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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uesday, September 06, 2022

Wagner (1843) The Flying Dutchman

Wagner: Der fliegende Holländer 
Dietrich Fischer-Dieskau (The Dutchman), Gottlob Frick Daland (Norwegian sea captain), Fritz Wunderlich (Daland’s steersman), Marianne Schech (Senta, Daland’s daughter)
Chor der Deutschen Staatsoper Berlin & Staatskapelle Berlin / Franz Konwitschny (conductor)
(P) 2013 Brilliant Classics





Der Holländer: John Lundgren / Daland: Georg Zeppenfeld / Senta: Asmik Grigorian / Erik: Eric Cutler / Mary: Marina Prudenskaya / Der Steuermann: Attilio Glaser 
Bayreuther Festspiele / Dmitri Tcherniakov 
Dramaturgie: Tatiana Werestchagina / Musikalische Leitung: Oksana Lyniv 
Bayreuther Festspiele 2021
2021-07-25 Bayreuther Festspielhaus



Richard Wagner (1843) Der fliegende Holländer (The Flying Dutchman), WWV 63 

based on Heinrich Heine (1833) Der fliegende Holländer


cf. 정준극@다음: '방랑하는 유태인'

https://en.wikipedia.org/wiki/Ahasuerus 

https://en.wikipedia.org/wiki/Gesamtkunstwerk


Rudolf Steiner: 오늘날 사람들은 그것을 단순한 전설로 느끼지만 그것을 쓴 사람과 그것을 신비주의적으로 이해할 줄 아는 사람에게는 그것이 정신적 실체의 표현인 것입니다. 우리가 기억하는 하나의 전설은 중세시대의 서사시로 전해진 것으로 끔찍한 병을 앓던 가여운 하인리히를 상기시킵니다. 거기서 우리가 듣는 것은 가여운 하인리히의 병을 치료할 수 있는 방법은 순수한 여인이 희생하는 것뿐입니다. 순수한 여인의 영혼으로부터 나온 사랑은 다른 인간의 삶에 무언가 실질적인 의미가 있습니다. 물질주의적 사고로는 전혀 상상할 수 없는 것으로, 영혼과 영혼이 서로를 위할 수 있는 것은 온전히 정신적인 영역에 있습니다. 이러한 것이 전설의 배후에 있는 것입니다. 가여운 하인리히를 위한 이 처녀의 희생은 인류를 위해 십자가에 자신을 바친 구세주가 아닐까요? 그것은 영혼에서 영혼에 미치는 신비한 정신적 영향이 아닐까요? 우리는 이렇게 외형적인 것 배후에 존재하는 것을 봅니다. 그렇게 의식은 이러한 정신이 존재한다는 것을 예감하듯 믿습니다. 그래서 바그너는 방황하는 네덜란드인의 전설에서 물질적인 것에 엮여 거기에 휩쓸리고 그 물질로부터 해방될 수 있는 남자를 등장시킵니다. [...] 

물질에 빠진다는 말이 무엇을 의미할까요? 물질에 빠지게 되는 사람은 동일한 외형적 삶을 영원히 반복합니다. 정신은 올라가는 반면 물질은 반복된다는 것을 통해 물질적, 정신적 해석을 구별합니다. 정신이 물질에 빠져드는 순간에 그는 늘 같은 반복 속에 빠져듭니다. 그렇게 방황하는 네덜란드인이 됩니다. 고대에는 다양한 민족들이 늘 낯선 나라들에 알려진 것들을 이용해 자신들의 사고를 고양시켰습니다. 그것을 이룰 수 있었던 사람들은 바다를 건너 외국 해안으로의 항해를 오직 인류의 완성을 위한 수단으로 숙고했었습니다. 완성을 향한 사고, 즉 정신의 흐름을 감지하지 못했던 자는 물질에만, 재료의 부분으로서 물질의 동일성에 갇힙니다. 물질만을 추구하는 성향의 방황하는 네덜란드인은 발전하는 능력과 멀어지고, 완성과 발전과 상승을 위한 수단인 사랑으로부터 멀어지게 됩니다. 그래서 그는 물질 속으로, 재료 속으로 자기를 밀어 넣고 영원히 똑같은 것을 반복해야만 합니다. 높은 상승에 이를 수 없고 이해할 수 없는 인간들은 순수한 존재에 의해 다루어져야 합니다. 순수한 사랑으로 가득 찬 그 존재는 방황하는 네덜란드인을 구원할 수 있습니다. 

