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역 송태욱 (2013) 풀베개
86쪽
그들의 즐거움은 사물에 집착하는 것이 아니다. 동화하여 그 사물이 되는 것이다. 온전히 그 사물이 되었을 때 나를 수립할 여지는 망망한 대지를 다 뒤져도 발견할 수 없다.
88쪽
보통의 동화에는 자극이 있다. 자극이 있어야 유쾌할 것이다. 나의 동화는, 무엇과 동화했는지 분명하지 않으니 추호의 자극도 없다. 자극이 없으니 오묘하고 형용하기 어려운 즐거움이 있다. 바람에 이리저리 밀려 건성으로 물결을 일으키는 경박하고 소란스러운 정취와는 다르다. 눈에 보이지 않는 아주 깊은 곳을 대륙에서 대륙까지 움직이고 있는 깊고 드넓은 바다인 창해의 모습이라 형용할 수 있다. 그저 그 정도로 활력이 없을 따름이다. 하지만 오히려 거기에 행복이 있다. 위대한 활력의 발현에는 이 활력이 언젠가 다하고 말 것이라는 걱정이 깃들어 있다. 평소의 모습에는 그런 걱정이 따르지 않는다. 평소부터 아련한 내 마음의 지금 상태는, 나의 격렬한 힘이 소진되지 않을까 하는 근심을 벗어났을 뿐만 아니라 평소 좋지도 않고 나쁘지도 않은 평범한 마음의 경지도 벗어나 있다. 아련하다는 것은 단지 포착하기 힘들다는 의미일 뿐, 너무 약하다는 염려는 담고 있지 않다. 충융이라든가 담탕이라는 시인의 말은 이 경지를 가장 절실하고도 충분히 말한 것이리라. 이 모습을 그림으로 그러보면 어떨까, 하고 생각했다. 하지만 보통의 그림이 되지 않을 건 뻔하다. ++
90쪽
보통의 그림은 느낌이 없어도 물체만 있으면 된다. 제2의 그림은 물체와 느낌이 양립하면 된다. 제3의 그림에 이르면 존재하는 것은 오직 마음뿐이기 때문에 그림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반드시 이 마음에 적합한 대상을 찾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런데 이 대상은 쉽게 나오지 않는다. 나온다고 해도 쉬이 완성되지 않는다. 완성된다고 해도 자연계에 존재한 것과는 정취가 완전히 달라지는 경우가 있다. 따라서 보통 사람이 보면 그림처럼 보이지 않는다. ++
138쪽
하지만 인간을 떠나지 않고 인간 이상의 영원이라는 느낌을 내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연민은 신이 모르는 정이고, 게다가 신에게 가장 가까운 인간의 정이다.
182쪽
기차만큼 개성을 경멸하는 것은 없다.문명은 가능한 모든 수단을 동원하여 개성을 발달시킨 후 가능한 모든 방법으로 그 개성을 짓밟으려고 한다.
2017.10 초독
탐독. 그런데 나의 첫 소세키가 풀베개라니... 계획도 생각도 없이 하게 되는 짓이란 알고 보면 대개 신의 등떠밈이라는 걸 또 실감할 수밖에 없는 걸까. 고마울 때고 있고 든든할 때도 있지만 이번엔 좀 소름이 끼쳤다.
아마 오늘 즈음, 지금 즈음 전화해서 등등을 읽어 드렸을 텐데. 주말이니까 만났다면 가지고 나갔을 거고. 동경화랑에서 연락이 왔다. 내 초능력으로는 십 년 뒤 즈음일 거라 느꼈었는데... 그들의 '근대의 초극'을 완전히 이해하는 것이 이제는 가능하다고 여겨진다. 지도는 머릿속에 그려지지 않은 채로 그리기 시작하는 것임을 다시 깨닫는다. 목록이 채워지는 속도가 확실히 빨라졌다.
한국은 여태까지도 메를로퐁티와 라깡, 옥터버 필진들의 문제의식을 학습하느라 바쁘다. 점점 더 길어지는 절망 속에서 더 이상 고민의 여지가 점점 더 사라진다. 그래서 점점 더 편해진다.
영문학을 전공하고 최고 실세의 국회의원의 장녀와 결혼한 다음 국가의 지원을 받아 떠난 유학을 중단하고 돌아와 교수가 되었다가 사직하고 (아사히의 제안을 거절하며) 요미우리에 입사했다가 그마저 관두고 칩거에 들어가 아내의 자살 시도와 이혼의 위기를 방관하고 있던 중의 소세키의 분열의 고통에서 우러난 긍정의 힘, 갈등하지 않고 싸우지 않기를 포기하게 된 결말이 가져다 준 모순적인 평온감이 풀잎에서 배어 나와 묻어 난 녹색처럼 신선하고 불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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