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ursday, June 07, 2018

지능 intelligence

죄가 벌이다.

이를 모르는 이들을 나자렛 예수는 불쌍히 여겼다. 그리고 그들을 대신하여 용서를 빌었다.

나는 둘 다 하지 못한다.

할 수 있다는 착각이 가끔 들 때가 있는데, 그들이 나와 직접적인 상관이 없다며 안심하는 경우에(이 또한 착각이다. 사는 동안 그 무엇과도 상관없는 일이란 없으니까.) 불쌍하게 느껴지는 것은 쉽게 된다. 곧잘 바로 된다. 하지만 대신 용서를 구하는 마음이 들지 않는 것은, 그로부터 공연히 분명하거나 또는 예측가능한 잠정적인 피해자의 고통이 끝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빌 자격 따위는 애초에 나에게 없는 것이다. 만약 내가 그 고통을 공유하고 있지 않다면.

그런데, 고통을 받아들이고 견디며 심지어 참는 피해 당사자인 예수조차 스스로 그들을 용서할 수 있다는 생각을 하지 않는다. 그 대신 그는 대신하여 빈다. 가해자를 가해자로 여기는 한 그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내가 고통이라는 테제에 민감한 것은 현대 윤리학에서 윤리적인 것으로 여겨질지는 몰라도, 고통에 집착하는 한 적어도 일단 가해-피해의 구별이라는 함정에 쉽게 빠지게 된다. 고통이란 그러한 것이 아님을 알면서도 무엇에서든 이유를 찾으려는 습성은 무엇이든 납득을 하지 못하면 벗어나지 못하게 만든다.)

어릴 때(내가 신약을 처음 읽은 것은 불과 몇 년 전이기 때문에) 예수의 행위를 알지 못한 채 (다만 페르시아의 구전 설화와 출애굽기의 일부를 각색한 그리스도의 신화를 주로 영화로 보았을 뿐) 그를 흉내냈다. 그리고 후에 소위 어른이 되고, 특히 대학교를 졸업하고 나서, 더 이상 그것을 할 수 없게 되었을 때 패배감과 동시에 황망함에 빠졌다. 퇴행하고 있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많이 고민했고, 곧 알게 되었다. 견딜 수 있는 것을 견디는 것은 참는 것이 아니다. 구도를 만들어 수를 쓰는 것을 처세의 지혜로 믿는 많은 사람들을 예수님처럼 늘 불쌍히 여길 수는 없더라도 오만한 내 눈에 늘 어리석게 보았던 것은 확실하다. 뻔히 다 드러나고 있는데 그들은 왜 내가 보지 못한다고 느끼는 걸까? 그조차 무지라고 쳐도, 나는 왜 그들을 막지 못할까? 그렇게 오만했다.

사람의 그릇이란 고정되어 있는 것은 아니지만, 그 크기의 잠재적 가능 범위는 한정되어 있는 것 같다. (이를 느낄 때 우리는 신이나 도를 찾게 되고, 스스로를 필멸자 또는 사람이라 부르기 시작한다.) 나의 크기는 내가 부단히 노력한 바도 있지만 주어지는 부분도 있다. 신으로부터든 환경으로부터든. 이세로부터든 시간으로부터든. 나보다 그릇의 크기가 작은 사람들을 자주 만나게 되면 자신의 그릇이 크다고 착각하게 되고, 동시에 자신이 참아 주고 있다고 오해하기가 쉽다. 마치 신이 피조물을 내려다보듯이.

그러한 오만을 옛 그리스의 신들은 용서하지 않는다. 현대판 명심보감을 통해 부지불식간에 주희를 흡수했던 시기와 겹치기는 하지만 계몽사에서 청소년판으로 나온 테세우스, 이아손, 페르세우스, 헤라클레스, 오이디푸스 등을 먼저 읽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대로라면 가치관이 부딪히려고 했지만, 그 불편함과 위험스러움의 냄새가 싫었던 나는 사람의 삶과 우주의 세계를 구분하고 각각의 영역으로 편입시키는 것으로 게으르게 풀려났다. 게을렀지만 즐거웠다. 하나는 추론 속으로, 다른 하나는 상상 속으로, 불러들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무런 갈등 없이 흠뻑 빠져들었다. 물론 당시에 나는 양자를 서로 다른 것으로 여기지도 않았고(일단 추론이란 낱말을 그때는 몰랐다.), '공상'이란 말로 불렀다. 취미는 공상하기예요.

오만이라는 말 또한 당시에 몰랐던 단어이다. 이 단어는 늘 묘하게 느껴진다. 아마 처음은 니오베였고, 그 다음은 제인 오스틴이었고, 그 다음은 모세였고, 그리고 예수이다. '신들은 종종 죄를 너무 가볍게 여기신단 말이야. 심지어는 살인까지도. 하지만 관대하다기에는 니오베나 아라크네를 생각하면...' 그래서 나는 내가 이해할 수 없었던 신화의 서로 다른 일화들을 하나로 꿰어 주는 오만이라는 단어가 처음부터 혼란스러웠다. 아직 혼란스러운 것을 보면 나는 오만에서 벗어나는 데 여태 서툰 상태임을 알 수 있게 된다. 어떻게 벗어날 수 있는지 예수가 보여 줬는데도. (돈오와 점수의 차이를 실감하는 대목이다.)