아직 물질에 빠지지 않은 영혼이 물질에 빠진 영혼과 관계를 맺습니다. 바그너는 그것을 알아차리고 그의 극에서 매우 의미 있는 방식으로 표현합니다. 이것은 진실에 대한 신비주의적 느낌이었고, 물질적 공동체의 배후에 있는 정신적 공동체에 대한 느낌이었습니다. 정말로 이런 것을 느꼈던 자는 높은 정신적 사명을 수행할 자격이 있었습니다. 바그너가 그러했습니다. 그는 자신의 음악과 극에 대해 사람들이 예상하는 것과는 완전히 다른 영역으로 생각의 날개를 돌릴 수 있었습니다. 그는 자기 방식으로 조화로운 예술 작품을 상연했던 고대 그리스 시대를 되돌아보았습니다. 그때는 극이 완성도 있게 표현할 수 없었던 것을 음악으로 표현하고 영원한 세계의 법칙들을 춤의 리듬으로 표현하면서 예술이 통합된 방식으로 존재했습니다. 그는 아득히 먼 고대의 극적이고 음악적인 예술 작품 속에서 여전히 춤과 리듬과 화음이 협업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에게 그것은 음악의 본질에 관한 독특한 견해로 부활했습니다. 바그너는 음들의 조화 속에서 음악의 본질을 보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자매 예술들이 그 안에 지니고 있는 것을 조화를 위해 내놓을 때만 자매 예술들에서 음악의 화음으로 이어질 수 있다고 했습니다. 그 자매 예술 중 하나가 춤입니다. 나중에 인류가 이해하는 그런 춤이 아니라 자연의 움직임과 별의 움직임을 춤의 형태로 표현한 것을 말합니다. 고대의 춤이 그랬습니다. 고대의 춤은 자연의 법칙에 대한 느낌으로부터 생겨난 자연의 움직임을 모방하는 것이었습니다. 이 춤이 지닌 리듬의 본질이 음악의 화음으로 들어갔고 음악의 화음에 리듬을 부여했습니다. 그리고 또 다른 자매 예술이 나타났는데 그것이 시입니다. 그것은 단어로만 표현할 수 있었고, 단어로 표현할 수 없는 것들은 자매 예술들이 표현해야 했습니다. 이렇게 춤, 음악, 문학은 조화롭게 어우러졌고 음악은 화성, 리듬, 선율, 이 세 개가 한 쌍을 이루었습니다. 그것은 자매 예술들이 상호작용한 결과입니다. [...] 

