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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nday, June 12, 2022

Starobinski (1964) l'invention de la liberté, 1700-1789

Jean Starobinski (1964): 18세기 미학이론의 역사만 봐서는 그 시대 예술이 실제로 어땠는지 규정할 수가 없다. 예술에는 이론가가 보지 못한 면이 많았고, 이론에는 예술가가 거추장스럽다고 오해할 만한 요구가 꽤 많았다. 한편에서는 철학자들이, 다른 한편에서는 예술사가들이 사상은 어떻게 전개되었고 작품은 어떻게 만개하게 되었는지 따로 연구했다. 물론 이런 업무 분담이 잘못됐다고 할 수는 없지만, 18세기의 생생한 현실을 이해하고자 하는 우리에게는 불만스러운 상황이다. 우리의 임무는 (예술 따로 사상 따로 해석하는 것이 아니라) 둘이 공유하는 역사적이고 사회적인 기원을 고려하면서, 자유로워지려는 예술과 그런 예술을 이해하고 지도하고 고취하고자 하는 까다로운 성찰이 얼마나 복잡한 관계를 맺고 있는지 알아내는 것이다. 

-- 이충훈 옮김(2018: 17-18)


이뿐만이 아니라서 미학/예술학을 하라고 하시는 건 마치 연인에게 공작을 하라는 명령 같은 걸. 자명고 찢을 리도 없지만 난 좀 뜨거운 편이라 곤란한데. 보통 안 드러나지만.

실천을 "이해하고 지도하고 고취"할 능력이 이론에게 없으니 걱정할 필요는 없다. 이론은 새로운 경험을 줄 수 있을 뿐이다. (난 이런 세계가 더 맘에 드는데.) 그걸 활용할 능력은 양쪽 모두에게 있고.

그러니까 FN 교수님도 JM 교수님도 나에겐 소중한 고객. 

우리 나라의... 그러고 보니 북한은 어떨지 다를 것 같은 기대와 함께 궁금하네. 남한의 작가들과 관객들은 자칭 이론가(대개는 백인분들 말씀 전파자)들의 작태에 이골이 나 있다. 일단 예술 현장에 자신의 몸이 있지 않은 자의 예술론이란 절망을 줄 만한 힘조차 없는 것을. 지금까지 살면서 관찰한 바로는 아무래도 이 나라에서만 나타나는 기이한 현상이다. 우리는 더 이상 입 아픈 얘기는 별로 할 필요를 못 느끼고 잘 살고 있고. 예술 학교에서도 예술가로 살기 위해서는 직접 글을 써야 하는 것으로 가르친 지 오래다. 

그런 의미에서도 LH 씨를 꼭 만나야겠다.

 

++


Jean Starobinski (1964): 교양을 갖춘 사람은 기존의 모든 권위에 반대할 권리를 강력히 요구하다보니 반대자의 입장까지 갖게 된다. 스스로 자신에게 반론을 던지는 자가 될 수 있는 것은 이 때문이다. 그렇기에 18세기는 그 시대의 모든 경향과 그 시대에 인기를 끌었던 모든 관례적 표현에 비판의 칼날을 댔던 것이다. 간혹 단호한 의지로 완전히 다른 것을 실험하고자 할 때도 있었다. 그리하여 즉각적 자극을 추구하는 로코코 시대의 취향이 영원한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신고전주의 시대의 취향을 대체되었다. 표현의 변동성이 형식의 부동성 속에 숨어버린다. 

-- 이충훈 옮김(2018: 22)


책 쓰실 만하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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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ean Starobinski (1964): 예술은 역사의 어떤 지점에서든 사회 전반의 상태를 직접적으로 표현하진 않는다는 점이 충분히 강조되지 않았다. 예술은 권력과 부를 가진 이들의 전유물이었다. 그들이 작품을 주문하고, 자기 취향과 문화를 기준으로 작품을 평가했다. 예술사회학은 여기서 꼭 짚고 넘어가지 않을 수 없는 여러 가지 질문을 던진다. 예술의 생산과 수용의 회로에서 배제된 사회계급이 있는가? 예술작품은 문화의 언어를 모르는 채로 살아가는 말 없는 사람들과 어떤 관계를 맺는가? 그림과 조각, 건물의 소유자가 되는 후원자가 그것들의 다양한 기능을 결정할 수 있다는 점도 잊어선 안 된다. 그는 작품을 개인적 즐거움을 위해 보관할 수도 있고, 반대로 군중을 초대하여 경이로운 작품을 감상하게 할 수도 있다. 후자의 경우에는 예술가의 영광보다도 비용을 낸 사람의 위신이 더 중요할 때도 있다. 이때 사회적으로 열등한 조건을 가졌기에 '미'의 생산과 소비의 회로에서 배제된 것처럼 보이던 사람들이 한데 모여 예술작품을 넋 놓고 바라보고 감화되는 수용자로 재통합된다. 미술 애호가가 혼자 즐기려고 모으는 수집품과 민중의 시선을 한몸에 받는 교회나 광장의 예술적 기능은 전혀 다를 수밖에 없다. 민중은 교회나 광장에서 신앙의 상징, 공동생활의 공간을 찾게 된다. 여기에서 집단적 귀속과 일체화가 이루어지는 셈이다. 예술의 기능을 분석한다는 것은 결국 말하는 사람이 누구인지, 왜 그것을 언급하는지, 나아가 누구를 대상으로 말한 것인지, 수용자가 작품을 이해했는지 묻는 일이다. 

-- 이충훈 옮김(2018: 25-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