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해철 (1991) 나에게 쓰는 편지
1999년 monocrom 콘서트
난 잃어버린 나를 만나고 싶어
모두 잠든 후에 나에게 편지를 쓰네
내 마음 깊이 초라한 모습으로
힘없이 서있는 나를 안아주고 싶어
난 약해질 때마다 나에게 말을 하지
넌 아직도 너의 길을 두려워하고 있니
나의 대답은... 이젠 아냐
언제부턴가 세상은 점점 빨리 변해만 가네
나의 마음도 조급해지지만
우리가 찾는 소중함들은 항상 변하지 않아
가까운 곳에서 우릴 기다릴 뿐
이제 나의 친구들은 더 이상 우리가 사랑했던
동화 속의 주인공들을 이야기하지 않는다
고흐의 불꽃같은 삶도 니체의 상처입은 분노도
스스로의 현실엔 더 이상 도움될 것이 없다 말한다
전망 좋은 직장과 가족 안에서의 안정과
은행구좌의 잔고 액수가 모든 가치의 척도인가
돈, 큰 집, 빠른 차, 여자, 명성, 사회적 지위
그런 것들에 과연 우리의 행복이 있을까
나만 혼자 뒤떨어져 다른 곳으로 가는 걸까
가끔씩은 불안한 맘도 없진 않지만
걱정스런 눈빛으로 날 바라보는 친구여
우린 결국 같은 곳으로 가고 있는데
때로는 내 마음을 남에겐 감춰왔지
난 슬플 땐 그냥 맘껏 소리내 울고 싶어
나는 조금도 강하지 않아
언제부턴가 세상은 점점 빨리 변해만 가네
나의 마음도 조급해지지만
우리가 찾는 소중함들은 항상 변하지 않아
가까운 곳에서 우릴 기다릴 뿐
신해철: 더 이상 버틸 힘이 없고 일어설 힘이 없고 세상이 다 끝났다고 생각될 때, 저는 항상 거울을 보거든요. 여러분도 거울을 보면, 여러분 스스로를 믿는 단 한 사람, 마지막 한 사람이 그 안에 있습니다. 여러분들 자기 자신. 끝까지 여러분 자신을 믿으세요.
마왕: 삶의 목적? 그런 거 없고. 태어난 것으로 목적은 이미 달성, 임무 완수. 그럼 남은 시간은? (본 게임 이기고, 또는 이겨서 하는) 보너스 게임! 미래, 내일의 행복 말고, 오늘, 지금 행복하기. (이 말로 인한 어떠한 후유증 및 피해 발생 시 일절 책임지지 않음. 판단은 각자 알아서.)
마왕, 요즘 나 고스 듣던 때만큼 다시 힘들어. 십 년이 지났는데 뭔가 제자리로 되돌아온 것 같아 내가 한심해. 그래도 그때는 나한테 욕심 부리던 것들이 많았는데, 지금은 꽤 겸손해졌지만. 포기하는 법을 결국 배워 버린 것 같아서 좀 슬퍼. 마왕이 전에 "힘들 때 듣는 음악이 뭐냐"는 질문을 받고 사람이 정말 너무 힘들 때는 음악 들을 힘도 없지 않냐고, 음악이 너무 좋아서 직업으로 하게 된 사람이지만 당장 죽겠을 때에는 아무리 아름다운 음악이라도 들리지 않는다고 말했던 게 생각나네. 그 말을 듣던 때에는 '아, 그렇구나' 했었는데, 그 사이에 나도 같은 경험을 했어. 그러니까 지금 힘들다고 말했지만, 아주 힘들지는 않다는 소리야. 딱 마왕이 너무 그리운 정도라고나 할까. 이렇게 타이핑을 하면서도 읽어 주는 마왕의 낮은 목소리가, 의외로 교과서적인 끊어 읽기 타이밍과 특별히 신경쓰지 않는 한 그게 느껴지지 않았던 너무 자연스러운 억양이 자동 재생된다. ㅋㅋ 난 사연을 보냈던 적은 없지만. 대강은 뭐라고 말해 줄지 하도 많이 들어서 이미 알고 있어서... 굳이 다 적진 않겠어.
