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고등학생 때까지는 타협해서, 타협하면서 대신 내가 타협했던 모든 일들을 절대 잊지 말자고 다짐해서, 내가 막지 못하고 공범이 되었던 직접적 폭력들과 간접적, 잠재적 피해들도 잊지 않으려 노력해서, 그 이후로는 타협할 수 없었다. 처음엔 내가 굴복했었던 물리적인 폭력에 대한 공포가 재발되어 신체적인 저항감 때문에 힘들었는데 나중에는 사회적인 폭력, 폭력을 넘어선 사회적인 살해가 더 손쉽고 또 더 무서우며 방어하기 어렵다는 것을 알게 되어 갈등이 일었다. 그래도 계획대로, 타협하지 않을 수 있게 된 것은, 타협하는 나를 다행히도 용서하지 않았던 때문이다. 인색했던 과거의 마음이 현재의 계산적인 머리를 이기곤 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것으로는 충분하지 않았다.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타협하지 않는 것도 힘이 있을 때에나 조금이라도 유효하다는 깨달음이었다. 타협하지 않으면서도 힘을 가질 수 있으려면 미리부터 평소에, 그러니까 늘, 나에게 훨씬 더 엄격해야 가능하다. 예외나 모자람이 있으면 안 된다. 뒤늦게 깨달은 것도 오래전인데, 아직도 그렇게 되지 못했다.
타협하지 않는다 해도 힘이 없으면 사회적 생매장이나 무고를 당하고, 단지 상대방에게 그 방식이 통하지 않는 경우도 있다는 사실 하나만을 은밀하게만 알려줄 수 있을 뿐이다. 그것으로는 누군가의 심기를 잠시 조금 불편하게 할 수 있을 뿐 아무런 유익이 없다. 보복, 제거하는 경험과 그것을 목격하는 경험을 하게 하면 원래의 행위와 동기가 더 강화되고 정당화되어 고착될 뿐이다. 무엇이든 어설프거나 모자란 것은 아니함만 못하다. 강할 정도로 착한 경우에만 착하다. 선을 달성하려면 어떠한 타협도 없이 휴식도 없이 지극하고 투철해야만 한다. 지선(至善)만이 선이다. 중간은 없다. 아니면 나와는 타협하면서 남과는 타협하지 못하는 꼴밖에 되지 못한다. 그러니까 좋게 말해 봐야 미련하게 버티기만 할 뿐인 표리부동한 내가 한심하고 못미덥다.
독일에 있을 때 유일하게 또 몇 년만에 본 한국 방송이었기에 이번에 2기를 챙겨 보았다. 그런데 이 대목에서 황시목이 말이 없어지는 장면에서 나도 같이 가슴이 철렁했다. 드라마가 아닌 나의 상황으로. 살면서 숱한 도움을 받았지만 내가 일방적으로 도움을 청한 적은 없다가 처음 그러고 있었다. 그 마음을 먹기까지도 죽을 만큼 어려웠고, 실행하면서는 도저히 나 자신을 유지할 수가 없어 새로운 자아에 이름을 붙이기까지 했다. 남들은 보통 거절당할까 봐 걱정하는 것 같던데 나는 그것은 두렵지 않았다. 사정이 절실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하겠지만 나로선 절실했다. 단지 묻는 것까지는 되겠지만 그 이상은 안 된다고 생각할 뿐. 아무튼 "도와 주세요"라고 말하지는 않았지만 말한 것과 다름 없었다. 그래서 위에서 선배 검사장이 지적할 때 나도 깜짝 놀랐다. 나 때문에 곤란해지실 수도 있을 것 같아서 미리 말씀드리고 선택권을 드려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도 있었기에, 그런 식의 자기합리화를 하고 있었던 것도 내용은 다르지만 드라마 상황과 비슷하다. 게다가 황시목과 달리 나는 이전에는 그렇게 산 적이 한 번도 없다는 사실을 늘 검토하고 의식하고 있었기에 나는 그런 사람이 아니라고 믿고 있었다. 그런데 어느새 익숙해진 마음이 생겼구나. 정신이 번쩍 들었다. 바라면 안 되는 것을 나도 모르게 바라고 있는 것은 없는지 다시 점검해야겠다고.
황시목: 어떻게 끝날지는 최 부장님께서 선택할 수 있으니까요. [...] 저는 그런 한여진 경감의 안목을 믿고 지금 여기에 왔습니다. 어떠한 양심에 기대를 걸어서가 아니라요.
그래도 이 심정 안다고 말할 자격은 있는 것 같다. 두나 님과 같이 울 자격.
미친 현실 도피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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