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해자가 피해자로 가장하는 것은 폭력의 속성 같은 특권인가. 최선의 굳히기 기술, 확인 사살, 완전 범죄로 기록해 주어야 하나. 처음부터 자기 도마 위의 포획물일 뿐인 상대 사람과 나머지 사람들을 속이는 경우에는 대책을 마련할 여지라도 있다. 흔치는 않아도 관용이 기회를 준비해 놓을 가치가 있을 수도 있다. 그런데 그것이 미력한 양심과 교활한 자기정체성 사이를 효율적으로 조정하려는 연극인 경우, 동원되지 않으려면 최대한 멀리 피하는 것 말고는 방법이 없다. 속도가 중요하다. 주위 사람들이 기꺼이 동조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처음 일어난 폭력과 갈취의 장소로부터 무대의 크기가 폭발적으로 넓어진다. 그 기술을 인간들로부터 가장 잘 배운 견종이 말티즈라고 한다. 그만큼 더 사랑받기 때문에 그렇게 진화했다고.
공범자가 자신을 피해자로 인식하는 초월적 능력도 있다. 우주의 중심은 나라며. 이제 폭력은 더이상 은밀하면 더 맛있어지는 일회적 사건이 아니라 지속적이며 합리적인 체계로서 당당히 빛을 받으며 작동하게 된다. 빨리 인식하고 예상 손익을 적절히 파악하여 유연하게 다양한 방식으로 기여해야 할 몫이 사회 또는 처신이라는 이름으로 주어진다. 관건은 다친 사람이 있느냐 뺏긴 사람이 있느냐다. 그런 종류의 연극을 거부하는 사람을 살면서 한 명밖에 만나지 못했다. 친했지만 사별한 지 오래다. 나머지는 만나지 못한/못할 이들이다. 그래서 멀리서 흔적이나마 건재함을 확인하지 못하면 살기가 힘들어지곤 한다. 그래서 결국 고대의 기록을 자꾸 찾게 된다.
즉흥극에 동참하는 정도는 아니더라도 능란한 관객 역할 정도는 기꺼이 맡아 줄 사람들이야 늘 많은데, 굳이 왜 내가 봐 주어야 한다고 우기는 걸까? 가끔은 쉽지 않은 관객의 무반응과 어차피 배우일 수밖에 없는 "우리" 운명이 강제한 역할에 대한 어리석은 저항이 그만큼 더 재밌고 짜릿하니? 그런데 날 납치하려면 살인할 각오도 할 필요가 있어. 그냥은 안 되겠지.
WDR Symphony Orchestra + Jukka-Pekka Saraste
2019-06-26 Cologne Philharmonic Hall
나는 나랑 놀아야지. 자기와 놀기를 가장 쉽고 건강하게 하도록 해 주는 모든 예술가들의 은총이 망극.
No comments:
Post a Com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