 다 적지
못하겠다. 칼 맞은 것처럼 신체의 격통에 한참 꼼짝 못 하고 숨을 못
쉬었다.
인터넷 검색으로는 적절한 번역을 찾을 수가 없어서(내가 읽는 것보다도 못하시면
어쩌란...), 이럴 때가 아닌데 어쩔 수 없이 한나절을 날린 끝에(인용들은 어째
비유에 불과한 마지막 문장만 선호되는지...) 아쉬운 대로 영역을 찾았다. 양심의
힘이었는지 그냥 내가 읽은 게 제일 나았지만. (도올 선생님 제발 여씨춘추 전체
번역 좀 해 주세요. cJ2 글항아리 건 왠지 안 내켜요.)
疾學在於尊師,師尊則言信矣,道論矣。
평생 못 잊을 것이다. 근원적 환부가 도려내졌다. 頓 ! 그래서 받아쓰기 같은 건 안
해도 되지만. 이 역사적인 사건을 남겨 두지 않을 수가 없었다. 漸에 해당하는
문제의 존사 부분 받아쓰기는 내년 1월 1일까지는 해야지. 왜냐하면, 여기서 돈이
이루어진 것은 무엇보다 애초 내가 師를 찾은 게 맞았다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이제 내가 먼저 포기하거나 포기하기를 지금까지처럼 열심히 고려하는 일은 절대
없다. (이제 생각하니 도대체 다른 건 다 몰라도 나의 그런 망발을 어떻게
용서하셨는지 솔직히 이해가 안 간다. 졸업은 내가 이미 스스로 자격을 잃었으므로
나로서는 아무 불만이 없지만, 내가 짐작하기에 교수님께서는 내가 業을 다하지
않으면, 敎가 이루어지지 않았다 보시고 師弟가 성립하지 않는다 여기실 것
같다.)
化聽이 되지 않으면 깨달은 것도 아니겠지만, 化聽을 이루리란 보장은 없어도
그나마 발동은 걸린 듯. 다 늦어서.
교수님 + 세 명의 과학철학자 + 도올 선생님 + 북부여가 세워졌던 해(기원전
239년)의 여불위와 3천 문사들이 나의 환부를 도려내기 위해 동원되어야 했으니,
병이 참 깊었구나. (절연이 마땅한 과거나 그리워하고 앉아 있었다니... 사실, 석사
지도교수님이 나에게는 정확히 배신의 상처였다는 것도 확실히 알게 되었다. 그런데
그때는 師로 여기는 마음이 없었으므로, 관계적으로는 아무것도 원하는 바가
없었는데도 그렇게 되었기 때문에, 이제 바라는 마음이 있고, 너무나 강한 상태로
인해 끔찍한 불안을 느꼈던 거였다. 하고 싶은 일을 못 하게 되면 죽는 게 낫겠다고
여기니 당연하다. 극도의 불안이 공포가 되어 스스로 도리어 불안을 실현시키는
쪽으로 진행한 것. 갖가지 차원의 망상들은 분석하자면 그 방어기제였다고 할 수
있겠지만, 경험상 분석 작업에 집착한다면 또 다른 도피일 뿐이고 그게 또 무가치한
망상을 낳을 뿐이다.)
요약하면, 그토록 찾으려 애썼던 학문적 방법론의 문제가 아니라 내가 고작 과거의
상처를 핑계로 존사를 안 하려고 한 당장의 마음이 문제였다. 아주 치장이
장엄했소. (그래도 그 모색 자체는 가치가 없지는 않았다고 위안하고 싶다.)
요약하면, 인문학이나 유리 벽의 문제가 아니라 단순히 수신(正心)이 안 되어
장애가 발생한 것이었다. 그러니까 교수님께서 받으셨던 건 학생이 아닌 곪은 알...
알이 어떻게 논문을 쓰겠나... 그래도...
저 다 나았어요!
(생쇼 그만하고 그 기력으로 논문을 쓰라는 소리가 들린다... 늘 뜻을 모르겠다고,
나아가서, 모를 수밖에 없지 않냐고, 속으로 잘도 뇌여 왔는데, 이제 잘 들리는 걸
보니 정말 나은 듯. 교수님의 지성을 이런 식으로 소모하다니 하늘이 노하지 않을까
무섭기는 하다.)
어쨌든 이제 없애야 할 잡념 자체가 사라졌다. 비로소 편하다. 😭
논문을 쓰기 위한 짓, 논문을 안 쓰기 위한 짓, 논문을 쓰고 난 다음을 위한 짓,
논문을 못 쓰고 난 다음을 위한 짓... 논문을 쓰는 짓만 빼고 죄다 해 보느라고
얼마나 힘들었겠어. 남은 한 가지 일이 차라리 쉬울 듯. 잘해야 되는 것도 아니니
걱정도 없고. 물론 몇 달 후부턴 생계가 걱정이겠지만. 그동안 한껏
누려야겠다.
날린 하루였지만, 굉장한 하루였다. 수술 받은 날. 아프지만, 희망적인 아픔.
+
化 = 人(산 사람)이 匕(죽은 사람)으로 되어 다른 사람으로 모양을 바꾸어
다시 태어나다. 윤회(輪廻)
聽 = 直(숨어 있는 것을 바르게 보고) + 耳(듣고) + 心(느끼는) +
壬(사람). (남의 의견·권고 따위를) 받아들이다. (명령·지시에) 따르다.
++
《禮記 ·
中庸》
:
Lǐjì · Zhōngyōng
其次致曲。
Qícì zhì qū.
다음으로 힘써야 할 것을 치곡(致曲)의 문제이다.
曲能有誠,
Qū néng yǒu chéng,
그것은 소소(小小)한 사물에 이르기까지 모두 지극하게 정성을 다한다는
것이다. 그리하면 소소한 사물마다 모두 성(誠)이 있게
된다.
誠則形,形則著,
chéng zé xíng, xíng zé zhù,
성(誠)이 있게 되면 그 사물의 내면의 바른 이치가 구체적으로 형상화된다.
형상화되면 그것은 외부적으로 드러나게 된다.
著則明,明則動,
zhù zémíng, míngzé dòng,
드러나게 되면 밝아진다. 밝아지면 움직인다.
動則變,變則化。
dòng zé biàn, biàn zé huà.
움직이면 변(變)한다. 변하면 화(化)한다.
唯天下至誠為能化。
Wéi tiānxià zhìchéng wéi néng huà.
오직 천하의 지성(至誠)이라야 능히
화(化)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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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올 옮김(2011:54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