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aturday, February 17, 2018

1987 (장준환 Joon-Hwan Jang, 2017)

1987 (1987: When the Day Comes)
장준환 (Joon-Hwan Jang, 2017)

(kMDb는 왜 갈수록 부실해지는 거지?)


어머니: 우리 종철이 손 한번만 잡게 해 주이소. 지금 아니면 못 잡아 본다 아닙니꺼?
보이소. 한번만 만지게 해 주이소. 한번만 만지게 해 주이소. 한번만.

아버지: 종철아, 왜 못 가노? 내 새끼, 왜 못 가고 있노?
종철아, 잘 가라. 아이고, 인석아, 잘 가그레이. 아부지는 아무 할 말이 없데이.





연희: 그런다고 세상이 바뀌어요? 왜 그렇게 다들 잘났어? 가족들 생각은 안 해요?
그 날 같은 거 안 와요. 꿈꾸지 말고 정신 차리세요.

한열: 나도 그러고 싶은데. 그게 잘 안 돼. 마음이 너무 아파서...



2018-02-17 흙의 새벽@내 방

하지만 역사가 반전. 이 해 12월 노태우 당선.
그리고 반전에 반전. 2012년 박근혜 당선.

1987년에 나는 1987의 사실들을 전혀 알지 못했다. 폭력을 써서 권력을 휘두르는 것이 만약 맞다면 아무리 좋은 이유가 있다 해도 그 방식이 잘못되었다는 확신만이 있었을 뿐이었는데, 아이들 앞에서 쉬쉬하는 부모님 아래에서 아직 한자어가 많았던 신문을 읽기 어려웠던 나로서는 그 전제를 확인할 수가 없었다. 내 기억으로는 당시 TV 뉴스 보도는 데모 사실과 그로 인한 교통혼잡 등을 단신으로 단순 보도했을 뿐이었고, 오히려 그 전에 이사 오기 전 단독주택에 살던 유치원도 다니기 전의 더 어린 시절에, 데모한다는 사람들은 두건을 매거나 깃발만 흔들고 있고 그것을 통제해 준다는 든든한 군경 아저씨들은 무장을 하고 있는 영상 보도를 같은 뉴스에서 본 적이 있었다. (그러고 보니, 언론이 점점 악화되어 가는 과정을 자라면서 자연히 목격하게 되었던 것인가.) 말로는 나쁜 사람들을 착한 어른들이 막아 준다고 하는데, 바보가 아닌 이상 눈에는 전혀 다르게 비칠 수밖에 없지 않은가. '강자가 약자에 맞서 우리를 지켜준다니 뭔 말이야'인 것이다. 또는 적어도 '어차피 깨질 수밖에 없는 걸 눈앞에 뻔히 보면서도 멈추지 않고 저렇게 목숨 걸고 덤빈다면 그만한 이유가 있겠구나'는 생각이 들 수밖에 없다. (지금 생각하니, 그게 나름 교활하게 편집한 것이었을 텐데 네댓 살 아이에게도 안 먹혔으니 이게 바로 영상이 가진 진실의 힘이라고 할 수 있겠다.) 알아듣는 단어도 얼마 없었던 나이에 본 충격적인 영상이라 잊지 못하고 있었다. 그런데도 데모의 내용이나 이유는 어떻게 그렇게 수 년간 한결같이 말하지 않는지 그게 너무 소름끼쳤다. (그래서 나는 아주 어려서부터 기자라는 직업이나 방송국에 대해 부정적인 감정을 가지게 되었다. 조금 더 커서 좋아하게 된 외국의 문학가들이 기자로 활동했었던 경우가 많아서 그걸 알 때마다 기분이 묘해지곤 했던 것도 그 탓이다.) 

