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릴레오 북's] 74회: 이오덕 (1992) 우리글 바로쓰기 - 1부
[알릴레오 북's] 75회: 이오덕 (1992) 우리글 바로쓰기 - 2부
하지만 '아이다움'에 대한 편견과 제한이 있기도 하네. 그 때문에 나날이 너무 자주 피해를 입었던(일례로, 나 혼자 한 나의 일을 어떤 어른이 시켰거나 대신 해 준 것이었으리라는 오인과 추궁을 많이 받으며 자랐고 지금까지도 신뢰가 충분하지 않은 상대와 교류하는 방식에 지대한 영향을 받고 있는) 나로서는 더욱 '교학상장'이란 단순히 학생을 관찰하고 그 결과에 일방적으로 맞추어 주거나 편하게 소통할 거리들을 만들기 위해 똑같이 대하는 것과는 무관하다 생각. 교육은 생태학이나 동물 행동학이 아니다. 재능이 없고 별다른 노력을 해 보지 않은 어른보다 감각을 타고나거나 어떤 자극에 익숙해진 아이가 훨씬 더 뛰어난 상태일 수 있다. 직업이 교사라면 그런 것들을 찾아내는 눈과 귀가 필요하고. 세상의 모든 아이가 그런 것을 꼭 두 가지 이상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귀납적으로 알게 된 것은 나도 아이였을 때였다. 아이는 교사의 자의식이 원하는 안정감과 보람을 주기 위해 하향 기대치에 정확히 맞추어 줄 수 있는 연기력을 가지고 있기도 하다. 자신의 가정에 갇혀 있는 교육은 폭력이고, 가르치는 사람의 권위와 배우는 과정에서의 좌절이나 상상을 넘어서는 잠재력을 겪어 볼 기회를 빼앗는 '열린' 평준화 교육이란 그저 인간에 대한 불신이고 허울만 좋은 닫힌 억압일 뿐 방임보다 못한 반교육이다. 나는 나쁜 교사들(덕분에 대체로 사회인으로서 튼튼해졌고, 공의에 대한 성숙한 의식을 기르게 되었다.)보다 '좋은' 교사들(때문에 물론 미처 처리해 놓지 못한 내 탓이지만 늦깍이 대학원생의 논문 지도에 환장하게 육아와 치료의 차원이 끼어들게 되었다. 문학의 힘을 겪었다.)로부터 깊은 상처를 입었다고 기억한다.
이런 거 듣고 있을 시간이 없는데, 피곤해서 집중을 못 한다.
cf.
이오덕 (1977) 일하는 아이들
Gerry Bevers@blogger: Is the Chinese character 的 (적) destroying the Korean language?
[한국민족문화 대백과사전] 이오덕(李五德, 1925-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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