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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ednesday, April 26, 2023

Zhelyabuzhsky (1924) The Cigarette Girl from Mosselprom

Walter Benjamin (1927): [...] 하지만 나무에는 저 숲 속의 밤도 살고 있다. 그건 화사한 붉은색으로 내부가 칠해진 무겁지만 작은 상자들에 있다. 겉엔 광택이 나는 검은색 바탕 위에 그림이 그려져 있다. 차르 전제정 시대에 이 산업은 사라질 위기에 처했었다. 지금은 새로운 세밀화들과 함께 금색으로 농부들의 삶을 묘사하고 있는 옛 그림들이 다시 등장하고 있다. 어둠 속에서 세 마리 말이 끄는 마차로 사냥을 하고 있거나 컴컴한 밤에 바다색 치마를 입은 소녀가 녹색으로 넘실거리는 숲 옆에 서서 연인을 기다리고 있는 그림들이다. 그 어떤 무서운 밤도, 그 자궁 속에 그로부터 출몰하는 모든 것이 숨어 있는 이 단단한 상자의 니스칠한 밤만큼 어둡지는 않으리라. 앉은 채로 담배를 팔고 있는 여인이 그려져 있는 상자를 보았다. 그녀 옆에 숨어 있는 아이 한 명이 담배를 집으려 한다. 여기도 칠흑같은 밤이다. 하지만 오른쪽으로는 돌멩이를, 왼쪽으로는 잎이 다 떨어진 작은 나무 한 그루를 알아볼 수 있다. 그 여인의 앞치마에 '모젤프롬'이라고 써 있다. 그녀는 소비에트의 '담배를 든 성모'다.   
-- 김남시 옮김(2015: 299-300)


cf. Дом Моссельпром (Московское объединение предприятий по переработке продуктов сельскохозяйственной промышленности) 모스셀쁘롬(인 듯. 러시아어 몰랐다지만 Mosselprom은 독일어 발음으로도 모스젤프롬. 적어도 모쎌프롬.) 

https://architectuul.com/architecture/mosselprom



Юрий Андреевич Желябужский (Yuri Zhelyabuzhsky; 유리 젤랴부즈스키1924) Папиросница от Моссельпрома (Papirosnitsa ot Mosselproma) The Cigarette Girl from Mosselprom (112 m) (캡션: 영어 자막. 원래 무성.)

 

이번 주말에 봐야지. 지금으로서는 벤야민이 이 영화를 알고 있었는지, 아니면 잡상인이 재활용한 포스터를 보았는지 또는 그것을 원본으로 한 모작이나 소재로 한 장식화를 보았는지 불확실하다. 아무튼 조사 결과 벤야민 체류 시기 '모스셀쁘롬 돔'은 시내 한복판에 당시로서는 초고층에 해당하는 10층으로 완공되어 있었다. 또는, 현실이야말로 공통된 원본이고, 영화가 벤야민의 여행기와 마찬가지로 거기에서 모티프를 끌어냈는지도.  

어제 도착한 유리 펜으로 못 참고 새벽에 무아지경으로 잉크 놀이 했더니 스트레스가 날아가서 완전 의욕 충전. 


김수환 (2022: 170-204): 그런데 흥미로운 사실 하나가 있다. 모스크바 방문이 남긴 영향에 있어서 그 무엇보다 두드러진 매체가 따로 있다는 점이다. 문학도 연극도 아닌 영화가 바로 그것이다. 벤야민의 평전을 쓴 제닝스(Michael Jennings)와 아일런드(Howard Eiland)에 따르면, "이후의 작업 방향이라는 면에서 볼 때 벤야민이 러시아의 경험으로부터 얻은 가장 중요한 결실 중 하나는 영화 매체 관련 사유들을 펼쳐갈 추동력이었다."[하워드 아일런드·마이클 제닝스, 『발터 벤야민 평전: 위기의 삶, 위기의 비평』, 김정아 옮김, 글항아리, 2018, 370쪽.]

