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unday, August 09, 2009

紫藤 (자등) wisteria floribunda

내가 좋아하는 나무는 자등(紫藤)이다. 글자 그대로 보라빛 꽃이 피는 등(藤)나무이다. 등나무를 영어로는 미국의 해부학자 (Wister)의 이름을 따서 위스테리어(wisteria)라고 부른다. 여러 종이 있는데 우리나라에서 볼 수 있는 것은 참등이라고 부르는 Japanese wisteria (학명 Wisteria floribunda)이다.

출처: Kym Pokorny, The Oregonian

어릴 적 살던 집 마당에 등나무가 있었다. 넝쿨이 잘 자랄 수 있도록 버팀목도 있었다. 그 그늘은 시원하기보다 선선했지만 그만큼 반가웠고, 나는 듯 아닌 듯한 향은 바람에 실려서야 느낄 수 있었지만 그 아련함이 무색하도록 강렬하게 스쳤다. 기둥이랄 것을 찾아볼 수 없는 덩쿨나무라 나는 그것이 나무인지도 몰랐다. 장난스러웠던 나는 타고 오를 수 없이 바라만 봐야 하는 것이 답답했던 기억이 난다. 만지고 매달리기보다 올려다보고 발만 동동 구르게 하는 그것이 조금 얄밉기도 했다. 꽃은 멀리서 보면 환성이 터졌지만 가까이서 보면 안타까움이 일었다. 그 마당에서 나팔꽃과 목련 등을 보던 나는 그것이 꽃을 닮았지만 꽃이 아닌 줄 알았다. 열매가 열릴 때까지도 더워 한창 놀던 내 소꿉장난의 희생물이 되기도 했고, 말라 비틀어진 열매가 떨어지면 문득 가을이 깊어감을 알았다. 내 어린시절에 대한 기억은 아주 밝다. 그래서 자등에 대한 나의 인상은 조금 의외이다. 나는 자등을 떠올릴 때마다 가슴이 아프니까.

내가 가장 좋아하는 색 역시 자등의 보라인데, 이는 위스테리어는 결코 아니다. 색명으로서의 wisteria는 흐린 보라빛이다. web color(Hex triplet)로는 #C9A0DC로 나타낸다. (r, g, b) = (201, 160, 220). 물론 등꽃의 색을 따서 정의한 것인데, 나는 이것이 실제 자등의 색깔이라고는 동의하지 않는다. 너무 연약하고 미덥잖지 않은가. 내가 보는 자등의 보라빛은 그 향기 만큼이나 풍요롭고 매혹적이다. 단정하게 푸르고 현란하게 희고 아쉬울 만큼만 붉다. 늦봄의 나른함처럼 부드럽고 초여름의 생동감처럼 화려하다. 단순히 원색에 가까운 색이라야 짙은 인상을 주는 것은 아니다. 동양의 정서일까. 은근해야 더 많이 느껴지고 수줍을수록 더 애틋해지는 것은. 그래서인지 좋아하는 색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솔직히 이 보라빛을 말한 적이 한 번도 없는 것 같다. 그것은 숏팬츠나 탱크탑이 새삼 유행이랄 것도 없는 시대를 사는 내가 머리를 다 푼 모습을 이성 앞에 보이길 꺼리는 것과 마찬가지로 억지스럽고 지극히 개인적인 부끄러움이다. 자등의 보라를 좋아한다는 말은 어쩐지 '나는 여자예요'라고 말하는 것 같아서, 그런 말은 아무에게나 하면 안 될 것 같아서.

戀 - 그리워할 연, 그릴 연.
그리워하는 것과 그리는 것은 어찌 다를까? 그리워하는 것은 보고자 하는 것이고, 그리는 것은 생각하는 것일까? 그리워하는 것은 이미 지난 것이고, 그리는 것은 아직 오지 않은 것인가? 그리워할 연은 자등의 꽃을 닮았다. 저녁 무렵 은은한 향이 내리 날리는. 번지는 어둠이 두렵지 않고 오히려 다스한 달빛을 기다리며 설레이는. 철 이른 여름처럼 날은 여태 밝아 넉넉한 시간들이 펼쳐 있는. 탐스러운 한 송이로 피어나진 못했어도, 하나로 모으기에는 알알이 다르고 복잡한 마음처럼. 기댈 기둥이 튼튼하지 않아도 하염없이 뻗어나간 다짐처럼. 가늘어도 질기고. 휘청여도 끊어지지 않는. 기다림이 슬프지 않은. 늦어도 미안할 것 없는. 이제부터 시작일. 오랜 꿈 같은.

待君下紫藤

가슴이 아픈 것은 슬퍼서가 아니다. 너무 좋아도 가슴이 아프다. 예순이 넘어서도 낭만을 가슴에 품고 자등을 그리며 연애소설을 쓰는 멋진 할머니가 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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