그런데, 나는 마왕이 말했던 '스스로 정한 선 긋기'를 이미 여러 번 했어. 서로 다른 선들을 다시 긋기를 몇 번이나 했어. 결국 어쨌든지간에 내가 스스로 그은 선에 다다랐을 때 애초에 정한 대로 하지 않고 그 선을 다시 지우고 다시 더 뒤에, 색을 바꿔서 긋곤 했네. 마왕이 알면 한심해 할 것 같기도 하고 화낼 것 같기도 하고, 반대로, 원래 그렇게 할 수밖에 없다고 할 것 같기도 하고, 뭐라고 할지 잘 모르겠다. 그렇게나 많은 말들을 해 줬는데도 매번 또 뭐라고 할지 잘 모르겠어서 늘 고스를 못 떠났던 것 같아. 그땐 내가 지금보다 훨씬 더 자존심이 셌어서 '찌질함'에 대한 긍정을 배우는 데 저항감이 있었는데, 요즘의 날 보면 찌질함의 극치를 이루었다고나 할까. 내가 나의 길을 가고 있을 때에도 사람들은 내게 길을 잃었으니 빨리 길을 찾으라고 또는 정신차리고 돌아오라고 했지. 내가 걸음을 멈춘 지금 사람들은 그것 보라며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거나 맘씨 좋은 사람은 이제라도 돌아오라고 말한다. 난 내가 인정받을 만한 무언가를 했다고 생각하진 않지만, 애초에 그걸 목적으로 한 적이 없어서 그런가... 그렇다고 내가 한 모든 일들이 마치 전혀 없었던 일들처럼 부인되는 것은 망연스러워. 마왕이 말했던 '전략'이라는 걸 나는 너무 전혀 세울 줄 몰랐던 것 같아. 나는 전략이 중요하지 않다거나 정당하지 않다고 생각한 적은 없고, 내가 전략을 세울 단계에 아직 이르지 못했다고 생각해서 오히려 더욱 안달하며 달려 왔었거든. 그런데 달리면 달릴수록 그 단계라는 것에서 점점 더 멀어지는 것 같아, 나는 앞으로 가는데 마치 뒤로 가는 것과 같아지는 기분이야. 뭐가 잘못된 건지 모르겠어. 언젠가 지금은 지인 정도도 못 되지만 당시에는 친구였던 누군가가 "우린 그만 익어도 돼. 너무 익으려고만 해. 남들은 너무 맺으려고만 하는데. 우리도 이제 열매를 맺자, 좀." 했던 말을 다시 생각해.
높이와 넓이가 고정되어 있는 견고한 성으로 들어가는 길로는 가고 싶지 않은 것, 그것 때문에 이미 들어선 길에서 자꾸만 벗어나게 되는 것. 여기까지 오기도 너무 힘들었는데, 주변에 시야에 들어오는 사람들의 숫자도 점점 줄다가 이제는 정말 한 사람도 보이지 않는데, 거기에서 또 멀어지는 길로 방향을 트는 것. 몰랐던 것들을 알게 되는 속도보다 새로운 문제 거리가 더 빠른 속도로 늘어가는 것, 그만 그쯤은 덮어두지 못하는 것,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일보다 당장 할 수 없지만 할 수 있을지도 모를 일들에 끌려 들어가는 것. 세상에 성과를 보이는 데 너무 관심을 두지 않고 신의 기억 속에서만 흔적을 남기면서 어차피 혼자서 가는 길이라고 여기는 것. 이런 것들이 잘못이었나. 너무 당연한 걸 나는 지금에야 묻고 있는 건가. 그노무 가치관이 뭐라고 내가 무슨 사상가도 아니고 선도자도 아닌데 사정은 궁색하기 그지 없는 주제에 최근 4-5년간 너무나 많은 거절을 했던 게 잘못이었을까. 착각해서 또는 자만해서 쉽게 결정했던 적은 없었는데. 그래도 다시 생각해 보아도 후회도 하지 못하는 난 여전히 구름 위에서 배가 불렀을까.
난 그냥... 세상에 너무 아름다운 게 많아서... 바닷가에서 조개껍질하고 깨져 닳은 유리 조각들을 주우며 시간 가는 줄을 모르던 때와 똑같이 홀려서... 남에게 해롭지 않은 작은 소망들을 가지고 내가 좋아하는 일들을 좋아하는 만큼 자연히 열심이 나서 하면 다 될 줄 알았나 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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