다만, 이미 초등3년생이던 나는 그 여름 아파트 단지를 도배했던 "보통사람" 포스터와 TV 광고를 기억한다. 그 해의 신흥 유행어 중 하나가 "자기피알"이었다. 그리고 내게는 그 대표적인 사례가 바로 "보통사람"이라는 인식이 있었다. 그래서 내게 자기피알이란 처음부터 부정적인 단어로 다가왔다. 약간의 과장이나 꾸밈 정도가 아니라 정직할 수 없게 된 자의 공적이고 전략적인 사기. 패권주의의 손쉬운 물량공세. 하지만 나는 그 사례가 '성공'사례가 될 줄은 꿈에도 알지 못했다. 돈만 날리고 있다는 생각에 미리 안쓰러운 마음까지 가지고 있었다. (나는 노 장군이 자기 선배들의 부당한 폭거에 얼마나 협력했었는지 별로 협력한 것은 없는데 다만 어떤 식으로든 잘 보인 것인지 알 수가 없었기 때문에 그 사람 자체를 특별히 나쁘게 본 것은 아니었고, 다만 욕심에 눈이 멀어 옳지 못한 길을 선택하는 어리석은 사람이라는 점은 분명하다고 생각했다.) 어림도 없다고 철석같이 믿었던 터라 그 대선 결과에 대한 충격은 평생 남았다. 이후로 늘 나 자신의 현실인식 능력, 판단력을 의심하며 살게 되었다. 내가 속한 사회, 또는 사회라는 것 일반에 대한 근본적인 신뢰를 만 아홉 살에 이미 잃어 버렸던 것이다. 자세히는, '투표권'과 미성년에 대한 '규정'에 문제의식을 갖게 된 것도 이때부터였고, 그것은 이후에 미성년자보호법, 청소년보호법에 대한 비판의식으로 이어졌다. 뭐, 미성년자일 때 미성년자보호법의 전제와 근거들을 아무리 고민해 보았자 고민한다는 것을 어른들이 알게 되어 무슨 피해를 당할까 싶어 숨기기에만 급급했던 무력한 십대였고, 대학생과 대학원생일 때 청소년보호법에 아무리 관심을 가져 봐야 기사와 토론을 열심히 찾아 읽고 보는 것 이외에 무슨 작은 일이라도 할 수 있는 게 있는지 몰랐던 무지한 이십대였지만.

1991년 또는 92년, 중학교 수업 시간에 어느 교사가 (담당 교과 내용과 직접 관련이 없었기에) 칠판 구석에 하얀 분필로 잠시 갈겨 적었다가 지웠던 "PR = Public Relations"이라는 글씨. 그 이미지까지 내 뇌리에 박혀 있는 것은 바로 1987년의 대선 결과에 대한 충격과 연결되어 있다. 특별히 그 교사만이 아니라 "자기피알의 시대"라는 당시의 분위기와 맞물려 학교에서는 더 이상 겸손과 양보가 아니라 발표력과 수업 중 질문하기를 강조했다. (물론 말로만이었지만.) 아무튼 기억이 생생하게 남은 것은 그 교사가 알려주기 전까지 "피알"이 무엇의 약자인지 모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실은 한자어가 아닐까 했었더랬다. "자기"가 한자어니까. 당시의 정규교과과정에 비해서는 영어를 잘하는 편이었던 나는 일상어가 된지 오래된 단어인데도 모르고 있었다는 것에 분한 마음이 조금 들기도 했었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단어의 뜻과 의미가 연결되지 않아 너무 의아했다. 집에 오자마자 평소 보는 중형 사전이 아니라 대형 영한사전을 찾아서 relation과 public의 어의 목록에서 중간 정도부터 끝까지를 살펴보았지만 의문은 해결되지 않았고, 다만 꽤 오래된 사전인데도 Public relations이 ('공보, (대외) 홍보'라고) 등록되어 있었기 때문에 영어권에서는 우리만큼 신조어가 아니라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리고 고등2년 때 당시 연세대 송자 총장의, 기부금과 대기업 지원금을 강조한 '대학 경영' 개념에 호의적이었던 언론 기사들을 접하고 먼저 부정적인 선입견을 가지게 되는 것으로 이어지기도 했다. (자연히 지원대학 선택에 영향을 받았다.) 건너뛰어 지금은, 일례로 1인미디어와 TED 등을 좋아하기는 하지만 그러한 흐름을 무조건 긍정적인 것으로 신봉하지는 않는다. 나서지 않는 사람들도 있으니까. 나서지 않을 권리도 있다고 생각하니까. 처음부터 나에게는 정치, 자본, 경영/관리, 언론, 폭력, 차별, 인권의 문제들이 개별화되거나 독립적으로 개념화되지 않고 개인적이고 감정적인 체험들을 포함하여 지극히 혼종되어 있는 것이다.