[...]

이런 대립 구도가 갖는 의미는 훗날 「기술복제시대의 예술작품」을 통해 유명해지게 될 촉각성 개념의 기원이 실은 모스크바였다는 사실의 확인 정도에 머물지 않는다. 그보다 훨씬 더 의미심장한 것은, 유럽과 러시아(소비에트)를 이런 식으로 병치, 대립시키는 벤야민의 관점 자체다. [...] 그 태도의 각별함은 그가 일반적인 유럽인의 관점에서라면 일탈이나 지체(가령 아직까지 유럽에 이르지 못한 상태)로 간주할 만한 것들에서 새로움과 차이(즉 유럽에서는 불가능하기에 시도되지 못한 것)를 식별하고자 할 때, 무엇보다 뚜렷하게 드러난다. 

그렇다면 여기서 다음과 같은 가정을 해본다면 어떨까? 벤야민이 영화 매체에 부여한 특별한 가능성이 기존의 모든 매체들과는 원칙적으로 다른 그것의 (존재론적, 기능적) 새로움에 걸려 있다고 한다면, 혹시 그 새로움이란 모든 유럽적인 것과 차별화되는 소비에트-러시아만의 원칙적인 새로움과 연동되어 있는 것이 아닐까? 만일 영화 매체의 새로움과 소비에트 사회의 새로움이 본질적으로 동종의 것이라면 어떨까? 

[...] 

1926년 겨울 벤야민이 목도한 모스크바의 가정집, "사적인 삶"이 폐지되고 "안락한 방"이 사라진 그곳은 더 이상 (소부르주아적 거주지의) 아우라가 불가능해진, 그런 장소였다. 

[...] 결국 벤야민이 말하는 경험의 빈곤 상황, 새로운 야만성의 상황이란 그냥 자연이 아니라 (「초현실주의」에서 이미 이야기했던) "피시스(Physis)"의 상황, 그러니까 "기술 속에서 그 집단의 일원으로 조직되는 자연"이라는 사실이 명백해진다. 

[...] 이 경우에도 우리의 관심은 '이후'뿐 아니라 '이전'으로 이끌린다. "자연과 기술, 원시성과 안락함은 여기서 완전히 하나가 된다"라는 바로 앞의 문장은, 한편으로 기술이 현실 속에 고도로 침투해 있는 피시스의 (미래) 세계를 가리키는 것이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과거의) 또 다른 세계를 강하게 연상시킨다. 새 것과 옛 것이 어지럽게 뒤섞여 공존하는 곳, "기술적 경영과 원시적 실존의 모습이 철저히 서로 침투"(297)해 있는 그곳은 다름 아닌 모스크바다. 



Tuesday, March 21, 2023

Dani Karavan (1994) Passage to Benjamin

무서워서 죽을 지경까지는 아닐 정도로 다행히 몸이 충분히 아파서. 초다행히 기분이 무척 좋으신 상태셨다. 살다 보니 운이 좋을 때도 있구나.

그런데 강의가 다른 의미로 부비트랩! 들어가자마자 울림. 😱 힝- 강의 시간에 작품 보여 주시는 게 어딨어, 반칙. 무방비로 당함. 역시 교수님은 영원한 헤테로토피아.

안 그래도 가슴이 미어지는 명랑한 사람인데... 단지 그 사람의 매력이 아니라, 그의 선택을, 그의 의지를, 그의 소망을, 너무도 따뜻하게 포옥 사랑하는 작품이었다. 자신의 죽음을 기다리는 또 다른 위대한 영혼의. amor fati. 가히 '구제예술'로 이름한다. (이것이 또한 개념적으로는 온전히 벤야민적 '미메시스'.) 




Passage, a Homage to Walter Benjamin 
Dani Karavan (1990–1994) 
Portbou, Catalonia
(informed by prof.)