"목이 뻣뻣한" 백성에서 "마음이 가난한" 자가 되는 것은 사람들 사이에서의 공손함이나 인생의 풍파에 갈고 닦인 겸허함같은 것과는 무관하다. 그 과정에는 내 죄가 내 벌임을 아는 지능이 필요할 뿐이다. 내 경험에 의하면 "IQ"가 특별히 낮은 사람은 실제로 이 지능이 현저히 낮다. (학력과는 전혀 무관하다.) 지능 "지수"란 미신이지만 "지능"은 현실이다. 스님들은 이를 배고픈 쥐가 쥐약을 먹고 맛있다고 한다고 한다.

내가 용서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 중에는 끝까지 못할 것임을 알고 있는 사람도 있다.  자신의 죄가 자신의 벌임을 모르는 사람. 이때 나의 문제는 용서하지 못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용서하려고 하는 데에 있다. 마치 용서할 자격과 권한이 나에게 있다는 듯이.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내가 그에게 사죄를 바라는 것이 아니다. 그들은 꼭 이 점을 똑같이 착각한다.(지능이 나쁜 사람들의 특징 중 하나는 서로 공통점이 굉장히 많다는 것이다. 개체로서의 특성이 약해서 그렇다고 추정된다.) 네가 나를 속이는 것은 솔직히 나와는 상관없다. 그것을 내가 너의 언행에 속아 네 욕망을 채워 주는 것이라고 여기고, 그러한 나를 약하게, 어리석게, 자기 손에 들어온 먹이로 믿고, 승리자처럼 정복자처럼 의기양양해하는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솔직히 네가 지능이 얼마나 낮은지 알 수 있을 뿐이다. 대지모신. 어머니 자연. 그 힘과 의지를 우습게 여기는 너는 그 권능에 경외를 느껴 그 일부라도 자기 그릇 안에 담고자 분투하는 생명이 실은 너와 같은 화학구조를 가지고 네 눈앞에서 탈변하고 있는 모습을 한번 바라보기를. 그리고 그 모습을 못나고 보잘 것 없이 느끼는 것도 아름답고 위대하게 느끼는 것도 네 선택에 달려 있음을 알기를.

그릇의 크기와는 아마도 별개로, 수리 능력이 발달한 사람을 속이는 것은 무엇보다 어렵다. 언행의 논리적 불일치를 별다른 노력 없이 생리적으로 감지하기 때문이다. 정서적으로 의심하지 못했다고 해서 욕망이 놓은 덫에 걸리지는 않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방심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 쉽게 잡은 먹이처럼 보이니? 아니면 네가 뛰어나서 어렵지만 기어이 잡은? (이러한 비밀을 설사 이렇게 직접 말해 주어도 너는 여전히 모른다.) 지능이 높은 사람은 자신과 친하다. 자신의 욕망에 대해서 잘 안다. 그래서 너의 욕망에 대해서도 잘 알고 있는 것이다. 마치 내 것인 것처럼. 그래서 술수가 불필요하게 느껴지는 것이다. 그래서 사용하지 않을 뿐이다. 네가 술수에 뛰어나거나 먹이에 남다른 집중과 공력을 들였기 때문에 공성에 성공한 승장처럼 무장해제시킨 것이 아니라. 트루먼 쇼 정도의 공력을 들이지 않는 한은 이런 사람을, 미안하지만 나를 속일 수 없다. 그저 놔두는 것이다. 네 죄가 네 벌이라서. 그걸 아는 한, 초탈해서가 아니라 내가 let it go, 놔두지 않으면 네 벌에 내가 엮여 들어가게 되니까. 신과 도는 스스로 신과 도를 대신하려는 그러한 필멸의 생명의 오만을 결코 용서하지 않으므로. 물이 흐를 때에만 위아래가 생기기 때문에.

어려운 상황에 뛰어들어 먹이를 구할 수 있는 지능과 용기가 있는 쥐는 바빠서 다른 쥐들에게 신경쓸 여력도 없고 그럴 필요도 느끼지 않는다. 저의 한계를 알고 관찰력과 판단력이 있는 쥐는 뛰어난 쥐에게 도움을 받아 살아남는 법을 안다. 나머지 아무 것도 할 줄 모르는 쥐들은 이들이 없으면 죽는다. 그렇기 때문에 그토록 필사적으로 소모적으로 사는 것이지. 동족 사냥을 하며. 그것을 우월함으로 착각하며. 하지만 착각이라는 기분은 얼핏 있는지 불안에 시달리며. 죽이지 않으면 죽는다고 믿으니까.

아귀가 모든 것을 먹어 치우는 이유는 아쉬운 줄을 모르기 때문이다. 무엇이 소중한 줄을 모르기에 그것이 아쉬운 줄을 모르는 것이다. 불가능하다고 믿는 것들이 실은 가능함을 모르기 때문이다. 그저 잡아먹지 않으면 배가 고파서 죽을 것 같기 때문이다. 그러면서도 늘 허기가 지는 이유를 모른다. 할 수 있는 것들을 하면 각자가 바쁘고 서로가 아름답기에 서로를 죽일 이유도 여력도 필요도 없게 될 뿐이다. 모든 가능한 것들이 소중하고 그래서 아쉽다. 아낀다. 그래서 풍족해진다. 어떻게 변할지 얼마나 커질지 몰라 기대감에 충만하다.

지치지 않을 것 같았던 호의에 취해, 바래지 않을 것 같았던 믿음에 매달려, 커다란 그릇을 만나고도 소중한 줄을 몰라서 아쉬운 것이 없어서 먹어 치우기만 했던 네 손이 비어 있는 것은 무엇으로부터 버려졌기 때문이 아니라 네가 없앤 것일 뿐이다. 맛있게 씹어 삼켰기 때문이다. 원천은 애초에 네 밖이 아니라 네 안에 있었는데. 머리가 나빠서. 말로 해 줘도 모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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