무엇보다 '민주주의' 그리고 대중, 인민, 민중, 요즘에는 주로 시민이라고 부르는 것에 대한 나의 상충하는 복잡다단한 감정들은 개념적으로 배운 바에 의한 것이 아니라 개인적인 삶을 통해 경험으로 남은 인상들에 의한 것이다. 그 처음이 1987년에 시작되었다. 당시에 나는 제대로 아는 사실이 하나도 없었다. 단지 이 땅에서 살고 있었기 때문에 나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그때 시작되었던 것일 뿐이다. (인문학을 전공하게 되면서 인문학 박사들이 '민주주의'를 '문제'로서 설명할 때 소크라테스의 재판이라는 역사적 사건을 내세우는 것을 많이 보았다. 적어도 나보다 십 년은 먼저 이 땅에서 살고 있었던 그들이, 1987년에 바로 대학생이었거나 대학원생이었던 그들이, 2012년에는 대부분 자식을 키우고 있었던 그들이 말이다. 그들의 정신상태를 이해할 수 없다. '역사적으로' 앞서는 사건이라거나 기록상 최초라거나 서구 학계에서 스테디셀러인 주제임을 알 필요가 있다는 등의 이유로 시작으로 들 수는 있겠는데, 그러니까 그것이 우리에게는 그저 수입된 문제의식이라는 전제를 깔고 미지의 논제를 소개하여 계몽해 주겠다는 식의 태도가 황당하게 느껴진다. 우리는 아직 미개해서 여전히 '민주주의'라는 과제를 목표로 나아가기에 급급하니 그 자체에 대한 의심과 문제제기를 할 여력이 없다라는 투로 제 혼자 자조적이고 더 많이 아는 자기가 이해하며 기다려 주겠다는 어조는 대체 북치고 장구치고 뭐하자는 짓인가? 보통/직접 선거보다 배심제 재판이 '민주주의'를 더 잘 특화한다고 생각하는 것일까? 얼마 전에 직접 체험한 사건보다 책 속의 남의 이야기가 더 와닿는다고 여기는 것일까? 친구들이 최루탄을 맞을 때 도서관으로 향하고 골목길에서 쫓길 때 유학행 비행기에 올랐던 이들이라서 그런가? 그것 자체로 비난받을 일은 아니라고 생각하는데, 그들 스스로가 거기에 얽매여 있는 듯한 느낌이 든다. 일관되고 과도한 무시는 무시가 아니라 반대로 집착이니까. 게다가 그것은 본인들만의 증상임을 모르는 듯하다. 근혜식 유체이탈 시전인가? 이 땅에 살고 있었을 뿐인 모두 중 그들만 그러한 특정기억상실증인 건데. 내가 내부비판 기질이 강한 편이라고는 하지만, 예술계에 속해 있을 때에도 자연계에 속해 있을 때에도 그 사실 자체가 수치로 다가온 적은 없었는데, 인문학을 전공으로 학습하기 시작하자마자 학습 내용과는 별개로 너무 많은 것들이 창피하다.)

2016년, 나는 광장을 믿지 않았다. 부끄럽지만 사실이다. 믿지 못하는 와중에서 나는 나의 불신을 부끄러워하게 될 날이 오기를 바라고는 있었다. 그것 역시 사실이다. 이제와서 부끄러운 것이 아니라 그때 이미 부끄러워지기를 바랐다면서 왜 믿지 못했느냐 하면, 나는 2002년에 광장에 있었기 때문이라고, 할 말이 있기는 하다. 새벽부터 캠프에 나가 이 거리 저 거리에서 자정까지 외쳤기 때문이다. 어디에든 정식으로 등록한 적이 없어서 기록상 증명되지는 않지만, 대한민국의 16대 대선을 앞둔 몇 달 동안 나는 무명의 개인으로서 나름대로 최선을 다했다. 살면서 최선을 다했다고 말할 수 있는 일이 별로 없기에 더욱 특별한 경험이다. 2016년에 내가 '그 날은 오지 않는다'고 생각했던 까닭이 그 특별한 경험과 그 이후의 더더욱 잊지 못할 일들에 있었다고 한다면, 2002년에 거리의 광장과 인터넷의 광장에 나섰던 사람들만은 이해해 줄 것이다.

스스로 박탈했던 발언권을 되돌려 주기까지, 상처받을 자격조차  없다고 생각했던 내가 상처받았다고 느끼게 되기까지, 스스로를 조금은 용서해 주기까지, 그리고 무엇보다도 나만 상처받은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인식이 아니라 인지하게 되기까지, 그리고 실은 내가 받은 상처는 그 일로 상처받은 다른 사람들에 비해 너무나 보잘 것 없는 것이었음을 깨닫게 되기까지, 시간이 걸렸다. 내게 지난 2017년은 그런 시간이었다. 비로소 울었던 시간. 그리고 끝까지 마음을 놓으면 안 된다는 것을 배운 채로 아직 2018년이다. 그날까지는. 




문재인 [편집 인용]: 제 마음에 가장 울림이 컸던 대사가 "그런다고 세상이 바뀌나요?"입니다. 오늘 이 영화는 그 질문에 대한 답이라고 생각합니다. 실제로 한순간에 세상이 바뀌지 않지요. 미완으로 남게 된 6월 항쟁을 완성시켜 주는 것이 지난 겨울부터 우리가 하고 있는 촛불혁명이라고 생각합니다. 세상은 금방금방은 아니지만 긴 세월을 통해서 뚜벅뚜벅 걸어갈 때 조금씩 바뀌는 것입니다. 또 한 가지, 세상을 바꾸는 사람이 따로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함께 힘을 모을 때, 연희도 참가할 때, 그때 세상이 바뀐다고 하는 것을 이 영화가 잘 보여주는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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