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riday, June 11, 2021

just a model

Maurice Merleau-Ponty (1964): 보기와 감각하기를 이해하는 것, 그것은 그들을 잠시 정지시키는 것이다. [60] [...] 그러니까 철학자가 본연의 시각을 일시 정지시키는 것은 다만 표현된 것의 차원 가운데로 본연의 시각을 이행시키기 위해서뿐이다. 요컨대 본연의 시각은 철학의 모델 또는 척도로 남는다. [61] 

-- 남수인 옮김 (2004) 


다음 문장부터가 중요하겠지만, 내 용건은 저자를 이해하기 위함이 아니라서. 그제-어제는 죄의식과 파멸의 시간이었는데, 어제-오늘은 응답과 투정으로 변했다. 자포자기의 상태. 덮지를 못하고 낑낑댔더니, 후회도 못 하게 하네. 대상을 정하는 것부터 도움을 받아야 했지만, 방법도 주시려던 거였나 아차 싶어 뒤늦게 한 것도 없이 어렵게 찾아갔었지만, 역시 오해였음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방법을 마련하기 위한 시도를 다시 이어갔다. 결과가 없다고는 못해도 당장 쓰기에 적합하지는 않다. 만약 다음들이 있다면 방향은 맞추어야 할 것 같다 보니 순서가 바뀌었을 뿐. 2절이 사정상 술술 읽히기에 이어지는 부분도 한번 기웃거려나 보려던 거였는데, 혼자 어디서 해결할 수 있는지 알 수 없는 것들이 분명한 것 같아서 여쭈려던 질문들에 대한 답이 줄줄 나오고 있다. 문제를 해결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질문을 잊어버리지 않는 것도 중요하다는 생각이 다시 든다.   

왜 (데카르트를 빼고) 여러 프랑스 철학자들은 자신의 전제에 대해서 명시하지 않고 말하기 시작하는 걸까? (출발점과 전제는 엄연히 다르다. 출발점은 장황하리만치 늘어 놓던데. 자기 선생님들과 선학에게 인정받아야 해서 그런지?) 해설이 상납되기를 기다리는 건가? 학위가 없어도 연구 지망이 아니라도 이과생들은 늦어도 학부 과정을 거치며 그 점만은 가차없는 훈련을 받는다. 물론 우리는 그 전제들에 대해 성찰하지 않고 대개는 심지어 검토하지도 않는다. 하지만 그것을 의식/선택하지 않고는 어떤 출발도 할 수가 없고, 다만 습관이 안 되어 표현상의 기술을 누락하는 실수를 하는 미숙한 단계가 있을 뿐이다. 마치 축 설명이 빠져 있는 그래프 같은 상태로는 읽어도 읽기가 시작이 안 된다고요. 

이거 순환 논리가 아닌가, 그것도 서로 다른 두 개의 차원에서 2중으로, 했던, 갑갑한 부분들을 조목조목 지적해 주니, 비판이 목적이 아니라 이해가 목적이었던 나에게는 그 자체로 답들이 되었다. 

그리고 이 사람은 동시대를 철학자로 살았네. 와이트헤드는 안 읽은 것 같지만, 적어도 코펜하겐 해석은 잘 이해하고 있다. 아인슈타인의 입장에 대한 인식도 면밀하고 정확하다. 1950년대 말이라면 당연한 일 아닌가 생각하지만, 프랑스 문과인들은 20세기에도 과학을 아마 콩트인지 시절의 의미로 일컫는 경우가 많아 보이던데. 아무튼 이 분은 건전하고 정직한 사람이라는 사실을 알았다. 어차피 따라갈 수 있는 능력이 없는 나에게는 먼저 아는 것이 중요한 사실이다.      

게슈탈트는 포기해야겠다. 포기라는 판단을 하는 데 이렇게나 오래들 걸려서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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