리하르트 바그너의 영혼 앞에 두 정신이 서 있었습니다. 그 영혼은 예술들의 일면성들을 함께 작용하게 하려 했습니다. 음악의 일면성과 극의 일면성을 베토벤과 셰익스피어가 보여주었습니다. 바그너에게 셰익스피어는 일면적인 극작가였습니다. 그 이유는 바그너에게는 그가 깊은 내면을 관찰했을 때 눈으로 볼 수 없는 느낌과 감정의 모든 단계를 몸짓과 말만으로는 표혀할 수 없다는 것이 분명했기 때문입니다. 본질을 다룰 때 그 느낌의 단계를 언어로 된 극에서는 표현할 수 없다늑 것입니다. 극의 언어는 공간과 시간 속에 이미 내적 동기가 진행되고 그 후의 행위를 표현합니다. 극이 진행되면 우리는 인물이 이미 동기를 경험했다고 추론합니다. 우리는 인물의 내면에서 일어나는 극적 감흥이 눈으로 보고 귀로 들을 수 있는 것을 바뀐 것을 보게 됩니다. 따라서 극작가는 무대에서 외적으로 보이는 것에 대한 깊은 감정과 느낌에 대해서는 입을 다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바그너에게 또 다른 일면적인 예술가는 교향곡 작곡가, 오전히 연주만 하는 연주자들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연주하는 멋진 음의 연결에서 영혼 안에서 일어나는 내적인 극적 감흥을 표현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몸짓 없이 내부에 남아 공간과 시간이라는 외부로 흘러 나가지 않습니다. 그는 한편으로는 이렇게 음악 예술을, 인간의 내적인 표현을 외적으로 표출하고 싶으나 그러지 못하는 무력함을 봅니다.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는 극예술을, 음악 예술과 연결되지 않고도 내적 동기가 공간과 시간에 표현되는 것을 봅니다. 

[...] 베토벤의 9번 교향곡에서 그는 일면적인 예술 형식이 스스로 벗어나고 싶어 하는 것을 봅니다. 그는 9번 교향곡에서 마치 덮개가 열리는 것을 봅니다. 마치 말로 표현되듯 그 교향곡은 인류 전체를 사랑으로 품기 위해 전 세계로 퍼져 나가기 때문입니다. 거기서 그는 공간과 시간으로 나가려고 하는 것을 봅니다. 그리고 공간과 시간 속으로 더 나아가게 하는 것을 자신의 숙명으로 여깁니다. 9번 교향곡처럼 느낌이 표현되게 하거나 영혼의 내적인 극적 감흥이 흘러 나가게 하는 것뿐만이 아니라, 그는 말과 외적인 행동 속에서도 그런 일이 일어나길 바랍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무대 위에서 두 가지를 볼 수 있도록 말입니다. 음악에서 느낌들이 내적으로 일어나는 단계를, 그리고 극에서는 -- 그것이 공간과 시간으로 나가는 것이기 때문에 -- 그것이 외적인 행동으로 만들어지는 것을 보게 하는 것입니다. 셰익스피어와 베토벤을 높은 경지에서 통합시키는 것, 그는 이것을 원한 것입니다. 그는 인간 전체를 나타내기를 원했습니다. 

무대 위에서의 행위를 볼 때 우리는 단지 보고 들을 수 있는 것만이 아니라 인간이라는 존재의 가장 내적인 욕구도 듣고 싶어 합니다. 그런 부분에 있어서 바그너에게는 옛 오페라 역시 충분치 못합니다. 시인과 음악가가 각각 독립적으로 따로 존재했기 때문입니다. 시인은 자기가 표현할 수 있는 것을 표현했고 그 시를 표현하기 위해 음악가가 따라왔습니다. 시가 표현하지 못하는 것을 표현하기 위해 음악이 있었습니다. 인간이라는 존재는 외부로 표현될 수 없는 내면과 언어극으로 표현될 수는 있어도 내적 욕망에 대해서는 침묵하는 외면으로 구성됩니다. 그래서 음악이 시를 설명하는 것이 아니어야 시가 완성됩니다. 음악은 시가 표현할 수 없는 것을 표현해야 합니다. 

이것이 리하르트 바그너의 위대한 생각입니다. 그는 이렇게 창조하길 원하고, 종합 예술 작품 안에서 음악과 시의 이타적인 상호작용을 위해 자신의 사명을 수행합니다. 우리는 그의 이 기본 사상이 신비주의적 토대에서 비롯된 것임을 볼 수 있습니다. 그 토대란 인간의 외형뿐만이 아니라 내부로 뚫고 들어가 인간 전체를 이해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 김현경 옮김(2021:189-195) 



취향이 브람스 쪽이라 좋아하지 않아서 그런지 읽기도 힘드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