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조번호: 가10-15
제조년일: 1984.8.08
1985년 국민학교에 입학했다. 어느 일요일 가족 모두 백화점에 갔는데, 어머니께서 사 주셨다. 당시 난 이게 뭐 하는 물건인지도 몰랐다. 유리 진열장 안에 몇 가지 연필깎이가 있었고 그 중 골라 보라고 하는데, 서로 디자인 스타일이 완전히 달랐다. 너무 달라서 도통 감이 오지 않았다. 엄마도 아빠도 이게 제일 예쁘다고 하셨다. 하지만 온가족이 한참을 생각하면서 상의를 했다. 동생도 같이 있었는데, 첫 아이가 학교를 다니게 된 상황이 집안의 중요한 일이었나 보다. 후에 동생은 삼각형 형태의 파란색 플라스틱 제품을 골랐다.
집으로 돌아와서 어머니께서 시범을 보이셨다. 손잡이를 돌리는 것도 재미있었지만, 새 연필이 순식간에 쓰기 좋게 깎여 나온 것을 보고서는 정말 신기했던 기억이 난다. 안쪽의 원리가 너무 궁금했다. 나는 면도칼이나 커터 등으로 연필을 깎는 법을 이미 배우기는 했었는데, 역시 엄마와 아빠한테서 그것도 몇 번씩, 실제로는 내가 연필을 깎으려고 하면 위험하다고 하시면서 대신 깎아 주셨었다. 나는 이 기차가 틀림없이 은하철도 999를 본 딴 것이라고 혼자 생각했다. 그러니까 나에게 기차란 달린다기보다는 날아가는 것이었다.
샤프를 쓰면 글씨체가 나빠진다는 말을 듣고 4학년 때까지는 되도록 연필을 쓰다가 5-6학년 때부터는 샤프를 더 많이 쓰기 시작했지만, 중학생 때까지는 숙제와 준비물 등 다음 날 학교 갈 준비를 마치면서 마지막에 하는 일이 연필들을 깎는 일이었다. 게다가 나는 대학생 때까지도 연필의 나무 느낌이 좋아서 자주 썼기 때문에 정말이지 거의 20년을 매일같이 썼다. (지금도 같은 이유로 색연필을 많이 쓴다. 주로 책이나 논문에 밑줄 치는 용도이긴 하지만.) 이만큼 손때 묻어 닳고 닳은 물건이 내게 또 있나 모르겠다. 정말이지 정령이 깃들어 있을 만하다. 이젠 은색 도금이 벗겨져서 검은 바탕이 드러난 곳이 많지만, 전체적인 색채 구성에 묻혀 보기 흉하지도 않고.
내구성, 안정성, 인체공학적 편의성, 효율성, 정확성, 디자인 등 거의 모든 면에서 일본이나 독일 제품 안 부럽게 좋다. 국내 신제품, 외국 제품, 필기구 전문 브랜드 제품, 미술/디자인 도구 전문 브랜드 제품, 자동 방식 등 학교나 친구 것으로 여러가지를 써 보았지만 성능에서 너무 차이가 난다. 다른 제품으로 깎은 것이 성에 차지 않아 집에 돌아와서 다시 깎는 일이 여러 번 있었다. 너무 날카롭지도 짧지도 않고 적절하게, 32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고장 없이 처음처럼 잘 돌아간다.
결론은... 요즘 장기간 대대적으로 방 청소 중인데, 이걸 도저히 버리지를 못 하겠다는 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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